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 = ?].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 활동한 문신이며, 의병장(義兵將)이다. 호는 화천당(花遷堂)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거주지는 청주(淸州)이다.
[선조 시대 활동]
박춘무(朴春茂)는 찰방(察訪)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호서(湖西) 지방을 지키는데 큰 활약을 하였다. 1593년(선조 26) 3월에도 선거이(宣居怡) 및 허육(許王夏) 등과 함께 적을 차단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26년 3월 5일]
용병(用兵)에 능하였던 그는 의술(醫術), 특히 침구술(鍼灸術)이 뛰어나 허준(許浚)을 비롯하여, 이연록(李延祿)과 이공기(李公沂), 김영국(金榮國), 정희생(鄭希生), 양예수(楊禮守), 심발, 허임(許任) 등과 함께 의관(醫官)으로도 활약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8년 4월 13일, 선조 28년 12월 28일, 선조 29년 5월 11일] 1596년(선조 29) 5월 이후 지방관인 임천군수(林川郡守)가 되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4월 중순까지 있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4월 21일] 그러다가 같은 해 4월 하순에 내의원(內醫院)에서 세자에게 침을 놓기 쉽게 가까운 곳으로 그의 부임지를 옮길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그는 서울과 거리가 가까운 인천부사(仁川府使)가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4월 21일, 선조 30년 4월 23일] 그리고 선조 31년(1598) 10월 부평부사(富平府使)가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1년 10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