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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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초(朴礎)

서지사항
항목명박초(朴礎)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정치·행정가/관료/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367년(고려 공민왕 16)~1454년(조선 단종 2) = 88세]. 고려 말 공민왕~조선 세종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전라도병마도절제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이다. 자는 자허(子虛)이고, 호는 토헌(土軒)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고려 공양왕 시대 활동]
1391년(공양왕 3)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으로서 불교 배척에 대한 상소를 하여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몽주(鄭夢周)의 변호로 마침내 사면되었다.

[조선 태종 시대 활동]
1404년(태종 4) 사간원(司諫院) 좌헌납(左獻納)으로 재직할 때, 그가 선공감(繕工監) 승(丞) 으로 있던 시절에 관용(官用)의 철을 개인적으로 썼다는 사실 때문에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장형에 처해졌다.[『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4년 6월 24일, 태종 4년 12월 4일] 1413년(태종 13) 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로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 온 후, 전라도수군도만호(全羅道水軍都萬戶) 겸 지해진군사(知海珍郡事)가 되었다.[『태종실록』 태종 13년 6월 16일, 태종 13년 11월 24일, 태종 13년 12월 15일] 1417년(태종 17)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에서 그가 관물(官物)을 훔친 죄를 받아 이름이 이미 죄적(罪籍)에 올라 있고, 또한 제주는 해외(海外)의 이국(異國)이나 마찬가지인 곳으로서 감사(監司)의 출척(黜陟)이나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 그가 반드시 꺼리는 바 없이 탐욕을 자행하게 되면 백성들이 그 폐단을 입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므로 파직당하였다.[『태종실록』 태종 17년 2월 27일] 그 해에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되었다.[『태종실록』 태종 17년 윤5월 18일] 1418년(태종 18) 전라도수군도절제사(全羅道水軍都節制使)가 되었다.[『태종실록』 태종 18년 6월 2일]

[조선 세종 시대 활동]
1419년(세종 1) 병조 참의(參議)를 거쳐서, 전라도도체찰사(全羅道都體察使), 전라도병마 도절제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가 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 1년 4월 17일, 세종 1년 5월 12일, 세종 2년 2월 2일] 1420년(세종 2)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가, 전라도수군도절제사로 임명되었다.[『세종실록』 세종 2년 5월 7일, 세종 2년 10월 24일] 이듬해인 1421년(세종 3)에 전라도수군처치사(全羅道水軍處置使)가 되었다.[『세종실록』 세종 3년 7월 11일] 1423년(세종 5) 경상우도수군처치사(慶尙右道水軍處置使)를 거쳐서,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가 되었다.[『세종실록』 세종 5년 1월 25일] 1424년(세종 6) 진하사(進賀使)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왔다.[『세종실록』 세종 6년 12월 25일] 이어 이듬해인 1425년(세종 7)에는 동지총제(同知摠制)로서 사신 원접사(遠接使)가 되었고, 이어 황주선위사(黃州宣慰使), 의주선위사(義州宣慰使)를 역임하였다.[『세종실록』 세종 7년 윤7월 5일] 1431년(세종 13)에는 강계절제사(江界節制使)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세종 13년 7월 2일] 이듬해인 1432년(세종 14) 겨울 야인(野人) 4백여 기(騎)가 여연(閭延)의 경내에 침범해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갔는데, 이들을 추격하여 야인에게 붙들린 사람 26명과 말 30필, 소 50마리를 도로 빼앗아 왔으나, 전사자가 13명, 부상자 25명이었다.[『세종실록』 세종 14년 12월 9일] 결국 그는 적을 방어하지 못하였다는 죄목으로 1433년(세종 15) 직첩을 삭탈당하고, 고신(告身)을 추탈당하였으나 뒤에 복관되었다.[『세종실록』 세종 15년 2월 12일, 세종 15년 5월 21일, 세종 15년 7월 9일]

1454년(단종 2)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88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천성이 본래 탐오(貪汚)하여 염치를 돌보지 않았다.[『태종실록』 태종 17년 2월 27일] 재주 있는 유자(儒者)로서 시(詩)도 잘 짓고 글도 잘 지었다. 1424년(세종 6) 북변(北邊)에 여진(女眞)의 침입이 잦으므로 조정에서 경원부(慶源府)를 남쪽 용성(龍城)으로 옮기려 하자 이를 반대, 부령(富寧)에 존속케 하여 국토가 축소되는 것을 막았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동문선(東文選)』

■ [집필자] 박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