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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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근수(尹根壽)

서지사항
항목명윤근수(尹根壽)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정치·행정가/관료/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37년(중종 32)∼1616년(광해군 8) = 80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의정부 찬성(贊成)의금부(義禁府) 판사(判事) 등을 지냈다. 봉작(封爵)은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이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자는 자고(子固)이묘, 호는 월정(月汀)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지낸 윤변(尹忭)이고, 어머니 성주 현씨(星州玄氏)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윤희림(尹希琳)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윤계정(尹繼丁)이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동생이고, 영의정 윤방(尹昉)과 이조 정랑(正郞)윤현(尹晛)의 삼촌이다. 처음에는 사림파(士林派) 김식(金湜)의 아들 김덕수(金德秀)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으며, 나중에는 형 윤두수와 함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曹植)을 찾아가서 성리학의 정통 이론을 배웠다. 형 윤두수와 맏조카 윤현(尹晛)과 함께 이른바 서인의 실세인 ‘3윤(尹)’을 형성하여, 동인(東人) 유성룡(柳成龍) 및 북인(北人) 정인홍(鄭仁弘)과 크게 대립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明)나라에서 구원병 5만 명을 청하고, 전쟁 물자를 얻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외교관이다. 서인(西人)의 정신적 지주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막역한 사이였으며, 노론(老論)의 원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스승이기도 하다.

[명종 시대 활동]
1558년(명종13)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2세였다.[『방목(榜目)』] 그해 형 윤두수도 정시(定時)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형의 나이는 26세였다. 두 형제가 나란히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1559년(명종 14) 형제는 같이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는데, 형 윤두수는 정자(正字)에, 그리고 동생 윤근수(尹根壽)는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상촌집(象村集)』 권27 「해평부원군월정윤공신도비명(海平府院君月汀尹公神道碑銘)」 이하 「윤근수신도비명」으로 약칭]

1560년(명종 15)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로 옮겨서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는데, 역사 기술에 재능이 있다고 이름이 났다. 1561년(명종 16) 행수법(行守法)에 따라서 자급을 종7품으로 낮추어 봉상시(奉常寺)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여름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자청하여 연천현감(漣川縣監)으로 나갔다.[「윤근수신도비명」] 1562년(명종 17)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중종(中宗) 대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와 김식의 신원(伸寃)을 청했다가, 명종의 노여움을 사서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좌천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7년 6월 24일, 명종 17년 9월 21일, 명종 17년 9월 23일] 윤근수는 일찍이 기묘사화 때 귀양 가서 자결한 김식의 아들 김덕수에게 수학하였기 때문이었다. 명종은 중종의 아들이었으므로, 중종이 일으킨 기묘사화에서 죽음을 당한 조광조와 김식을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당시 이량(李樑) 일파가 권력을 잡고 그 세력을 확장하고자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 좌랑(佐郞)에 추천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이조 좌랑 윤두수와 이조 정랑 기대승(奇大升)이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 젊었던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 이량을 중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량은 자기파 대간(臺諫)을 시켜서 윤두수 형제와 기대승 등을 탄핵하게 하였다. 1563년(명종 18) 8월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이감(李戡) 등이 윤두수와 박소립(朴素立), 기대승, 이문형(李文馨) 등 6명을 탄핵하여, 모두 파직하게 하였다. 사헌부 대사헌 이감도 아들 이성헌(李成憲)을 한림(翰林)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한원(翰苑)에서 기대승이 추천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대승을 더욱 원망하고 있었다. 또 이량은 인순왕후의 동생인 조카 심의겸을 나무라기를, “너는 박소립과 기대승, 윤두수를 무엇 때문에 좋아하는가. 이문형이 너더러 ‘성인(聖人)’이라고 한다는데, 네가 과연 성인이란 말인가.” 한 적도 있었다. 외삼촌 이량으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은 심의겸은 이량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윤근수 형제와 박소립·기대승 등 6명은 모두 벼슬에서 쫓겨났다.

윤근수 형제는 삭직(削職)된 후 파주(坡州)에 은거하여 살았는데, 얼마 뒤에 이량이 실각되었다. 이량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인순왕후의 아버지 심강(沈鋼)이 아들 심의겸의 말을 따라 사위 명종을 설득하여 왕명으로 이량 일파를 몰아냈다. 이때 심강은 윤원형 일파와 손을 잡았는데, 1563년(명종 18) 9월 영의정 윤원형과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교지(敎旨)를 받드니, 감격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박소립 등 6명 중에서 박소립과 기대승, 윤두수, 이문형은 전과 같이 등용하고, 윤근수와 허엽(許曄)은 아직 현직에는 제수하지 마소서.” 하였다. 하니, 명종이 이를 허락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8년 9월 15일]

1563년(명종 18) 9월 형 윤두수는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동생 윤근수는 승문원 검교(檢校)에 임용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564년(명종 19) 형조 좌랑과 병조 좌랑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리고 가을에는 어사(御史)에 임명되어 평안도 지방에서 재상(災傷)을 살펴보고 왕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1565년(명종 20) 1월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이 되었다가, 2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어서 교서관(校書館) 교리(校理)를 겸임하였고, 3월에는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명종 20년 2월 19일, 명종 20년 3월 4일「윤근수신도비명」] 이때 사간원(司諫院)에서 탄핵하기를, “도목(都目)에서 허다한 초임자들을 모두 청탁에 의해 주의(注擬)하고, 단지 효행자 한 사람을 가지고 책임을 때우려고 합니다. 이조 정랑 구사맹(具思孟)과 이조 좌랑 윤근수를 추고하여 치죄하소서.”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명종실록』 명종 20년 12월 28일] 이렇게 이조 좌랑에서 파직되었으나, 윤근수는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을 다녀온 뒤에 이듬해인 1566년(명종 21) 5월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명종실록』 명종 21년 5월 28일] 윤근수가 이조 좌랑과 이조 정랑을 역임하면서, 형 윤두수에 이어 인사권을 장악하였으므로, 반대파에서 윤근수 형제가 권력을 전횡한다고 비난하였다. 그 해에 윤근수는 의정부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가, 1567년(명종 22)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후광세첩(厚光世牒)』 부록, 「윤근수신도비명」]

