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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65년(영조 41)~1795년(정조 19) = 31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 때의 천주교도로, <을묘박해(乙卯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마티아. 거주지는 서울이다.
[영조~정조 시대 활동]
서울 중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길(崔仁吉)은 1784년(정조 8) 이벽(李蘗)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그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1790년(정조 14) 윤유일(尹有一)이 북경(北京)에 있는 천주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시작한 <성직자 영입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의 천주교도들이 어머니의 제사를 폐하여 문제가 된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발발하자 동생 최인철(崔仁喆)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조정의 회유에 따르며 석방되었다.[『정조실록(正祖實錄)』 15년 11월 11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정조 15년 11월 11일] 그러나 석방 직후 다시 교회로 돌아온 최인길은 다시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에 힘썼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선교사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었으므로, 최인길은 서울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1794년(정조 18) 12월 초 중국인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자 최인길은 그의 통역을 담당하였으며, 이듬해 초 계동 집에 주문모 신부를 거주시키며 그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는 등 주문모 신부의 활동을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795년(정조 19) 봄 예비신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의 입국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는 주문모 신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가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포졸을 기다렸다. 그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포졸들을 속일 수 있었으나 오래가지는 못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신분이 드러난 최인길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며, 심문을 진행한 관리들은 그에게서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자백 받고자 하였으나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하였다. 결국 최인길은 옥 안에서 사정없이 매를 맞아 사망하였고, 그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이때가 1795년 5월 12일로, 당시 최인길의 나이 31세였다.[『정조실록』 19년 7월 4일],[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성품과 일화]
최인길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최인길이 사망한 후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북경의 구베아(Gouvea) 주교는 그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또 “최인길은 이승훈(李承薰)이 신앙 전파를 위해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을 증진하는 데 있어 열성과 믿음과 신심이 뛰어난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라고 기록하였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