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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50년(영조 26)~1805년(순조 5) = 56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문신. 부여현감(扶餘縣監)과 영평현감(永平縣監) 등을 지냈다. 자는 차수(次修), 재선(在先), 수기(修其)이고,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蕤), 위항도인(韋杭道人)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 박평(朴坪)이다. 적모(嫡母) 김씨(金氏)는 김석증(金錫曾)의 딸이고, 친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어려서부터 시와 서화에 뛰어났다.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연구하였고,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 유득공(柳得恭) · 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하였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1776년(정조 즉위년)에 이덕무 · 유득공 · 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냈는데, 이 시집이 청(淸)나라에 소개되어 조선 시문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 2)에는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의 학자 이조원(李調元) 및 반정균(潘庭筠) 등에게서 새 학문을 배웠다.[『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70 「선고적성현감부군년보상(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조선으로 돌아온 후 청나라의 견문 내용을 적은 『북학의(北學議)』 내 · 외편(內外篇)을 저술하였다. 『북학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내편(內篇)에서는 실생활에 있어서의 기구와 시설의 개선을 다루었고, 외편(外篇)에서는 정치 · 사회제도의 전반적인 모순점을 지적하며 다방면에 걸친 개혁 방안을 다루었다.
정조는 이 무렵 서얼들의 누적된 불만을 무마시키려는 정책의 하나로 1777년(정조 1) 3월 「서얼허통절목(庶孽許通節目)」을 발표하였다. 또 1779년(정조 3) 3월에는 규장각(奎章閣)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하고, 박제가(朴齊家)를 비롯하여 이덕무 · 유득공 · 서이수(徐理修)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하였다.[『연암집(燕巖集)』 권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박제가는 이로부터 13년간 규장각 내 · 외직에 근무하면서 이곳에 보관된 서적들을 마음껏 읽고, 정조를 비롯한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깊이 사귀며 정조의 명을 받아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일성록(日省錄)』 정조 8년 6월 12일, 정조 9년 8월 9일, 정조 9년 9월 12일, 정조 9년 9월 27일, 정조 10년 4월 25일] 1786년(정조 10)에는 당시 관리들에게 시폐(時弊)를 시정할 수 있는 「구폐책(救弊策)」을 올리게 하였는데, 이 때 그가 진언한 소(疏)는 주로 신분적인 차별을 타파하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며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1790년(정조 14) 4월 검서관으로서 이덕무 등과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완성시켰다.[『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14년 4월 29일] 그 해 5월에는 청나라 고종(高宗)인 건륭제(乾隆帝)의 팔순절에 정사(正使) 황인점(黃仁點)의 수행원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10월에 돌아오다가, 압록강에서 정조의 명을 받아 다시 연경으로 파견되었다. 이는 사은사(謝恩使) 황인점 등이 건륭제의 팔순에 갔다 돌아온 후 건륭제가 조선에 원자(元子:뒤의 순조) 탄생을 듣고 축하였다고 정조에게 알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정조는 “이는 특별히 사례하지 않을 수 없다.” 라면서, 문임 각신(文任閣臣)을 명하여 특별히 주문(奏聞)과 자문(咨文)을 짓게 하고 특산물을 갖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검서관이었던 박제가에게 군기시(軍器寺)정(正)의 직함을 임시로 주고 동지사(冬至使)를 수행하여 청나라에 다녀오도록 하였다.[『정조실록』 정조 14년 10월 24일] 1793년(정조 17)에는 부여현감(扶餘縣監)으로 있었으며, 이듬해인 1794년(정조 18) 2월에는 춘당대(春塘臺)무과(武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정조실록』 정조 17넌 5월 27일, 정조 18년 2월 26일] 1795년(정조 19)에는 영평현감(永平縣監)이 되었다. 그리고 1798년(정조 22) 『북학의(北學議)』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하였다.
1801년(순조 1) 사은사(謝恩使) 윤행임(尹行恁)을 수행하여 이덕무와 함께 네 번째로 청나라에 갔다가 그 해 9월에 돌아왔다. 이때 <동남성문(東南城門) 흉서사건(凶書事件)>이 발생하였고, 그의 사돈인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연좌로 종성부(鐘城府)에 유배되었다.[『순조실록(純祖實錄)』 순조 1년 9월 15일, 순조 3년 2월 6일] 그로부터 2년 후인 1803년(순조 3)에 종성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나 1년 넘게 시행되지 않다가 1804년(순조 4)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순조실록』 순조 3년 2월 6일, 순조 3년 6월 13일, 순조 4년 2월 24일] 그리고 4년만인 1805년(순조 5) 3월에 가서야 완전히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얼마 안 있다 세상을 떠났다.[『순조실록』 순조 5년 3월 22일]
[서화와 저서]
박제가는 실학자이면서도 시와 서화에 뛰어난 재질을 보인 문장가였다. 청나라 시대 『사고전서(四庫全書)』 계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대련(對聯 : 의미는 다르지만 동일한 형식으로 나란히 있는 문구) 형식을 수용하였다. 한문 글씨는 예서(隸書)풍을 띠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서풍과 추사체(秋史體)의 형성에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당대(唐代)의 구양순(歐陽詢)과 명대(明代)의 동기창(董其昌)풍의 행서(行書)도 잘 썼다.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높은 품격을 보여 준다.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 · 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꿩 그림과 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 작품으로는 「대련글씨」,「시고(詩稿)」,「목우도(牧牛圖)」,「의암관수도(倚巖觀水圖)」,「어락도(魚樂圖)」,「야치도(野雉圖)」 등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 『북학의(北學議)』, 『정유집(貞蕤集)』, 『정유시고(貞蕤詩稿)』, 『명농초고(明農草稿)』 등이 있다.
[후손]
부인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이순신(李舜臣)의 5대손 이관상(李觀祥)의 서녀인데, 자녀는 3남을 두었다. 장남은 박장임(朴長稔)이고, 차남은 박장름(朴長廩)이며, 삼남은 검서관을 지낸 박장암(朴長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