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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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추(尹推)

서지사항
항목명윤추(尹推)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632년(인조 10)∼1707년(숙종 33) = 76세]. 조선 중기 현종(顯宗)~숙종(肅宗) 때의 유일(遺逸). 염근리(廉謹吏)에 뽑혔다. 자는 자서(子恕)이고, 호는 농은(農隱) 또는 농와(農窩)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거주지는 충청도 이산(尼山)의 죽리(竹里)다.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생원(生員)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팔송(八松) 윤황(尹煌)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윤창세(尹昌世)이다.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와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의 조카이기도 하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동생인데, 윤증이 송시열과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벌일 때 4촌 형 윤진(尹搢 : 윤순거 아들)과 함께 앞장서서 노론과 싸웠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32년(인조 10) 5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윤선거와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 태어난 3남매 중에서 막내였다. 위로 누이와 형 윤증이 있었는데, 윤증과 윤추(尹推)는 3살 차이였다. 할아버지 팔송 윤황과 할머니 우계 성씨(牛溪成氏)는 6형제를 낳았는데, 아버지 윤선거는 막내였다. 할아버지 윤황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대학자이고, 할머니 우계 성씨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딸로서 지덕(知德)을 갖춘 부인이었다. 할아버지 윤황은 모든 가족이 한 곳에 같이 모여서 살기를 원하였으므로, 윤추는 온 집안의 막내둥이로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면서, 다복한 가정의 행복이 산산조각이 났다. 청(淸)나라 태종(太宗) 홍타지가 10여 만 명의 팔기병(八旗兵)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궁중의 대군(大君)과 비빈(妃嬪), 그리고 종친들이 먼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서울의 사대부 집안도 모두 뒤따라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윤선거도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는데, 강화도가 함락되면 부부가 함께 죽기로 약조하였다. 그런데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던 인조(仁祖) 일행은 청나라 태종 홍타지의 군사가 길을 막는 바람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윤황과 윤문거 부자는 이때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이곳에서 45일 동안 오랑캐 군사에게 포위당하였다. 청나라 홍타지는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동생 예친왕(睿親王) 돌곤에게 3만여 명의 기병을 주어 강화도를 점령하게 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22일 돌곤의 팔기병이 강화도를 점령하자, 1월 23일 윤선거의 아내 이씨는 자결하였다. 그러나 그때 남한산성의 아버지 윤황이 그를 불렀기 때문에 윤선거는 죽지 못하고 변장을 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아버지보다 자식이 먼저 죽을 수가 없어서 죽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때 윤추는 겨우 다섯 살이었고, 형 윤증은 여덟 살이었다.

윤추와 윤증 형제는 어머니를 여의고 고향 충청도 이산(尼山)에서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둘째 큰아버지 윤순거(尹舜擧)가 설립한 종학당(宗學堂)에서 형 윤증과 4촌 형 윤진 등과 함께 아버지 윤선거와 둘째 큰아버지 윤순거에게 가학(家學)을 배우고 학덕을 닦았다. 장성 후 과거 공부를 하여 두 번이나 시험을 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나이 30세 때 병에 걸려 10여 년 동안 병상에 누워서 지냈는데, 1665년(현종 6) 이산의 서쪽 적암산(積巖山) 아래에 ‘손재(遜齋)’라는 서재를 짓고 병든 몸을 수양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13] 1668년(현종 9) 문과에 응시하여 초시(初試)복시(覆試)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669년(현종 10) 부친상(父親喪)을 당하는 바람에 전시(殿試)에 나가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35 「자서묘표(子恕墓表)」 이하 「윤추묘표」로 약칭] 형 윤증과 함께 아버지 윤선거의 무덤을 지키면서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1671년(현종 12) 상복을 벗은 후에는 다시 과장에 나가지 않은 채 스스로 호를 농은(農隱)이라고 짓고, 자신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 생활하며 일생을 끝마치기로 결심하였다.[「윤추묘표」]

