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769년(영조 45)~1801년(순조 1) = 33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 신자로,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사망.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경기도 양근이며, 세례명은 세바스티아노이다. 양아버지는 권철신(權哲身)이며, 양어머니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남돈(南墩)의 딸이다. 친아버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 한명인 권일신(權日身)이고, 어머니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순암 안정복(安鼎福)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권암(權巖)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권돈(權敦)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경기도 양근(楊根)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인 권철신(權哲身)의 양자로 들어간 권상문(權相問)은 생부 권일신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천주교 서적을 읽고 입교하였다. 장성해서는 교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웃에 사는 윤유일(尹有一) 등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생부인 권일신이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사망하자 한동안 신앙을 멀리하였다가, 1795년(정조 19)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 다시 신앙을 회복하며 주변 신자들과 함께 교리를 익혔다.[『사학징의』],[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1800년(정조 24) 6월 양근에서 체포되어 혹독한 신문을 받던 중 배교한다는 말을 하였으나, 포도청으로 이송되고 그해 11월 12일 다시 형조로 옮겨져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배교를 취소한 후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혔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약 13개월간 형조 옥사에 갇혀있던 권상문은 결국 1801년(순조 1) 12월 26일 요언요서(妖言妖書)의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고향인 양근으로 보내져 다음날 참수형으로 사망하였다.[『순조실록』 1년 12월 26일]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다.
한편 그는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후손]
부인 동복 오씨(同福吳氏)는 오석충(吳錫忠)의 딸로 2남을 두었다. 1남은 권황(權愰)이고, 2남은 권경(權憬)이다.[『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15 「녹암권철신묘지명(鹿菴權哲身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