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738년(영조 14)~1801년(순조 1) = 64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자는 도경(道卿)이고,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거주지는 경기도 포천이다.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홍회(洪晦)이고, 어머니는 임명원(任命元)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지낸 홍상빈(洪尙賓)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를 지낸 홍경렴(洪景濂)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서울에서 태어나 포천으로 이주해 살던 홍교만(洪敎萬)은 1777년(정조 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방목(榜目)』]
양근에 사는 고종사촌 권일신(權日身)의 집을 드나들다가 천주교를 알게 되었으나 즉시 신앙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먼저 입교한 아들 홍인(洪鏔)의 권유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794년(정조 15) 말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교우와 비신자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거나 천주교회 활동을 그만 둔 냉담자를 회두시키는데 열중하며 포천 지역에 널리 복음을 전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발발하자 홍교만은 딸의 시아버지인 사돈 정약종(丁若鍾)의 책 상자를 몰래 숨겨두었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던 중 발각되는 바람에 일찍 체포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홍교만은 아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순교를 각오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해 2월 14일 체포되었다.[『사학징의(邪學懲義)』] 의금부로 압송된 홍교만은 혹독한 문초에도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결국 사형판결을 받고, 얼마 후인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2월 18일],[『순조실록』 1년 2월 25일],[『순조실록』 1년 2월 26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순조 1년 2월 15일],[『승정원일기』 순조 1년 2월 18일],[『승정원일기』 순조 1년 2월 20일],[『승정원일기』 순조 1년 2월 26일] 당시 그의 나이 64세였다.
[성품과 일화]
홍교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홍교만은 체포되어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천지의 큰 부모가 되시니 어찌 큰 부모를 섬기지 않겠습니까? 또 큰 부모를 섬기는 천주교를 감히 사악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천하의 진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꿋꿋하게 신앙을 고집하였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이후 사형판결을 받았을 당시 관리들은 그의 결안에 “그는 뻔뻔스럽게도 그 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 행복이라고 감히 말한다. 그의 고집은 목석보다도 더 강하다. 그에게는 모든 형벌이 너무 가볍다.”라는 말을 적어 넣었다고 한다.[『벽위편(闢衛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