이후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과 동몽교관(童蒙敎官), 사옹원(司饔院) 참봉(參奉)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74년(현종 15) 6월 이조에서 전국의 유일을 추천하여 6품의 관직에 제수할 적에, 윤추를 비롯하여 이지염(李之濂)과 이동규(李同揆) 등이 천거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 15년 6월 27일] 이때 윤추는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서 그의 품계는 6품(品)으로 승품(陞品)되었다.[「윤추묘표」] 6품으로 승품하는 것을 ‘승륙(陞六)’이라고 하는데, 참하관(參下官)에서 참상관(參上官)으로 올라가므로, 직제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숙종 시대 활동]
1677년(숙종 3) 4월 남인(南人)이 집권하였을 때에 윤추는 유일로서 다시 천거되었다. 좌의정 권대운(權大運)이 유일로서 천거하는 인물들의 명단을 왕에게 바쳤는데, 윤추를 비롯하여 정시한(丁時翰)과 권흠(權歆) 등 9인이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3년 4월 3일] 그러나 윤추는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에 남인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1681년(숙종 7) 장흥고(長興庫) 주부(主簿)가 되었다가, 1682년(숙종 8) 충청도의 회덕현감(懷德縣監)으로 나가서, 이듬해인 1683년(숙종 9)까지 재직하였다.[『명재유고』 권13, 「윤추묘표」] 충청도 회덕(懷德)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고향이었다. 당시 벼슬에서 물러나 회덕의 회천(懷川)에 거주하던 송시열은 이전에 그를 위하여 남인들과 싸우다가 죽은 그의 제자 송상민(宋尙敏)의 사당을 회덕에 세우려고 하였으나 회덕현감 윤추가 이를 반대하였다. 송상민은 <제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패배한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자, 예송(禮訟)의 전말에 대한 책자를 만들어 유포하고 스승 송시열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남인들의 탄핵을 받고 체포되어 심문을 받다가 장살(杖殺) 당하였다. 윤추는 송상민의 사당 건립을 반대하다가, 송시열의 비판과 옥천(沃川) 선비들의 비난을 받고 사임하였다.[『명재유고』 권12]

1686년(숙종 12) 충청도의 정산현감(定山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인 1687년(현종 13) 돌아간 아버지 윤선거가 회천의 송시열로부터 비판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이산으로 돌아왔다.[「윤추묘표」] 이때 아버지 윤선거의 신도비명을 둘러싸고, 회천에 있던 송시열과 이산에 있던 형 윤증 사이에 회니시비가 벌어져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송시열은 죽은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아내와 약조한 대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던 ‘예송’ 문제에 대하여 윤선거가 송시열을 지지하지 않고 남인 윤휴(尹鑴)의 ‘차장자설(次長子說)’을 지지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졌다. 윤선거는 비록 서인이었으나, 송시열의 예론(禮論)에는 모순이 있어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남인 윤휴와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그는 겉으로는 윤휴와 절교하였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서로 교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윤선거가 세상을 떠난 후 회니시비가 벌어지자, 윤추는 고향 이산에서 형 윤증을 도와 4촌 형 윤진과 함께 앞장서서 송시열 일파와 대립하였다.

1689년(숙종 15) 윤추는 충청도의 석성현감(石城縣監)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집권한 남인들에 의하여 우계 성혼과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문묘(文廟)에서 퇴출당하자, 이에 항의하여 다시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우계 성혼은 그의 외할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성혼과 이이에서 비롯된 서인의 학통은 아버지 윤선거와 큰아버지 윤문거 및 윤순거를 통하여 윤증과 윤추 형제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파는 이이와 성혼의 학통이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부자를 통하여 송시열·송준길(宋浚吉)로 이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배경이 되었다.

