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791년(정조 15)~1839년(헌종 5) = 49세]. 조선 후기 순조(純祖)~헌종(憲宗) 때의 역관이자 천주교도로,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본관은 한양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순조~헌종 시대 활동]
‘용선’이라고도 불린 유진길(劉進吉)은 1791년(정조 15) 서울의 역관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학문을 익혀 20세가 되기도 전에 문장과 박식함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던 중 1801년(순조 1)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천주교 금압령으로 발생한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전후로 하여 천주교의 존재에 대해 알기 시작하였고 그것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가다가 1822년(순조 22) 우연히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고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유진길이 천주교 교리를 관심을 가지고 배우기 시작할 즈음, 조선에서 비밀리에 천주교를 믿고 활동하던 신자들은 중국을 통해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 일을 주도적으로 했던 이는 정약용(丁若鏞)의 조카 정하상(丁夏祥)이었다.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은 1823년(순조 23) 역관이던 유진길을 알게 되었고, 유진길은 역관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1824년(순조 24) 동지사(冬至使) 행차 때 북경(北京)을 방문해 세례를 받은 후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유진길은 8차에 걸쳐 북경을 왕복하였는데, 특히 1825년(순조 25) 말부터 1826년(순조 26) 사이 로마 교황에게 조선교회의 사정을 알리며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는 등 당시 조선 천주교의 지도자급 신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요청한 청원서는 1827년(순조 27)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가 정식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1834년(순조 34)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가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1835년(헌종 1) 모방(Maubant) 신부의 입국을 시작으로 서양인 성직자의 입국이 본격화되었다.
1839년(헌종 5)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발발하였고, 박해 초 유진길은 정3품 당상역관이라는 높은 지위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오빠인 김유근(金逌根)과의 친분으로 체포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유근이 병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자 유진길은 그해 6월 7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기 시작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헌종 5년 6월 7일] 그는 총 6차에 걸쳐 신문을 받았는데 신문 과정에서 혹독한 문초를 당하며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오히려 성직자 영입 운동에 자신이 주체적인 구실을 했다고 밝혔다.
결국 유진길은 그해 8월 14일 자신이 영입에 힘썼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Chastan) 신부, 앵베르(Imbert) 주교 등 3명의 외국인 신부 및 정하상 등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헌종실록(憲宗實錄)』 5년 8월 14일] 그리고 1925년 7월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성품과 일화]
유진길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유진길은 어려서부터 세상의 근원과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고자 10년 이상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가와 불가의 서적들까지 널리 구하여 읽고 연구하였다. 또한 1839년 체포되었을 때 가족과 친지들이 몰려와 배교를 권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