[선조 전반기 시대 활동]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즉위년 10월 23일] 1568년(선조 1) 6월 중국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민기문(閔起文) 등과 함께 임시 접대 관원이 되어서 사신을 접대하였고, 8월에는 춘추관(春秋館)에서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자, 유희춘(柳希春) 등과 함께 도청(都廳) 낭청(郞廳)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선조실록』 선조 1년 13일, 선조 1년 8월 12일] 1570년(선조 3) 흉년이 들어 충청도의 백성들이 크게 굶주리자, 그해 5월 당시 홍문관 전한(典翰)이던 윤근수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수령관의 구황(救荒)을 적간(摘奸)하는 어사로 파견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년 5월, 「윤근수신도비명」]

1572년(선조 5) 11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5년 11월] 이어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다가,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로 체직되었다. 그리고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겨서 인재 양성을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워, 성균관 유생(儒生)들이 서로 다투어 학업에 분발하게 하였다.[「윤근수신도비명」] 1573년(선조 6) 2월 명나라에 <종계변무(宗系辨誣)>를 간청하러 가는 주청사(奏請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정사 이후백(李後白) 및 서장관 윤탁연(尹卓然) 등과 함께 중국 북경에 갔다.[『선조실록』 선조 6년 2월 28일] 이때 중국 명나라에서는 『속대명회전(續大明回典)』을 편찬하는 중이었다. 명나라 초기에 편찬한 『대명회전(大明回典)』에서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자손이라고 잘못 기록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하는 일과 이성계가 고려왕을 시역(弑逆)하였다는 기록을 속편 『대명회전』에서 정정해 줄 것을 황제에게 주청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6년 11월 1일] 윤근수는 중국어를 잘 하였기 때문에 명나라 예부(禮部)의 관원을 만나 직접 그 수정(修正)을 간절히 부탁하였다. 주청사 일행이 중국에서 돌아오자, 9월 왕이 전교하기를, “주청사 부사 윤근수에게는 가자하고 전지 20결 및 노비 3구를 아울러 내리라.”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6년 9월 16일] 이에 윤근수는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어, 이른바 대신(大臣)의 반열에 올랐다.[「윤근수신도비명」]

1574년(선조 7)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 1575년(선조 8) 경상도관찰사의 임기가 끝나서 교체되어 중추부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으나,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바꾸어 다시 임명되었다. 이때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김효원(金孝元)이 이조 정랑 자리를 둘러싸고 서로 다투다가, 마침내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과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으로 나누어지는 <을해년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났다. 윤근수 형제는 심의겸 형제와 막역한 사이였으므로, 이때 서인이 되었다.[「윤근수신도비명」] 1576년(선조 9)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어 판결사(判決事)를 겸임하였는데, 형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윤두수와 조카 이조 정랑 윤현과 함께 국가의 중요한 요직을 독차지하였다고 하여, 동인들은 윤두수 및 윤근수 형제와 그 조카 윤현을 ‘3윤’이라고 부르며 ‘3윤’이 권력을 전횡한다고 비난하였다.

1577년(선조 10) 윤두수는 동인의 비난을 피하려고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으나, 동인들은 윤근수 및 윤두수, 그리고 윤현의 ‘3윤’을 서인의 실세로 간주하여 계속 공격하였다. 1578년(선조 11) 10월 양사(兩司)에서 윤근수 형제와 조카 윤현이 진도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의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하여 모두 파직되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1년 10월 1일] 이수는 윤근수의 이종 4촌인데, 공물(貢物)대납(代納)하는 장세량(張世良)을 통하여 쌀을 배에 실어 보냈다가, 이수와 사이가 나쁜 경저리(京邸吏)가 이것을 보고 “이수가 ‘3윤’에게 뇌물을 보냈다”고 무고하면서 이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동인과 서인의 시국관이 서로 일치되지 않아서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동인이 <이수의 뇌물 사건>을 일으켜서 윤근수 형제와 조카 윤현을 모함하여 죄에 빠뜨리려고 하자, 서인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김계휘(金繼輝)가 선조에게 그들을 변호하기를, “윤근수 형제는 재주와 학문이 모두 뛰어난데, 사류(士類)에 대한 진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확실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사람을 죄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윤근수신도비명」]

1579년(선조 12) 9월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가 늙었다고 하여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으니, 왕이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바꾸어서 임명하여 윤근수로 하여금 고향 장단(長湍)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뵙는 데에 편리하도록 해 주었다. 그때 왕이 형 윤두수도 연안부사(延安府使)에 임명하여, 어머니를 찾아뵙는 데에 편리하게 해 주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2년 9월 1일] 1581년(선조 14) 2월 개성유수 윤근수가 개성경력(開成經歷) 심원해(沈源海)를 그대로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였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당하였다. 사간원에서 탄핵하기를, “개성유수 윤근수는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경력 심원해를 그대로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였으니, 추고(推考)하소서.” 하였으므로, 왕이 그대로 따랐다.[『선조실록』 선조 14년 2월 9일] 그때 개성경력 심원해가 단천군수(端川郡守)에 임명되었으나, 그가 없으면 개성에서 사신을 영송(迎送)하는데 지장이 있다며, 개성유수 윤근수가 그를 경력의 자리에 그대로 유임하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582년(선조 15) 추고를 받은 윤근수는 개성유수에서 서반(西班)의 군직(軍職)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인 1583년(선조 16)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는데, 고향의 어머니가 편찮았으므로, 어머니 병환을 구료하려고 관직을 그만두었다. 1584년(선조 16) 2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형 윤근수와 함께 청파동(靑坡洞)에 있는 선영(先塋)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587년(선조 20) 모친의 상기를 끝마친 뒤에 군직에 보임되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윤근수신도비명」] 4월 특진관(特進官) 윤근수가 요동(遼東) 압해관(押解官)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 나이 젊은 문신(文臣)을 같이 보내어 중국어를 학습시키도록 하였는데, 이는 윤근수가 중국어를 잘 하였기 때문에 후진을 양성하려기 위해서였다.[『선조실록』 선조 20년 4월 17일] 1588년(선조 21) 11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가, 조금 뒤에 공조 참판(參判)으로 옮겼다. 그는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산직(散職)에 있었는데, 이조 정랑 유근(柳根)이 공조 참판을 의망(擬望)할 때 수망(首望)에 동인 이노(李輅)를, 말망(末望)에 서인 윤근수를 천망(薦望)하자, 선조가 말망의 윤근수를 낙점하였던 것이다.