1694년(숙종 20) 전라도의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윤추묘표」] 1695년(숙종 21) 7월 의정부(議政府)에서 청백리(淸白吏)와 염근리를 뽑아서 아뢰었다. 숙종은 윤추를 염근리에 뽑고 이에 걸맞는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숙종실록』 숙종 21년 7월 11일] 이에 윤추는 예빈시(禮賓寺) 정(正)에 임명되었으나, 왕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곧바로 고향 이산으로 돌아왔다.[「윤추묘표」] 1696년(숙종 22) 경상도의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윤추묘표」] 1697년(숙종 23)에는 전라도의 김제군수(金堤郡守)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인 1698년(숙종 24) 벼슬을 버리고 고향 이산으로 돌아왔다.[「윤추묘표」] 1706년(숙종 32)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거의 70세에 가깝다며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숙종실록』 숙종 32년 8월 29일, 숙종 33년 3월 14일] 그 뒤에 또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공격(公格 : 공직의 격식)에 따라 체직되었다.[「윤추묘표」]

1707년(숙종 33) 11월 2일 그가 만년에 생활하던 죽리(竹里)의 본가(本家)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6세였다.[『명재유고』 권4권, 「윤추묘표」]

저서로는 『농은유고(農隱遺稿)』가 있다.

[‘강화도의 비극’과 어머니 이씨의 자결]
1636년(인조 14) 1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주(全州)로 가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이 궁중의 비빈(妃嬪)들과 왕자 및 공주 등을 거느린 채 먼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뒤이어 인조도 문무백관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하다가, 오랑캐 군사에게 길이 막혀서 임시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때 서울의 사대부 집안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윤선거도 아내와 윤추 3남매를 데리고 강화도에 집을 빌려서 피난하였으며, 그의 친구 권장순(權長順)과 김익겸(金益兼)도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강화성이 함락되면, 윤선거는 아내 이씨와 같이 죽기로 굳게 약조하였으며, 또 친구 권장순 및 김익겸과도 생사(生死)를 함께 하기고 맹세하였다.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공방전을 벌이던 청나라 태종 홍타지는 막내동생 예친왕 돌곤에게 청나라 군사 3만 명을 떼어주고 강화도를 먼저 점령하도록 하였다. 예친왕 돌곤은 먼저 삼판선(三板船)을 만들어 청나라 군사들을 나누어 태우고, 임진강을 건넜다. 이에 강화유수(江華留守) 장신(張紳) 등은 오랑캐 군사와 싸울 엄두도 못 내고 먼저 도망쳐버렸다.

1636년(인조 14) 1월 22일 예친왕 돌곤은 팔기병들을 이끌고 임진강을 건너서 강화도에 상륙하여 강화성을 제외한 섬 전체를 점령하였다. 오랑캐 군사가 강화성의 남문(南門)으로 들이닥쳐 항복을 요구하자, 강화성 안에서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성안의 군대는 오랑캐 군사와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저절로 와해되었다. 강화도 분조의 우두머리였던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은 한번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고 적병이 사방에서 포위하자, 강화성 남루(南樓)에서 화약을 폭발시켜 어린 손자와 함께 뛰어들어 자결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6]

1636년(인조 14) 1월 23일 예친왕 돌곤이 세 차례나 사자를 보내어 항복하라고 권유하자, 봉림대군은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를 비롯하여 왕자와 비빈들의 안전 보장과 서울 귀환을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이때 세자빈을 모시던 윤선거의 삼촌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윤전(尹烇)을 비롯하여 공조 판서(判書)이상길(李尙吉), 전 관찰사(觀察使) 정효성(鄭孝誠), 전 사헌부 장령 정백형(鄭百亨), 병조 좌랑(佐郞) 이사규(李士珪) 등이 자살하였다. 또 강화도에 피난 갔던 서울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 가운데 순절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아버지 윤선거가 성루(城樓)에서 친구들과 모여 오랑캐와 싸울 것인가, 자결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을 때, 남한산성에서 할아버지 윤황이 몰래 보낸 편지를 전달 받았다. 척화파의 선봉에 섰던 할아버지 윤황은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등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인조가 최명길의 주장대로 청 태종에게 항복하면 윤황은 오랑캐 진영으로 잡혀가게 될 입장이었으므로, 그 전에 막내아들 윤선거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급히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이에 아버지 윤선거는 자신이 죽기 전에 아버지 윤황을 만나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두 친구가 차례로 목숨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라 죽지 않고 아버지를 먼저 만나기로 결정하였다.

