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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7년(중종 2)~1581년(선조 14) = 75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이자, 학자. 이조 판서(判書)와 병조 판서 등을 지냈고, 밀원군(密原君)의 봉작을 받았다. 자는 중초(仲初)이며, 호는 낙촌(駱村) 또는 정관재(靜觀齋)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귀후서(歸厚署)별제(別提)박조(朴藻)이고, 어머니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기찬(奇欑)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형조 참판(參判)박광영(朴光榮)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박미(朴楣)이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그의 외사촌 동생이다. 복재(服齋) 기준(奇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28년(중종 23)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3년 뒤에 1531년(중종 26)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23년 3월 6일, 『방목(榜目)』] 1531년(중종 26) 승문원(承文院)과 홍문관(弘文館)을 거쳐서, 1532년(중종 27)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 이어 대교(待敎)로 승진하였고, 훗날 각각 영의정과 이조 판서가 되는 홍섬(洪暹) 및 송기수(宋麒壽)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다.
1533년(중종 28)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가 되었는데, 인재를 권면(勸勉)하기 위하여 치러진 문신(文臣)의 정시(庭試)에서 차석을 하여 자급(資級)을 올려 받았다.[『중종실록』 중종 28년 3월 27일, 중종 28년 5월 8일] 1534년(중종 29)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 1536년(중종 31)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로 전임되었다.[『중종실록』 중종 29년 11월 26일, 중종 31년 10월 23일, 중종 31년 11월 20일] 1537년(중종 32) 병조 정랑(正郞)을 거쳐서 이조 정랑으로 전임되었는데, 늘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그해 가을에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으며, 상례를 마친 후,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고, 외직인 영월군수(寧越郡守)로 좌천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1년 4월 23일] 영월은 단종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곳인데, 당시 영월군수가 3명이나 연이어 죽으니, 모든 사람이 이곳에 부임하기를 꺼렸으나 박충원(朴忠元)이 초연하게 처신하자 괴이한 소문이 사라졌다.
[명종 시대 활동]
1545년(명종 즉위년) 병조 판서 민제인(閔齊仁)이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박충원을 천거하자, 그를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으로 삼아 종사관의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11월 16일] 1546년(명종 1)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예빈시(禮賓寺) 정(正)으로 승진되었고, 이어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 겸 교서관(校書館) 판교(判校)가 되었다. 1548년(명종 3)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로서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암행어사가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3년 2월 8일] 1550년(명종 5)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고,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명종 5년 1월 29일, 명종 5년 4월 29일, 명종 5년 윤6월 6일] 얼마 후 다시 승정원 동부승지로 전임되었는데, 그해 겨울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상례(喪禮)를 마친 후, 1553년(명종 8)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8년 2월 5일] 이듬해인 1554년(명종 9)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형조 참의가 되었다.
1556년(명종 11)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는데, 경연청(經筵廳) 참찬관(參贊官)을 겸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1년 1월 4일, 명종 12년 4월 25일] 1558년(명종 13)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였고, 이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3년 2월 26일, 명종 13년 5월 19일, 명종 13년 8월 5일] 이어 병조 참판이 되었는데, 고조할아버지인 밀산군(密山君) 박중손(朴仲孫)의 훈봉(勳封)을 습봉(襲封)받아 밀원군(密原君) 겸 홍문관 제학(提學)이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3년 8월 15일] 1560년(명종 15) 예조 참판을 거쳐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이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5년 7월 24일, 명종 15년 8월 19일, 명종 16년 7월 24일] 1562년(명종 17)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한성부우윤이 되었고, 이듬해인 1563년(명종 18)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7년 8월 12일, 명종 18년 1월 4일] 1564년(명종 19) 홍문관 제학 · 병조 참판 ·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서, 그해 10월 특지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에 올랐다.[『명종실록』 명종 19년 2월 25일, 명종 19년 3월 20일, 명종 19년 9월 6일, 명종 19년 10월 6일] 1566년(명종 21) 병조 판서를 거쳐서,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567년(명종 22)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명종 21년 1월 12일, 명종 21년 4월 11일, 명종 22년 1월 4일, 명종 22년 1월 18일]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 즉위년)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는데, 경연청(經筵廳) 지사(知事)를 겸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즉위년 10월 30일, 선조 즉위년 11월 5일] 1571년(선조 4)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을 거쳐서,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선조 4년 1월 23일, 선조 4년 6월 17일, 선조 4년 12월 1일] 이후 1576년(선조 9)까지 형조 판서와 공조 판서 · 예조 판서 · 이조 판서 · 병조 판서를 두루 거쳤다.[『선조실록』 선조 5년 11월 29일, 선조 5년 12월 27일, 선조 6년 4월 22일, 선조 9년 7월 22일, 선조 9년 10월 11일] 1581년(선조 14) 2월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75세이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14년 2월 1일]
저서로 『낙촌유고(駱村遺稿)』가 있고, 『중종실록(中宗實錄)』과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품과 일화]
박충원(朴忠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국(器局)이 깊고 침착하였다. 문명(文名)으로 벼슬길에 진출하여 김안로(金安老) 등의 신임을 받았으나, 그 뒤 임백령(林百齡)에게 미움을 받아 외직인 영월군수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4년 2월 1일]
그가 영월군수로 있을 때 영월에 요사스런 일이 발생하여 여러 명의 관리가 갑자기 죽는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노산군(魯山君 : 단종)의 빌미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가 제문(祭文)을 지어 묘소에 제사를 올렸는데 그 제문에 “왕실의 원자로서 어리신 임금이었네, 청산의 작은 무덤 만고의 쓸쓸한 혼이로다.” 하였다. 그 뒤로 이 제문을 축문으로 사용하였다. 그가 6년 동안 영월군수로 있었으나 끝내 탈이 없었고 요사스런 말도 사라졌는데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하여 그를 칭송하였다 전해진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4년 2월 1일]
명종(明宗)은 1564년(명종 19)에 그에게 ‘대제학 병조 판서 박충원(大提學兵曹判書朴忠元)’이란 10자를 친필로 하사하였다. 당시에 그는 아들 박계현(朴啓賢)과 함께 부자가 동시에 육경(六卿)이 되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舟橋洞) 선영에 있으며, 유근(柳根)이 지은 신도비가 남아있다. 전라남도 장흥(長興) 세덕사(世德祠)와 충청남도 공주(公州) 숙모전(肅慕殿)에 제향(祭享)되었다.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이인수(李麟壽)의 딸인데, 자녀는 4남을 두었다. 장남은 병조 판서 박계현이고, 차남은 전함사(典艦司) 별제 박응현(朴應賢)이며, 삼남은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박용현(朴用賢)이고, 사남은 생원(生員) 박호현(朴好賢)이다. 증손주로는 영의정(領議政)박승종(朴承宗)이 있으며, 현손으로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박자흥이 있다. 박자흥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