동인의 과격파 이발(李潑)이 크게 노하여 정랑 유근을 불러서 따지기를, “그대가 전형(銓衡)에 참여하여 어찌하여 윤근수를 천망하였다는 말인가.” 하니, 유근이 대답하기를, “이노는 재주도 없고 경력도 모자라는데도 오히려 수망(首望)에 의주(擬注)되었는데, 윤근수가 어찌 말망에 적합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이발이 야단치기를, “그대가 너무도 일을 모른다. 이노는 공조 참판에 그칠 사람이지만, 윤근수는 어찌 공조 참판에만 그칠 사람이겠는가.” 하였다. 윤근수가 결국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아무리 동인이 정권을 잡은 때라고 하더라도 이발이 그의 관작을 함부로 삭탈하지는 못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1년 11월 1일]

1589년(선조 22) 4월 선조가 공조 참판 윤근수를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에 임명하여 중국 명나라 북경으로 보냈다. 윤근수는 종계(宗系)를 완전히 정정하여 바로잡았다는 속편 『대명회전』을 즉시 조선에 반사(頒賜)하여 줄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10월 윤근수가 중국 북경에서 돌아올 때, 황제가 『속대명회전』 완질 한 부를 조선에 반사하였다. 이리하여 2백여 년 이상 조선에서 명나라에 교섭하던 종계변무가 끝나게 되었다. 1590년(선조 23) 예조 판서에 임명되어 춘추관 경연청(經筵廳) 지사(知事)를 겸임하였고,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거쳐서 성균관 동지사가 되었다.[「윤근수신도비명」] 이에 선조는 윤근수에게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가자하고 형조 판서로 승진시켰으며, 전택(田宅)과 노비를 하사하였다.[「윤근수신도비명」] 8월 윤근수는 종계를 변무(辨誣)한 공으로서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 1등에 책훈되었고,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으며,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다. 얼마 뒤에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어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된 후에 의금부(義禁府) 판사(判事)를 겸임하였다.

1591년(선조 24) 7월 좌의정 정철(鄭澈)이 <건저(建儲) 문제>로 화를 당하자, 대간에서 우찬성 윤근수와 사헌부 대사헌 윤두수 형제도 정철에게 당부(黨附)하였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윤근수 형제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사헌부 대사헌 윤두수는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었으며, 우찬성 윤근수는 문외출송(門外出送)당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7월 1일] 이에 윤근수는 서울의 도성문(都城門) 밖으로 쫓겨나서 광주(廣州) 촌사(村舍)에서 살았다. 형 윤두수도 함경도 회령에서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얼마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 윤근수가 거주하던 광주 촌사로 돌아와 형제가 함께 살았다.

[선조 후반기 시대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왜군이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하여, 동래성(東萊城)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선조는 명장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을 파견하여 왜군의 북상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이일은 상주(尙州)에서, 신립은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서 왜적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왜군이 서울 근교로 육박하자, 선조는 서울을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서북쪽으로 피난을 가고자 하였다. 이에 불안해진 선조는 윤근수 형제를 빨리 조정으로 불러들이라고 명하였다. 선조는 평소 윤근수의 슬기로운 지혜와 윤근수의 믿음직한 결단력을 높이 평가하였으므로, 이러한 난국을 해쳐나가는 데에는 윤근수 형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윤근수 형제가 광주에 우거하다가 왕명을 받고 급히 서울에 달려오니, 이조에서 두 사람에게 본래의 봉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다음날 4월 29일 한밤중에 선조는 비빈(妃嬪)과 백관들을 거느리고 서울 도성을 빠져나가 서북쪽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이튿날 왕의 대가(大駕)가 동파관(東坡館)에 이르렀을 때 선조가 윤두수 형제를 앞으로 불러내어, “그대 형제는 내 곁을 떠나지 말고 나와 생사를 함께 하자.”고 하고, 허리춤에 찼던 주머니를 풀어서 하사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4월 14일, 「윤근수신도비명」]

5월 일행이 개성(開城)에 도착하자, 선조가 윤두수를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임명하여 일행을 통솔하게 하고, 얼마 안 되어 윤두수를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한 후,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책봉하였다. 우의정 윤두수가 아뢰기를, “역관(譯官)을 정해서 요동도사(遼東都事)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어 우리나라의 위급한 변란을 알려야 합니다.” 하니, 선조가 이를 허락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5월 3일] 우의정 윤두수가 중국어를 잘하는 동생 예조 판서 윤근수를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내어 조선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구원병을 요청하게 하였다. 윤근수는 명나라 요동도사와 광녕부(廣寧府)에 가서 5만 명의 구원병을 조선에 보내달라고 교섭하였다. 이에 7월 명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이 명나라의 요동(遼東)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어 10월에 비변사에서 윤근수를 요동에 계속 보내어 구원병을 증파할 것을 교섭하게 하였으므로, 6개월 사이에 윤근수는 명나라 광녕부에 세 번, 요동도사에 여섯 번 왕래하면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광녕총병관(廣寧總兵官) 양소훈(粱紹勳) 등과 교섭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12월에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요동 군사 4만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1593(선조 26) 1월 조선의 관군과 명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왜군과 싸워서 평양성(平壤城)을 회복하고 북상하는 왜군을 격퇴하였다. 이어 같은 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어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서 그해 5월 중추부 판사가 되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6년 1월 1일] 그때 윤근수는 경략 원접사(遠接使)에 임명되어 안주(安州)에 갔는데, 명나라 신종(神宗)이 병부 시랑(侍郞) 송응창을 조선경략(朝鮮經略)에 임명하여 조선의 안주에 와서 명나라 군사를 총지휘하게 하였기 때문이다.[『선조실록』 선조 26년 4월 7일] 윤근수가 그 접반사로 선택되어 경략 송응창을 잘 접대하여, 명나라에서 전쟁 물자와 군사 비용을 얻어냈는데, 이것은 모두 윤근수의 교섭에 힘입은 결과였다.