강화도를 점령한 오랑캐 군사들은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방화하였으며, 남자는 죽이고 부녀자는 겁탈하였으므로,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윤추의 어머니 이씨는 일이 너무 다급하다고 느꼈으므로, 여종을 아버지 윤선거에게 급히 보내어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독촉하였다. 윤선거가 황급히 집으로 달려오자, 어머니 이씨가 울면서, “적병의 손에 죽는 것보다 일찌감치 자결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한번 뵙고 영원히 이별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하였다. 당시 윤선거는 아버지를 먼저 만나 뵙고 자기도 아내의 뒤를 따라서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굳게 약속하였는데, 아내가 목을 매어 죽는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울고 있는 윤추 등 3남매의 어린 아이들과 작별하고, 성루로 돌아갔다.[『명재연보(明齋年譜)』 권1] 때 마침 예친왕 돌곤의 보호 아래 궁중의 왕자와 비빈들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윤선거는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 : 성종 4대손)의 하인[騶從]으로 가장하여 오랑캐의 통과 증명서를 받아서 강화도를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가서 아버지 윤황을 만났다.

윤추의 어머니 이씨는 세 명의 어린 자식들의 손을 잡아 종들에게 넘기면서 잘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고, 윤추 등 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는데, 바로 1월 23일 아침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세 아이들은 울부짖으면서 몸부림쳤는데, 그때 맏딸은 겨우 10세였고, 큰아들 윤증은 9세였으며, 둘째아들 윤추는 6세였다. 여종들이 시신을 거두어 의복을 반듯하게 겹쳐 입힌 뒤에 판상(板商 : 목재상)의 집에서 관(棺)을 사오게 하여 시신을 입관(入棺)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집의 대청 아래에 마당을 파고 가매장하였는데, 흙을 모아서 수북하게 덮은 뒤에 돌덩이 8개를 무덤의 사방 모퉁이에 묻고 그 가운데에 숯가루를 뿌려서, 집이 불타더라도 무덤을 찾을 수 있도록 표시하였다.[『명재연보』 권1]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윤증과 윤추 3남매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송시열의 노론 일파와 논쟁할 때 윤추와 윤증 형제는 송시열의 집요한 비판과 노론의 끝없는 비방과 공격을 받으면서도 마치 인생을 달관(達觀)한 것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정도(正道)를 지켜나갔다. 이것은 어렸을 때 모진 시련을 겪고 극복한 결과인 것 같다.

1월 26일 오랑캐 군사들은 성안에 남아있던 포로들을 모두 한곳에 모이게 한 후, 이들을 끌고 갑곶(甲津) 나루를 건너 김포(金浦)의 오랑캐 진영에서 거의 15~16일을 머물렀다. 그 사이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며 강화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참판 박황(朴潢)이 오랑캐 장수와 함께 김포로 달려와서, 강화조건에 따라 강화도에서 사로잡혀 온 사람 1천 5백여 명을 풀어 주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윤증과 윤추는 포로를 석방할 때 겨우 풀려나서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으나, 누나는 풀려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혀서 북쪽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윤증은 허리에 차고 있던 수건을 풀어 조그만 가첩(家牒)을 꺼낸 후, “누나는 여자이니, 이것으로 징표를 삼아야 한다.”면서 누나에게 주었다. 병자호란 때 후금(後金)은 우리나라에서 남녀 포로 40~50여 만 명을 사로잡아 심양(瀋陽)으로 끌고 간 후, 심양의 저자에서 노예로 전매(轉買)하였다. 당시 10세였던 윤증의 누나는 오랑캐 군사에게 끌려가면서도 우리나라 관리들을 만날 때마다 가첩을 펼쳐 보이며 살려달라고 하소연하였다. 그녀가 의주(義州)에 이르렀을 때, 정주(定州)에 유배되었던 참판 이시매(李時楳)가 그 가첩을 얼른 읽어보고 오랑캐 군사에게 몸값을 지불한 후 속환(贖還)하여 서울로 데려왔다.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생환(生還)이었다.[『명재연보』 권1]

