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767년(영조 43)~1801년(순조 1) = 35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요한. 평민이며, 거주지는 평안북도 선천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1767년(영조 43)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옥천희(玉千禧)는 집안이 가난하여 1794년(정조 18)부터 해마다 동지사(同知事)의 마부로 북경(北京)을 다니며 장사를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1798년(정조 22) 사신 행차 때 천주교 신자였던 황심(黃沁)을 알게 된 그는 황심의 권유로 1799년(정조 23) 북경에 갔을 때 구베아(A. Gouvea) 주교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운 후 세례를 받았다.[『순조실록』 1년 11월 5일]
1800년(순조 즉위년) 겨울 강완숙(姜完淑)의 집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편지를 전해 받은 옥천희는 동지사행을 따라 북경으로 들어가 구베아 주교에게 이를 건네주었고, 구베아 주교는 그에게 천주교 교리서인 『교요서론(敎要序論)』을 선물로 주고 은자 40냥과 주문모 신부에게 보내는 답장도 주었다. 이듬해에 이를 받아 귀국한 옥천희는 의주에서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고는 편지를 집에 숨겨놓은 후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구베아 주교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 귀국하던 중 의주에서 붙잡혀 1801년(순조 1) 9월 11일 포도청에 압송되었다.[『사학징의』]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던 옥천희는 황심과의 관계를 발설하였고, 이에 황심도 체포되었다. 그러면서 옥천희는 황사영(黃嗣永)이 서양 선박을 끌어들여 모반을 시도했음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그해 11월 5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사망하였다.[『순조실록』 1년 11월 5일]. 당시 그의 나이 3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