1594년(선조 27) 12월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에 가서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명나라에서 이를 거절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왕의 적자(嫡子)가 아니고, 서출 제 2왕자가 세자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1595년(선조 28) 4월 사헌부에서 세자 책봉에 실패한 주청사 윤근수 일행을 탄핵하고, 모두 파직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말하기를, “해평부원군 윤근수는 1품의 원로훈신(元老勳臣)이니 파직시킬 수 없다.”라고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8년 4월 1일] 이어 11월에 선조는 윤근수를 의정부 좌찬성으로 임명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8년 11월 23일] 1596년(선조 29) 1월 해평부원군에 임명되었고, 9월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9년 1월 29일, 선조 29년 9월 3일]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서 왜병이 다시 대규모로 침략하자, 윤근수는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懿仁王后)를 모시고 경기도 수안(遂安)에 있었다. 그러다가 대가가 장차 남쪽으로 피난을 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차자(箚子)를 올려 대가를 함께 수행할 것을 청하였다.[「윤근수신도비명」] 마침내 왕의 허락을 받아서 서울로 돌아왔으나, 왜병이 북상하지 않아서 선조가 도성(都城)에 그대로 머물고 세자가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주(全州)로 내려갔다. 윤근수는 서울에 남았으나, 형 윤두수는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에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1598년(선조 31) 10월 승문원 제조(提調)가 되었다가, 1600년(선조 33) 경연청 지사를 겸임하고, 여러 사람과 함께 『주역(周易)』을 교정하였다. 1601년(선조 34) 형 윤두수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당시 나이가 70세가 가까웠는데도 상복을 입고 형의 영전에 호곡(號哭)하고 슬피 울었다[「윤근수신도비명」] 1604년(선조 37) 6월 윤근수는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여 성공한 공로를 인정 바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훈되었다.[『고봉집(高峯集)』「논사록(論思錄)」 상권] 선조 말년에 소북(小北) 유영경(柳永慶)이 정권을 잡고 서인을 탄압하였다. 이에 그는 1606년(선조 38) 나이가 70세가 넘었다고 하여 치사(致仕)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大北) 정인홍이 정권을 잡고 서인을 탄압하였다. 특히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 때 정인홍의 절친한 친구 최영경(崔永慶)을 억울하게 죽인 정철(鄭澈) 및 윤두수에게 복수하려고 하였으나, 두 사람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러므로 정인홍은 윤근수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으나, 윤근수는 나이가 70세가 넘어서 정계에서 물어나 있었으므로 별다른 일은 없었다. 윤근수는 책을 읽고 청빈하게 살면서 정치와는 손을 끊었기 때문에 정인홍 및 이이첨(李爾瞻)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던 많은 서인들을 죽이거나 극변(極邊)으로 유배시켰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종묘에 올리는 묘호(廟號)를 논의할 때 모두 선종(宣宗)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근수는 중국의 예서(禮書)에서 조종(祖宗)의 규정을 인용하여 선종을 선조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광해군이 마침내 이 주장을 받아들여 1616년(광해군 8) 8월 선조의 묘호를 선종에서 선조로 바꾸었다. 1616년(광해군 8) 4월 광해군은 80세의 윤근수에게 특별한 은전을 베풀어, 그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었으며, 6월에는 쌀과 콩을 비롯하여 술, 돼지, 닭, 조기 등을 특별히 하사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8년 4월 21] 이것은 윤근수가 선종을 선조로 바꾸자고 주장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는데, 광해군은 조(祖)가 종(宗)보다 높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 80세의 윤근수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윤근수는 마음이 편치 못하여 예조 판서에게 굳이 사양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당시 인목대비의 폐위 문제로 정청(庭請)하지 않는 서인들은 모두 처형을 받는 상황이었으므로, 서인 윤근수는 이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해 8월 작은 병으로 몸져누웠고, 이에 광해군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였으나, 1616년(광해군 8) 8월 17일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80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왕이 이틀 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고, 예관을 보내 조제(弔祭)하였으며 관가에서 예장(禮葬)하였다. 그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사람들이 애도하기를, “참으로 어진 재상이 돌아갔다.”고 하였다.[「윤근수신도비명」]

윤근수는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 서법이 매우 힘차고 방정하여 사람들이 왕희지(王羲之)의 영화체(永和體)라고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월정집(月汀集)』을 비롯하여 『사서토석(四書吐釋)』, 『마한사초(馬漢史抄)』, 『한문질의(韓文質疑)』, 『송도지(松都志)』, 『조천록(朝天錄)』, 『조경창수(朝京唱酬)』 등이 있다.[『고봉집』 별집 부록 권2] 또 그가 지은 시문(詩文) 몇 권이 본가에 소장되어 있었다.[「윤근수신도비명」]

[건저 문제와 윤근수 형제]
1591년(선조 24) 7월 좌의정 정철이 건저 문제로 화를 당하자, 대간에서 우찬성 윤근수도 좌의정 정철에게 당부하였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윤근수 형제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형 윤두수는 함경도 회령에 유배되었다. 이때까지 선조는 적자(嫡子)가 없고 서자(庶子)만 십여 명이 있었다. 원래 선조는 김인빈(金仁嬪)이 낳은 제4왕자 신성군(信城君)이후(李珝)를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공론은 김공빈(金恭嬪)이 낳은 제2왕자 광해군 이혼(李琿)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이에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정철, 그리고 우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왕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도록 건의하려고 하였는데, 이때 세자를 세우는 문제를 건저 문제라고 불렀다.