이때 윤추의 아버지 윤선거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서 청나라 태종 홍타지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아버지 윤황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윤선거는 “아버지를 버리고 아들이 먼저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청나라에서 척화파를 단죄하라는 요구에 의하여 아버지 윤황이 충청도 영동(永同)으로 귀양을 가자, 영동으로 가서 아버지를 수발하였다. 1637년(인조 15) 2월 윤선거는 강화도로 돌아가서 부인 이씨의 무덤을 경기도 교하(交河) 법흥향(法興鄕) 발송리(鉢松里) 좌묘(坐卯)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그 옆에 자기가 묻힐 자리도 마련하였다.[『명재연보』 1권] 그해 3월 윤선거는 부인 이씨가 순절할 때 입었던 모시 적삼으로 초혼(招魂)을 하였다. 그 적삼은 맏형 윤증이 챙겨서 등짐에 지고 난리 중에 한 달이 넘도록 돌아다닌 것으로 잃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 적삼을 가지고 혼백(魂帛)을 부르는 ‘초혼(招魂)의 예(禮)’를 행할 수가 있었다. 이후 윤선거는 윤증과 윤추 형제를 데리고 아버지 윤황의 유배지인 영동으로 가서, 모두 함께 살았다.

윤추의 할아버지 윤황이 병으로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1638년(인조 16) 8월 고향 충청도 이산으로 돌아왔고, 윤추의 누나도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윤추 등 어린 3남매가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 아버지 윤선거는 할아버지 윤황을 모시고 3남매를 키우면서 고향에 살았으나, 아내를 죽인 죄인이라고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과거 보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과의 인연도 끊고 폐인(廢人)처럼 살았다. 그는 둘째 부인을 들이지 않고, 오로지 윤증과 윤추 등 3남매를 키우는 데에만 전력하였다. 명재(明齋) 윤증이 우암 송시열과 대적할 만한 대학자로 성장한 것은 바로 아버지 윤선거의 가르침과 보살핌의 결과였다.

[송상민(宋尙敏)의 사당 건립에 반대한 회덕 현감 윤추]
윤추는 1682년(숙종 8) 6월 회덕의 현감(縣監)에 임명되어, 1683년(숙종 9) 8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재직하였다. 충청도 회덕은 송시열의 고향이었는데, 그는 이때 벼슬에서 물러나 회덕의 회천(懷川)에 거주하였다. 이에 앞서 송상민은 제2차 예송논쟁에서 패배한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자, 예송의 전말에 대한 책자를 만들어 유포하고 스승 송시열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다가 남인들의 탄핵을 받은 후 체포되어 심문을 받다가 장살 당하였다. 윤추가 현감으로 재직할 무렵에 회덕에서는 송상민을 위해 사우(祠宇 : 사당)를 세우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윤추는 송시열이 이것을 주창(主唱)한 것으로 판단하고 고을의 선비들에게 반대하는 편지를 보내기를, “조정에서 이미 증직(贈職)하고 자손을 녹용하였다면 이 역시 그의 뜻에 충분히 보답한 것입니다. 사우를 지어 향사(享祀)하는 것은 참으로 지나친 일입니다. 설사 실제로 존중할 만한 절개를 세웠기에 끝내 매몰(埋沒)될 수 없다면 절로 후세에 공의(公議)가 있게 될 것입니다. 어찌 지금 못 하면 어쩔까 하고 급급해하며 마치 은혜를 갚고 공덕에 보답하듯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농은유고(農隱遺稿)』 권4] 윤추는 송시열이 자신을 구해 준 송상민의 향사를 통해서 자신을 구해 준 제자에게 은혜를 갚고, 송상민의 행위가 정당하며 훌륭하였다는 사실을 공식화함으로써 송시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시키려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윤추의 글을 보고 크게 노한 송시열은 본인이 직접 통문(通文)을 지어 제자들에게 보내고, 옥천(沃川) 고을의 선비들로 하여금 윤추를 비난하게 하였다. 나아가 윤추의 아버지인 윤선거까지 헐뜯고 나섰다.[『농은유고』 권4] 한편 송시열은 제자 이선(李選)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상민이 스승인 자신을 변호하다가 죽은 문인이라는 혐의가 있으므로, 자신은 향사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자신이 이 논의를 주창했다는 것은 윤추가 함부로 꾸며 낸 거짓말이며, 윤추의 이 말을 듣고 옥천의 선비들이 분노한 나머지 자발적으로 통문을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全)』 습유편 권3]

