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61년(명종 16)~1626(인조 4) = 6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과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형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백선(伯善)이고, 호는 장주(長洲) 또는 장연(長淵)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문충(朴文沖)이고,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윤종형(尹宗亨)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찰방(察訪)을 지낸 박관(朴寬)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충무위(忠武衛)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박순령(朴舜齡)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6년 뒤인 1591년(선조 24)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593년(선조 26)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26년 12월 13일] 1597년(선조 30) 병조 좌랑(佐郞)을 거쳐서, 방어사 종사관(防禦使從事官)이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8월 11일, 선조 30년 9월 14일]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가, 예조 좌랑에 임명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1년 2월 6일, 선조 31년 7월 14일] 1599년(선조 32)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거쳐서,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2년 4월 23일, 선조 32년 8월 3일, 선조 32년 8월 17일, 선조 32년 12월 16일]
1600년(선조 33) 외직인 평안도 강계판관(江界判官)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3년 4월 6일, 선조 33년 10월 27일] 이듬해인 1601년(선조 34) 호조 정랑(正郞)을 거쳐서,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으로 전임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4년 4월 24일, 선조 34년 5월 11일, 선조 34년 8월 13일, 선조 34년 9월 24일] 1602년(선조 35) 홍문관 부교리(副敎理)로 전임되었고, 시독관(侍讀官)을 거쳐서,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5년 1월 5일, 선조 35년 8월 2일] 1603년(선조 36)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후, 군기시(軍器寺)정(正)이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6년 6월 26일]
1604년(선조 37)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전임된 후,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7년 6월 2일, 선조 37년 12월 10일, 선조 37년 12월 26일] 1605년(선조 38)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로서 시강관(侍講官)을 겸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8년 7월 27일] 1606년(선조 39)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고, 이듬해에 병조 참지(參知)를 거쳐서,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9년 8월 4일, 선조 40년 2월 22일, 선조 40년 8월 13일]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고,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로 전임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즉위년 3월 1일, 광해군 즉위년 7월 16일] 1609년(광해군 1)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승진되었고, 예조 참판(參判)을 거쳐서, 1611년(광해군 3) 형조 참판이 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 7월 3일, 광해군 1년 12월 14일, 광해군 3년 1월 20일] 1612년(광해군 4)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겸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로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11월 24일] 이후 사간원 대사간과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서, 1614년(광해군 6) 형조 판서가 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12월 13일, 광해군 6년 9월 4일]
[묘소와 후손]
부인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기경인(奇敬仁)의 딸인데, 1남 박계영(朴啓榮)을 두었다. 서자로 박생영(朴生榮)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