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801년(순조 1) = ?].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칸디다. 양인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서울 동대문 밖 전농동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산림동(山林洞)으로 출가하였으며, 1790년(정조 14) 이합규(李鴿逵)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녀는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특히 그녀의 며느리가 참판(參判)이기양(李基讓)의 집 유모로 들어가 있었으므로, 이를 통해 양반 집을 드나들며 많은 부녀자들에게 천주교를 알렸다. 남편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뒤에는 주변 여성 신자들 사이의 연락을 도맡았으며, 한신애(韓新愛)가 자기 집 노비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자 이합규와 정광수(鄭光受)를 소개해주기도 하였다.[『사학징의』]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발발하자 정복혜는 자기 집과 인근 교우 집들에 있던 성물과 교회 서적들을 모아 한신애의 집에 숨기고 교우들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된 신자들을 통해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서 그해 2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형조와 포도청을 오가며 문초를 당한 그는 잠시 배교를 생각하기도 했으나 다시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켰다.[『사학징의』] 그리고 4월 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사망하였다.[『순조실록』1년 4월 1일],[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