그러나 1683년(숙종 9) 윤추가 윤증의 제자이자, 둘째 아들의 장인인 나양좌(羅良佐)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장자(長者 : 송시열)가 사람을 피한다는 소문이 원근에 전파되어 비방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리고 옥천의 유생들이 바로 통문을 발송하여 나의 잘못을 꾸짖었는데, 모두 장자를 업신여겼다고 비방하는 내용이었으니, 나는 참으로 괴롭습니다. 어제 관찰사를 만났는데, 병으로 회덕현감을 체직시켜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찰사가 말하기를, ‘고을에 기근이 든 상황에서 잘 다스리는 수령을 체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농은유고』 권3] 이러한 상황에서 윤추는 송시열의 비판과 옥천 유생의 비방을 못견디고 결국 회덕현감을 사임한 후 고향 이산으로 돌아왔다. 당시 고을 사람들은 그 고을 출신 명문가에 고개를 숙이고 아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속이었다. 이런 점에서 윤추가 송시열의 고향인 회덕에 현감으로 부임한 것 자체가 현명하지 못한 처사가 아니었다.

한편 서울에서 있었던 노론 선비들의 모임에서 어떤 사람이, “윤추가 회덕현감에서 체직되어 돌아갈 때, ‘송모(宋某 : 송시열)가 나에게 사람을 죽이도록 하였는데, 사람을 죽이는 일은 내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송시열의 동생 송시걸(宋時杰)은 “나는 아내를 죽이는 일은 배우지 못했다.”고 하였다.[『송자대전』 권131] 이 말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윤추의 어머니는 자결하였으나, 아버지 윤선거는 혼자 살아서 강화도를 빠져나온 일을 비꼬아서 한 말이었다. 나중에 이에 대하여 윤증은 “‘사람을 죽이는 일은 배우지 못하였다.’라는 말과 ‘어머니의 죽음이 분명하지 않다.’라는 말은, 모두 우리 형제가 한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와 같이 된 것은 아마도 저쪽에서 우리를 욕보이려고, 먼저 이 두 가지 말을 만들어 내어서, 우리 가운데서 나온 말이라고 핑계대고, 그에 따라 대응한 것이다. 전후의 말은 그 핵심에 있어서 동일하다.”라고 하였다.[『명재유고』 별집 권4] 『송자대전(宋子大全)』에서는 1680년(숙종 6) 윤추가 회덕현감을 사임하면서 송시열을 비난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윤추는 1682년(숙종 8) 6월에 회덕현감에 제수되어 1683년(숙종 9) 8월에 회덕현감을 사임하였다. 그러므로 『송자대전』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윤증이 자신의 아우 윤추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노론에서 지어낸 말이라고 주장한 것이 옳은 듯하다.

