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 = ?].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인으로 서얼 출신.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에 추증된 상산부원군(尙山府院君) 박충간(朴忠侃)이고, 할아버지는 관찰사(觀察使)박세훈(朴世勳)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박사화(朴士華)이다. 강변칠우(江邊七友) 가운데 한 명으로,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인 후 검거되는 과정에서 도주하여 행방을 감췄다.
[선조 · 광해군 시대 활동]
박치의(朴致毅)는 훈신(勳臣) 증좌의정(贈左議政) 상산부원군 박충간의 서자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5년 4월 25일] 시문(詩文)에 능하고 학문이 깊은 뛰어난 문사(文士)였으나, 서출(庶出)이었으므로 관리 등용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리하여 과거 시험을 보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얼차대(庶孽差待)에 불만을 품고 동생 박치인(朴致仁) 등과 함께 같은 명가(名家) 출신 서인(庶人)인 서양갑(徐羊甲:서익(徐益)의 서자) · 박응서(朴應犀:박순(朴淳)의 서자) · 심우영(沈友英:심전(沈銓)의 서자) · 허홍인(許弘仁) · 김평손(金平孫) 등이 생사를 같이 하는 친구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강변칠우’ 또는 ‘죽림칠우(竹林七友)’라고 자처하며 때도 없이 어울려 돌아다녔다. 그런 가운데 1609년(광해군 1)부터는 여주(驪州)의 북한강(北漢江) 강변에서 생활을 하였는데, 각 집안의 재물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4월 25일] 1613년(광해군 5) 3월 문경새재 길목에서 도적이 행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허홍인의 노비 덕남(德男) 등이 체포되면서, 이들이 이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4월 25일]
그런데 이 사건은 단순히 불량한 서얼들의 강도짓이 아닌 역적모의로 발전하였다. 박응서가 광해군의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기 위하여 자금이 필요해서, 은자를 탈취했다고 진술하였던 것이다. 이는 광해군과 뜻을 같이 하던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등이 정권에 위협이 되던 영창대군 등을 숙청하고자 박응서를 사주하여 거짓으로 고백하게 한 결과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4월 25일] 그리고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결국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생하면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은 사사(賜死)되었고, 영창대군 또한 유배되었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그 해 4월 강변칠우 일당이 모두 검거되었으나, 박치의(朴致毅)만 혼자 도주하여 행방을 감추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4월 25일, 광해군 5년 7월 15일, 광해군 5년 8월 20일, 광해군 9년 1월 15일] 당시 동생 박치인은 5월에 처형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5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