우의정 유성룡이 발의하여 선조에게 건저를 청하기로 하고, 3인의 의정(議政)이 대궐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나, 영의정 이산해는 두 번이나 약속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다. 영의정 이산해는 이미 선조가 제4왕자 신성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뜻을 간파하고, 겉으로는 조정의 의논에 순종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김공량(金公諒)을 통하여 선조에게 참소하기를, “좌의정 정철의 무리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장차 신성군을 해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3의정이 입대(入對)한 후 좌의정 정철이 먼저 선조에게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선조가 이를 듣고 몹시 기분이 언짢아하였으므로, 영의정과 우의정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에 부제학 이성중(李誠中)과 대사간 이해수(李海壽)가 나아가 아뢰기를, “이는 정철 혼자만의 말이 아닙니다. 바로 신들이 함께 의논한 것입니다.” 하자, 선조는 정철 등 서인들을 크게 의심하여 그들을 처벌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2월 선조가 먼저 이성중과 이해수를 외관직으로 좌천시키자, 대간에서 좌의정 정철을 탄핵하여 파면시키도록 청하였다. 사헌부 대사헌 이원익(李元翼)과 사간원 대사간 홍여순(洪汝諄) 등이 합사(合辭)하여 정철과 서인을 탄핵하였다. 영의정 이산해는 병조 좌랑 이홍로(李弘老) 등과 결탁하여, 정여립 모반 사건 때 좌의정 정철이 동인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7월 왕의 특명으로 정철을 함경도 명천(名川)으로 안치(安置)하였으며, 윤두수를 비롯하여 이춘영(李春英)과 유공신(柳拱辰), 백유함(白惟咸), 홍성민(洪聖民), 이해수 등을 모두 북쪽 변방으로 유배 보냈다. 또 윤근수를 비롯하여 박점(朴漸)황혁(黃赫), 우성전(禹性傳) 등은 삭탈관직 하였으며, 황정욱(黃廷彧)과 이산보(李山甫), 이성중 등도 모두 파직하였다.[『우계연보(牛溪年譜)』]

1591년(선조 24) 5월 양사가 합계하기를, “우찬성 윤근수, 중추부 판사 홍성민 등은 정철에게 붙어서 간사한 자들을 조정에 끌어들였으니 삭탈관작하고 문외 출송시키소서.”하니, 왕이 따랐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5월 1일] 이에 윤근수는 서울의 도성문 밖으로 쫓겨나서 광주 촌사에서 살았는데, 집안 살림이라고는 서책 상자만 놓여 있을 뿐 아무런 물건이 없어서 초라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이에 선조가 경기도관찰사로 하여금 윤군수를 위문하고 쌀과 콩을 주도록 명하였다.[「윤근수신도비명」] 형 윤두수는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선조의 특명으로 함경도 홍원에 이배되었는데, 얼마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서 동생 윤근수가 살고 있는 광주 촌사로 와서 형제가 함께 살았다.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때 윤근수의 외교 활동]
1589년(선조 22) 4월 선조가 공조 참판 윤근수를 종계변무사 겸 진하사(進賀使)에 임명하여 중국 명나라 북경으로 보냈다. 윤근수는 종계를 완전히 정정하여 바로잡았다는 속편 『대명회전』을 즉시 조선에 반사하여 줄 것을 황제에게 주청하는 한편, 중국 조정에서 명나라 예부의 높은 관리를 만날 때마다 『속대명회전』 완질 한 부를 건너달라고 유창한 중국어로 분명하고 진실하게 부탁하였다. 조선의 사신 윤근수가 정성을 다하고 구사하는 언사가 노련하니, 명나라 예부 상서(尙書) 우신행(于愼行)이 크게 칭찬하기를, “제후국에도 인재가 있구나.” 하였다.[「윤근수신도비명」] 10월 윤근수가 중국 북경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칙서(勅書)를 보내고 『속대명회전』 완질 한 부를 조선에 반사하였다. 처음에 윤근수가 사행(使行)한 목적은 종계를 수정한 조문이 실린 『속대명회전』 전질 한부를 조선에 반사하도록 주청하는 것이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6년 11월 1일] 그런데 황제가 특명으로 비사(祕史)에 실린 조선왕조 세계(世系)의 정본(正本)을 윤근수 일행에게 보여주는 한편, 황극문(皇極門) 안에서 칙서를 선포하고 『속대명회전』의 전질 한부를 조선에 반사하여 주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에서는 2백여 년 동안 중국 명나라에 줄기차게 요구해 온 종계를 변무(辨誣)하는 외교 업무가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종계변무사 윤근수가 명나라에서 『속대명회전』의 전질 한 부를 얻어 가지고 서울로 돌아오자, 선조는 뛸 듯이 매우 기뻐하며 종묘에 종계변무가 성사된 것을 고한 뒤에 정사 윤근수에게 정2품하 자헌대부를 가자하였다. 그리고 형조 판서로 승진시키고, 전택과 노비를 하사하였다.[「윤근수신도비명」] 1590년(선조 23) 8월 윤근수는 종계를 변무한 공으로서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 1등에 책훈되었고, 정2품상 정헌대부에 가자되었으며, 해평군에 봉해졌다.

한편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선조 25) 5월 우의정 윤두수가 “역관을 정해서 요동 도사에 자문을 보내어 우리나라의 위급한 변란을 알려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였다. 이에 선조가 적당한 사람을 선정해서 빨리 보내라고 명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5월 3일] 그해 6월 우의정 윤두수는 중국어를 잘하는 동생 예조 판서 윤근수를 사신으로 요동으로 보내어 명나라 광녕부로 가서 조선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구원병을 요청하게 하였다. 윤근수는 명나라 요동도사와 광녕부에 가서 5만 명의 구원병을 조선에 빨리 보내달라고 교섭하였다.