한편 젊은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으므로, 현종 때부터 강력한 신권(臣權)을 행사해온 송시열을 대단히 싫어하고 미워하였다. 숙종은 송시열의 노론에 대해서 “전례(典禮 : 예송) 문제가 이미 정해지고 큰 악인(惡人 : 윤선도)을 축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의 혈당(血黨)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더욱더 분노하여 원망의 독기를 내뿜고 털끝만큼도 개전(改悛)하는 마음이 없다. 그들은 다만 송시열이 있는 줄만 알 뿐이고, 임금에 대한 분수와 의리가 있는 줄은 모른다. 그들은 말을 조작하고 비방을 일삼는데, 말을 날마다 보태고 달마다 보태어 비방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몹시 미워한다.”라고 비판하였다.[『숙종실록』 숙종 5년 3월 13일] 이처럼 숙종은 송시열 일파를 싫어하고 미워하였으므로, 나중에 회니시비가 벌어졌을 때 윤증과 윤추의 편을 들어 송시열 일파의 주장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믿지 않았다.

[성품과 일화]
윤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인정이 많고 후덕하였으나, 청렴하고 엄격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순수하고 독실한 조행(操行)이 있었고,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남보다 뛰어난 치적(治績)이 있었다.[『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숙종 40년 1월 30일] 그는 매우 검소하여 가난한 생활에 안주하였고, 자기본분을 지켜 조금도 가난을 싫어한 적이 없었다. 그는 몸이 약하여 항상 병을 앓았는데, 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대부분 시간을 절의 암자에서 지냈다. 그때 그의 의복과 음식이 늙은 중들과 똑같이 더럽고 거칠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딱하게 여겼으나, 그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한 적도 없고, 남의 물건을 부러워한 적도 없었다. 이 모습이 그 옛날 은거하면서 혼자 실천하는 ‘은자(隱者)’와 은연중에 일치되는 점이 너무나 많았는데, 딱히 누구에게서 배워서 체득한 것이 아니었다.[「윤추묘표」]

젊었을 때 그는 강직하여 대놓고 그 사람의 잘못을 말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병이 난 뒤로 는 기질이 점점 변하여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남을 만나면 공경하고 몸을 조심하였는데, 비록 천한 사람이라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시열 같은 사람과 논쟁할 적에는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듯이 사정(邪正)과 허실(虛實)을 훤하게 꿰뚫어보고 논의하였으므로, 오래될수록 그의 논의가 더욱 미더웠다.[「윤추묘표」]

그가 고을을 다스리는 방법은 다른 사람과 전혀 달랐다. 가장(家長)이 집에 있을 때와 같이 위엄과 자정(慈情)을 아울러 백성들에게 베풀었고, 집안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관청의 일을 정성껏 처리하였다. 그는 사적인 은혜나 조그만 은정을 백성들에게 베풀지 않았으나, 백성들에게 해로운 점이 있으면 즉시 이것을 혁파하였다. 또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면 이를 시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살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그가 고을의 아전과 백성들을 한결같이 성실하고 미덥게 대하니, 사람들이 너나없이 사랑하면서도 그를 두려워하였다. 임기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 윤추는 일부러 자신의 수레를 먼저 준비시켜 혼자 출발하고 가족들은 늦게 뒤따라오게 하여, 고을 사람들이 가족들에게 물건을 주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집에 돌아왔을 때에 예물로 받은 관물(官物)이 하나도 없었다.[「윤추묘표」]

