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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3년(광해군 5) = ?].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사(文士).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에 추증된 상산부원군(尙山府院君) 박충간(朴忠侃)이고, 할아버지는 관찰사(觀察使)박세훈(朴世勳)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박사화(朴士華)이다. 강변칠우(江邊七友) 가운데 한 명으로,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인 후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선조 · 광해군 시대 활동]
박치인(朴致仁)은 훈신(勳臣) 증좌의정(贈左議政) 상산부원군(尙山府院君) 박충간(朴忠侃)의 서자였는데, 서출(庶出)이었으므로 관리 등용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리하여 과거 시험을 보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얼차대(庶孽差待)에 불만을 품고 형 박치의(朴致毅)와 함께 같은 명가(名家) 출신 서인(庶人) 서양갑(徐羊甲:서익(徐益)의 서자) · 박응서(朴應犀:박순(朴淳)의 서자) · 심우영(沈友英:심전(沈銓)의 서자) · 허홍인(許弘仁) · 김평손(金平孫) 등과 생사를 같이 한 친구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강변칠우’ 또는 ‘죽림칠우(竹林七友)’라 자처하며 어울려 돌아다니며 유흥을 즐겼다. 그러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여주(驪州)의 북한강(北漢江) 강변으로 거처를 옮기고서는 각 집안을 합쳐 재물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 고을 사람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5년 4월 25일]
1613년(광해군 5) 3월 문경새재 길목에서 도적이 행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허홍인(許弘仁)의 노비 덕남(德男) 등이 체포되면서, 강변칠우가 도적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그 일당이 모두 검거되었다. 그런데 이때 박응서가 정권에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숙청하려던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 정인홍(鄭仁弘) 등의 꾐에 빠져, 은자를 탈취한 것은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 조달 때문이었다는 허위 자백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단순 강도 사건은 역적모의로 발전하였고, 결국 박치인은 그 해 5월 8일 처형당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5월 8일] 이 때 형 박치의는 혼자 도주하여 행방을 감추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4월 25일, 광해군 9년 1월 15일] 이후 이 사건은 계축옥사(癸丑獄事)의 빌미가 되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강화도에 유배된 후 세상을 떠났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은 사사(賜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