6월 선조가 평양까지 호종(扈從)한 여러 대신들에게 추가로 상작(賞爵)을 내릴 때 예조 판서 윤근수에게 종1품하 숭정대부를 가자하였다. 그런데 7월 윤근수가 요동에서 의주 행재소로 돌아와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교섭한 결과를 자세히 보고하자, 선조가 이조에 명하기를, “이곳에 와 있는 재상 가운데 누군들 고생하지 않았겠는가마는, 예조 판서 윤근수는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일 때문에 가장 고생하였으니, 그에게 다시 가자하라.”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7월 4일] 이조에서 특별히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를 가자하고, 해평부원군에 봉하였다. 7월에 명나라 장수 조승훈이 명나라의 요동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조선으로 들어와서, 평양 전투에 참여하였다. 10월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사세가 너무 긴급하니, 요동에 구원병을 간청하는 사람을 계속하여 보내어 군사를 보내도록 애걸해야 합니다. 예조 판서 윤근수를 보내소서.” 하니, 선조가 윤근수를 요동에 계속 보내어 구원병을 증파하는 교섭을 하게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10월 5일]

이에 선조가 의주가 머물고 있던 6개월 사이에 윤근수는 명나라 광녕부에 세 번, 요동도사에 여섯 번 왕래하면서 조선의 긴급한 사정을 개진하여 구원병을 간청하였다. 그때마다 윤근수는 차분하고 조리 있게 설득하였으므로, 명나라 경략 송응창과 광녕총병관 양소훈 등이 감동하여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윤근수신도비명」] 그 결과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요동 군사 4만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여송은 요동의 토호 출신인데, 그의 선조가 세종 때 만주로 들어간 조선 사람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광녕총병관 이성량(李成樑)은 고아가 된 누르하치를 양자로 키워주었다고 한다. 명나라에서 군사를 5만여 명을 조선에 보낸 것은 오로지 조선의 외교관 윤근수의 끈질긴 교섭의 결과였다. 1593(선조 26) 1월 조선의 관군과 명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왜군과 싸워서 평양을 회복하고 북상하는 왜군을 격퇴하니, 비로소 나라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윤근수는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어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그해 5월 중추부 판사가 되었다. 그때 윤근수는 경략 원접사에 임명되어 안주에 갔는데, 명나라 이여송의 군사가 평양을 점령한 뒤에 명나라 신종이 병부 시랑 송응창을 조선 경략에 임명하여 조선의 안주에서 명나라 군사를 총지휘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윤근수는 그 접반사로 선택되어,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경략 송응창을 잘 접대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군사 비용 은화 2만 냥을 얻어냈는데, 이것은 모두 윤근수의 교섭에 힘입은 결과였다. 경략 송응창은 평소 윤근수를 중하게 여기다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에도 그를 대동하고 요동으로 갔다. 마침 서울이 수복되어, 선조가 환도할 때에 윤근수는 경략을 접반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대가를 따라서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선조는 차고 있던 보도(寶刀)를 풀어서 그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평소에 손안에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경은 이것을 차고 언제나 나를 생각하라.” 하였다.[「윤근수신도비명」]

1594년(선조 27) 12월 주청사에 임명되어, 부사 최립(崔岦)과 서장관 신흠(申欽)과 함께 중국 명나라 북경에 가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명나라에서 이를 거절하였다. 예부 상서(尙書) 범겸(范謙) 등이 대답하기를, “황제가 말씀하기를, ‘조선에서 난리를 만나서 세자를 세워서 천하 인심을 붙잡아 두려고 한 도(道)를 맡겨 약간의 권한을 주었다. 과연 난을 평정시킨 특이한 공이 있다면, 새로 세자 책봉을 논의하더라도 무방할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그대들에게 세자 책봉을 가볍게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난중잡록(亂中雜錄)』 권3] 이것은 선조가 광해군을 급하게 세자로 정하여 임진왜란 때 전주에서 분조를 거느리고 활동한 것을 말한 것인데, 명나라에서는 왕의 적자가 아니고, 서출 제 2왕자가 세자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1595년(선조 28) 4월 사헌부에서 세자 책봉에 실패한 주청사 윤근수 일행을 탄핵하기를, “해평부원군 윤근수, 호군(護軍) 최립, 사성(司成) 신흠 등은 사명(使命)을 띠고 세자를 책봉해 달라고 주청하러 명나라에 갔는데, 성의를 다해 주선하지 못하여 사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칙서를 받들고 돌아와서 바로 복명(復命)하지 않고 지체하였으니, 모두 파직을 명하소서.” 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아뢴 대로 해야 할 것이나, 해평부원군은 1품의 원로 훈신이니 파직시킬 수 없다.”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8년 4월 1일] 그해 11월 선조는 윤근수를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 임명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8년 11월 23일] 1604년(선조 37) 6월 임진왜란 때 서울에서 의주까지 선조의 거가(車駕)를 따라간 사람들 중에서 86명을 엄선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봉하였는데, 호성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과 정곤수(鄭崐壽) 2명이었다. 그리고 2등은 윤두수와 윤근수, 유성룡 등 31명이었고, 3등은 정탁(鄭琢)과 허준(許浚) 등 53명이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37년 6월 25일] 윤근수가 호성공신 2등에 책훈된 것은 거가(車駕)를 호종한 공훈보다 명나라와 교섭을 하여 성공한 것을 포상한 것이었다.[『고봉집』「논사록」 상권]

윤근수는 모두 사신으로 4번이나 명나라 북경에 갔다 왔으며, 요동에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10번이나 압록강을 건넜으나, 그때마다 그는 힘들어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그 뒤에 그의 조카 윤방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관리들이 삼촌 윤근수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윤근수신도비명」]

[선조의 묘호 문제]
선조가 세상을 떠난 후 처음에 종묘에 올리는 묘호를 논의할 때 모두 선종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근수는 ‘선종’보다 ‘선조’가 옳다고 주장하였는데,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한 선조는 나라를 창업한 태조만큼 업적이 크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주례(周禮)』에서 조종(祖宗)의 규정은, ‘창업의 군주’에게만 ‘조(祖)’를 붙이고 ‘수성(守成)의 군주’에게는 ‘종(宗)’을 붙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창업의 군주 이외에는 ‘조’를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세조(世祖)가 처음으로 조종(祖宗)의 원칙을 무너뜨렸고, 이때 이를 주장한 사람은 신숙주(申叔舟)였다. 윤근수는 중국의 예서(禮書)에서 조종의 규정을 인용하여 선종을 선조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광해군이 마침내 이 주장을 받아들여 1616년(광해군 8) 8월 선조의 묘호를 선종에서 선조로 바꾸었다. 그 뒤에 인조(仁祖)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켰다고 하여,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는 학문을 장려하여 문예 부흥을 일으켰다고 하여, 모두 종을 조로 바꾸었다.