윤추는 40대에 상처하고, 1675년(숙종 1) 윤5월 44세 때 새로 장가를 들었다. 그때 아버지 윤선거가 송시열의 충고를 무시하고 남인 윤휴의 절친한 친구 이유(李◎木+劉)의 딸과 혼인을 시켰는데, 이때부터 송시열은 윤선거가 서인을 배반하고 남인과 가깝게 지낸다고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서인은 남인 이유를 간사하고 지독하며 불령(不逞)한 사람이라고 악평하였으나, 남인 이유는 본래 학행(學行)이 있는 인물이었다. 또 가산이 넉넉한 부자였으므로 윤휴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다가, 서로 뜻이 맞아 한 당파가 되어서 죽음까지 함께 하는 친구가 되었다. 윤선거는 본래 윤휴의 인품을 믿고 교유하였는데, 자기의 아들 윤추를 이유의 딸과 혼인시키려고 남인 윤휴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게 윤추를 이유의 딸과 혼인시키는 문제를 상의하였는데, 송시열이 대답하기를, ‘이유의 사람됨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공자의 사랑하는 제자 안회(顔回)와 증삼(曾參)과 같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중국의 옛날 큰 도적 도척(盜跖 : 진나라 때 도적)과 장교(莊蹻 : 초나라 때 도적)와 같다고 하오. 형이 재량해서 잘 처리하시오.’라고 하였다.[『숙종실록』 숙종 1년 윤5월 13일] 그러나 윤선거는 송시열의 충고를 듣지 않고 마침내 윤휴의 권유에 따라서 윤추를 남인 이유의 딸과 재혼시켰다.[『명재유고』 권35]

이유는 일찍이 몇 마지기 땅을 가지고 그의 숙모(叔母) 구씨(具氏)와 다투다가, 숙모를 욕을 보인 일이 있었다. 서인 이단하(李端夏)는 이유의 숙모 구씨와 일가친척이었으므로 그 일을 자세히 알고서는 이유를 지독하다고 욕하였다. 또 이유가 큰조카 이삼재(李三才)와 재산 상속을 둘러싸고 서로 다투다가 손가락을 다친 적이 있었다. 이때 사간원 대사간 이태연(李泰淵) 등이 삼촌 이유와 조카 이삼재를 탄핵하고 그들을 함께 체포하여 치죄하여, 풍속과 교화를 바로잡도록 청하였다. 이에 마침내 숙종이 이유와 이삼재를 모두 체포하여 엄하게 심문하고 귀양을 보냈다. 당시 재상 송시열은 이를 듣고도 모르는 체하였으나, 이유의 아들 이삼달(李三達)은 자기의 아버지 이유가 송시열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에 무고하게 죄를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회니시비가 벌어졌을 때 매부인 윤추의 편을 들어 송시열을 비방하여, 양파의 싸움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다.[『숙종실록』 숙종 1년 윤5월 13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공주(公州) 남목동(南木洞) 향두산(鄕斗山)에 있는데, 명재 윤증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윤추묘표」] 전라도 김제(金堤)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 권4]

첫째부인 풍양 조씨(豐陽趙氏)는 군수(郡守)조진양(趙進陽)의 딸이고, 둘째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사인(士人) 이유의 딸이다. 첫째 부인 조씨는 2남을 낳았는데, 큰아들 윤자교(尹自敎)는 자질이 두텁고 행실이 순수하였으나 50세의 나이로 아버지보다 6년 앞서 죽었고, 작은 아들 윤가교(尹可敎)는 재주가 뛰어나고 뜻이 원대하였으나, 불행하게도 24세에 요사(夭死)하였다. 윤가교는 명촌(明村) 나양좌의 사위이다. 윤증은 조카 윤가교를 무척 아꼈는데, 그가 요절하자 매우 낙담하였다. 둘째 부인 이씨는 1남을 낳았으나, 조사(早死)하여 양육하지 못하였다.[「윤추묘표」]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농은유고(農隱遺稿)』
■ 『명재유고(明齋遺稿)』
■ 『명재연보(明齋年譜)』
■ 『노서유고(魯西遺稿)』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경암유고(敬庵遺稿)』
■ 『남당집(南塘集)』
■ 『조야기문(朝野記聞)』
■ 『지수재집(知守齋集)』
■ 『과암집(果菴集)』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