1616년(광해군 8) 4월 광해군은 예조에 명하기를, “윤근수는 선조의 1품 재상인데, 지금 나이가 80세에 찼으니, 예조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특별히 베풀어서 기로(耆老)를 존경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라며, 광해군은 80세의 윤근수에게 특별한 은전을 베풀었다. 5월 이조에서 아뢰기를, “윤근수는 작질(爵秩)이 이미 극품에 달하여 다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 시행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광해군이 대답하기를, “그 자손 중에서 사람을 가려서 알맞는 관직을 제수하라.” 하고, 그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6월에는 윤근수에게 쌀 15섬섬과 콩 5섬, 술 5병, 돼지 1마리, 닭 5마리, 석수어(石首魚 : 조기) 20마리를 특별히 하사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8년 6월 19일] 이것은 윤근수가 선종을 선조로 바꾸자고 주장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는데, 광해군은 조가 종보다 높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성품과 일화]
윤근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생김새가 단아하고 청수(淸秀)하였으며, 성품이 단정하고 뜻을 세우면 반드시 지켰고, 말과 행동은 모가 나지 않았다. 그의 마음가짐은 평이하고 정직하며, 자애롭고 진실하며, 사물을 대할 때는 너그럽고 대범하였다. 선한 사람을 좋아하고 글하는 선비를 아끼고,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후배들을 사랑하고 이끌어주었다. 그는 일찍이 욕설로 남을 비난하거나 농담으로 남을 놀리거나 남의 숨은 결점을 들추어내어 말한 적이 없었으나, 오직 남의 허물만은 용납하지 못하고 엄하게 꾸짖었다.[「윤근수신도비명」]

천부적으로 총명하고 영특한 자질을 타고나서 겨우 10세 때 벌써 『효경(孝經)』 및 『소학(小學)』과 사서(四書) 등의 서적을 통달하고 역대의 사적을 잘 알았다. 아버지 윤변이 삼척부사(三陟府使)에 임명되어 부모를 따라 삼척부에 가서 살았을 때였다. 아버지 윤변이 일찍이 『사문유취(事文類聚)』의 글을 열람하고 있었는데, 5남 중에서 막내아들인 윤근수가 옆에서 그 글을 모두 다 암기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 중에 한두 가지를 뽑아서 물어보니, 어린 아들이 어김없이 척척 대답하였다. 아버지 윤변은 한층 더 아들을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부인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대성할 터이니, 나는 늙고 병약하여 비록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부인은 당연히 이 아이의 봉양을 누리게 될 것이오.” 하였다. 얼마 뒤에 삼척부사 윤변이 전염병에 걸려서 임지에서 별세하자, 그는 어머니를 따라서 서울로 돌아왔다.[「윤근수신도비명」]

어릴 때부터 글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어머니가 형 윤두수는 이소재 이중호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하고, 동생 윤근수는 기묘사화 때 귀양 가서 자결한 사림파의 우두머리 김식의 아들 김덕수에게 가서 수학하게 하였다. 형제가 학문에 뜻을 세우고 성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자. 어머니는 당시 성리학의 대가에게 보내어 주자의 정통 학문을 익히게 하였다. 윤근수는 형 윤두수와 함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찾아가서 주희(朱熹)의 주자학(朱子學)과 육구연(陸九淵)의 양명학(陽明學) 이론과 차이점을 수학하여 그 인증(印證)을 받았다. 이때 윤근수는 『통서(通書)』를 비롯하여 『경세서(經世書)』와 『동명(東銘)』, 『서명(西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같은 글에 모두 정통하였다. 퇴계 이황이 젊은 윤근수를 칭찬하기를, “자고(子固) 윤근수는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니, 후일에 그 학문의 조예가 반드시 깊어질 것이다.” 하였다. 이때 유성룡 및 김성일(金誠一) 등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뒤에 윤근수 형제는 심의겸을 지지하여 서인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여 동인의 유성룡 세력과 크게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서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와 학문적 교유를 통하여 막역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윤근수신도비명」]

윤근수는 어머니 현씨 부인을 효성을 다하여 섬기고, 배다른 세 형님을 엄한 아버지처럼 섬겼다. 친형 윤두수의 아들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고, 조카들을 가르쳐서 여러 명이 대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카 윤방은 마침내 영의정이 되었다. 손위의 형수들이 과부로 살아가자, 녹봉을 털어서 도와주었고 공신(功臣)을 책봉할 때 나라에서 하사한 노비를 나누어주었다. 그는 청백리(淸白吏)로서 검소하게 사는 데에 만족하여, 식탁에는 두 종류의 고기반찬이 오르지 않았고, 방안에는 찾아오는 손님에게 내줄 방석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집이 불타버려서 살림집을 마련하지 못했는데, 형 윤두수가 가재를 털어서 집을 마련해 주었다. 또 평소에 글을 좋아하여 고금의 서적 수천 권을 집에 모아두고,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조금이라도 의심스런 부분이 있으면 그때마다 뽑아서 기록하여 두었다가, 그 부분에 정통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비록 신분이 낮거나 나이가 어리더라도 반드시 찾아가서 의심스런 부분을 물었다.[「윤근수신도비명」]

윤근수는 오랫동안 경연에서 선조를 모셨는데, 경연에서 유학의 뜻을 강론할 때 분석이 정밀하고 설명이 완벽하였으므로, 선조는 윤근수를 매우 신임하였다. 선조는 윤근수를 칭찬하기를, “경은 학문과 공훈이 높은데, 나는 그 넓은 도량과 단아함을 사랑한다.” 하였다. 형 윤두수가 큰일을 결단하는 능력이 있어서 재상이 되었는데, 항상 윤근수가 그 뒤에서 치밀한 계획을 세워준 덕분이었다. 1575년 (선조 8) 동서 분당이 일어나자, 윤두수 및 윤근수 형제가 서인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여 동인의 이발 및 유성룡 등과 당파 싸움을 벌였다.

한편 두 형제가 여러 차례 과거의 시관(試官)이 되어서 선발한 사람들 중에는 이름이 알려진 인사가 많았다. 일찍이 권율(權慄)과 곽재우(郭再佑)가 장수의 재목인 것을 알고 여러 차례 천거하였는데, 나중에 두 사람은 임진왜란 때 과연 그의 말대로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원균(元均)과 이순신(李舜臣)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자리를 놓고 서로 싸울 때 원균이 윤근수 형제와 친척 사이였음에도 윤근수 형제는 원균을 수사(水使)나 도통사(都統使) 자리에 추천한 적이 없었다. 1597년(선조 30) 1월 비변사에서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교체할 것을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논의할 때 중추부 판사 윤두수는 “이순신은 전라도와 충청도 2도(道)의 통제사에 임명하고, 원균은 경상도 1도 통제사로 임명하소서.” 하였다. 다만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윤근수는 예법에 밝고 중국어를 잘하여 중국 명나라와 외교 관계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종계변무를 위하여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활동할 때 명나라 예부의 관원과 담판하여 명나라에서 종계를 정정한 『대명회전』을 얻어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종계변무의 교섭이 성공하여 광국공신을 책봉할 대 윤근수는 광국공신 1등에 해평부원군에 봉해졌고, 형 윤두수는 광국공신 2등에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던 것이다. 윤근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도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고, 군사와 군량미를 청하는 주청사를 맡아서 명나라 서울 북경을 자주 왕래하였다.[「윤근수신도비명」]

그는 국제 정세에도 정통하였다. 임진왜란을 틈타서 여진족의 누르하치[奴酋]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요동을 침범하는 한편,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을 치기 위하여 압록강을 넘어서 평안도 땅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유격(遊擊) 오종도(吳宗道)를 찾아가서 그 실정을 알아보고 서북 변방의 국토 대비에 대한 방책을 자기 나름대로 매우 자세히 마련하였다. 그는 왕과 대신들을 만날 때마다 북방의 여진족이 임진왜란 중에 그 세력을 신장한 것을 크게 걱정하고, 시급히 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명나라와 누르하치의 후금(後金)이 서로 싸울 때 조선이 그 사이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자 비로소 왕과 대신들은 모두 윤근수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고 한탄하였다.

윤근수는 나이 80여 세가 가까이 되자, 자기가 죽을 나이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여, 죽기 전에 선왕의 능침을 한 번 참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예조에 글을 보내 제관(祭官)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명종의 강릉(康陵)과 선조의 목릉(穆陵)의 제사에 늙은 몸으로 제관으로 참여하여 두 왕에게 공손히 제사를 지내고, 회고에 잠겼다.[「윤근수신도비명」]

그는 영의정 윤두수의 동생으로서, 사람됨이 청백(淸白)하고 간솔(簡率)하였으며, 문장이 고아(古雅)하고, 필법이 굳세고 힘찼다. 예문관의 종장(宗匠)으로 추대되어 평생을 선비들과 지내며, 선행을 좋아하였고, 후진들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였다. 중국 사신을 맞아서 일을 잘 처리하여 명예로운 명성이 매우 높았다. 젊을 적부터 청고한 주견을 가지고 청현직을 두루 거쳤으며, 만년에는 문사(文史)를 혼자서 즐기면서 남과 교유(交遊)하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았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비록 촌구석이라도 반드시 찾아가서 만나보았다. 나라의 중요한 지위에 있은 지가 30년이었는데도 집안이 청빈하고 깨끗하여 마치 한미한 선비처럼 생활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8년 8월 17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황해도 장단(長湍) 임강현(臨江顯)에 있고, 영의정 신흠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근수신도비명」] 처음에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내렸으나, 1630년(인조 8) 2월 문정(文貞)으로 고쳤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8년 2월 20일, 『청음집(淸陰集)』 권1]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풍양 조씨(豊壤趙氏)는 절도사(節道使) 조안국(趙安國)의 딸이다.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윤완(尹晥)은 진사(進士) 출신으로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을 지냈고, 차남 윤질(尹晊)은 진사 출신으로 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으며, 3남은 윤소(尹昭)이다. 4남 윤유(尹曘)는 진사이고, 5남은 윤선(尹◎日+旋)이고, 6남은 윤민(尹◎日+敏)이다. 딸은 윤문성(尹聞性)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난 아들 윤창(尹永昺)은 학관(學官)이고, 딸은 여지길(呂祉吉)에게 시집갔다.[「윤근수신도비명」]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전고대방(典故大方)』
■ 『월정만필(月汀漫筆)』
■ 『간이집(簡易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곡집(谿谷集)』
■ 『계미기사(癸未記事)』
■ 『고봉집(高峯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옹만필(畸翁漫筆)』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기재잡기(寄齋雜記)』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동사강목(東史綱目)』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부계기문(涪溪記聞)』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석담일기(石潭日記)』
■ 『석주집(石洲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도기이(松都記異)』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순암집(順菴集)』
■ 『시정비(時政非)』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아계유고(鵝溪遺稿)』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원직지(燕轅直指)』
■ 『오음유고(梧陰遺稿)』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우계집(牛溪集)』
■ 『유천차기(柳川箚記)』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조천기(朝天記)』
■ 『죽창한화(竹窓閑話)』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혼정편록(混定編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후광세첩(厚光世牒)』
■ 『규암집(圭菴集)』
■ 『화담집(花潭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미암집(眉巖集)』
■ 『초당집(草堂集)』
■ 『덕계집(德溪集)』
■ 『약포집(藥圃集)』
■ 『지천집(芝川集)』
■ 『송강집(松江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중봉집(重峰集)』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하곡집(荷谷集)』
■ 『우복집(愚伏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동춘당집(同春堂集)』
■ 『우계연보(牛溪年譜)』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