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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1년(인조 9)∼1698년(숙종 24) = 68세]. 조선 후기 현종(顯宗)~숙종(肅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과 이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자경(子敬)이고, 호는 덕포(德浦)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거주지는 충청도 이산(尼山)의 지산(枝山)이다. 아버지는 상의원(尙衣院)정(正)윤순거(尹舜擧)이고, 어머니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이조 참판 이춘원(李春元)의 딸이다. 양할아버지는 죽산부사(竹山府使)를 지낸 윤수(尹燧)이며, 친할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윤황(尹煌)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윤창세(尹昌世)이다.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와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의 조카이고,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4촌 동생이며, 영의정 윤동도(尹東度)의 조부이다. 막내 삼촌 윤선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윤선거의 아들인 4촌 윤증(尹拯) 및 윤추(尹推) 형제와 절친한 사이였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2년(효종 3)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방목(榜目)』] 그가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사이, 맏형 윤절(尹晢)이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동래(東萊)에 갔다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가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음직(蔭職)으로 빙고(氷庫)별제(別提) 및 종부시(宗簿寺)직장(直長),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 상의원 주부(主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덕포유고(德浦遺稿)』「묘표(墓表)」 이하 「윤진묘표」로 약칭]
1666년(현종 7) 9월 현종이 별시(別試)의 전시(殿試)를 시행하여, 문무과의 인재를 뽑았는데, 문과에서는 윤진을 비롯하여 10명을 뽑았다.[『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 7년 9월 21일] 당시 윤진은 이 별시 문과에서 갑과(甲科) 1등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6세였다.[『방목』] 처음에 곧바로 시종(侍從)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윤순거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이산의 선영(先塋) 아래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는 벼슬을 그만둘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상복(喪服)을 벗은 후에도 묘소 아래에 살면서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사양하였다.
그러다가 1667년(현종 8) 4월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를 거쳐, 그해 11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현종실록』 현종 8년 4월 3일, 현종 8년 11월 16일] 1669년(현종 10) 12월 도당(都堂)에서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하기 위하여 권점(圈點)을 행했는데, 윤진을 비롯하여 윤경교(尹敬敎)와 최후상(崔後尙) 등 13명이 뽑혔다.[『현종실록』 현종 10년 12월 13일] 1671년(현종 12) 2월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가, 10월에는 사헌부 헌납(獻納)을 거쳐, 1672년(현종 13) 10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다.[『현종실록』 현종 12년 2월 14일, 현종 12년 2월 29일, 현종 12년 10월 4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현종 13년 10월 24일] 1673년(현종 14) 7월 이조 좌랑(左郞)에 임명되었고, 1674년(현종 15) 1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현종실록』 현종 14년 7월 10일 ,『현종개수실록』 현종 15년 1월 17일]
[숙종 시대 활동]
1674년(숙종 즉위년) 9월 숙종이 즉위할 때 전라도 능주목사(綾州牧使)로 있었는데, 다음 해인 1675년(숙종 1) 임기가 차서 고향 이산으로 돌아왔다. 1676년(숙종 2) 6월 홍문관 부교리에 다시 임명되었다가, 7월에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2년 6월 23일, 숙종 2년 7월 5일] 1677년(숙종 3) 5월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전임되었다가, 7월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숙종실록』 숙종 3년 5월 1일, 숙종 3년 7월 2일] 이후 그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과 사간원 사간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하고 부임하지 않았다.[『숙종실록』 숙종 5년 1월 4일, 숙종 5년 1월 7일] 그러자 성질 급한 숙종이 화를 내면서, 특별히 그에게 무거운 형률을 적용하여 추고(推考)하라고 엄명하였다. 1679년(숙종 5) 1월 숙종이 전교하기를, “멍에를 얹을 짬도 기다리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 신하된 자로서 지킬 대의(大義)인가. 전 사간원 사간 윤진(尹搢)은 전후로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했지만, 한 번도 부임하지 않으니, 신하의 분의(分義)로 보아 어찌 감히 이렇듯 거만하단 말인가. 먼저 그를 파직하고 나중에 추고하여 후일의 폐단을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숙종실록』 숙종 5년 1월 28일]
그러다가 1680년(숙종 6) 2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 숙종 6년 2월 25일] 1681년(숙종 7) 5월 서인(西人)의 재상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이조 판서(判書) 김석주(金錫冑)가 윤진을 의망(擬望)하자, 숙종이 특별히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시키고, 예조 참의(參議)에 임명하였다.[『숙종실록』 숙종 7년 5월 26일, 「윤진묘표」] 이때 윤진은 서울에 올라가서 숙종을 한번 알현하고 사은(謝恩)하였다.[「윤진묘표」] 그러나 윤진은 예조 참의에 부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관직에도 일체 부임하지 않았다. 당시 유일(遺逸)로서 관직에 임명되면 비록 부임하지 않더라도 대외적으로는 실직(實職)처럼 인정을 받았다. 왜냐하면 나라에서 그 관직에 상당하는 녹봉을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인조(仁祖) 이후 조선 후기에 유일이 점차 늘어났는데, 이들에게 관직의 임명을 남발하면서 관직이 허직(虛職)처럼 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로부터 실직처럼 녹봉을 받았으므로, 국가의 관료 시스템은 무너지고, 국가 재정은 압박을 받게 되었다.
1682년(숙종 8) 10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1685년(숙종 11) 3월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에 발탁되었으며, 1686년(숙종 12) 3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 숙종 8년 10월 13일, 숙종 11년 3월 17일, 숙종 12년 3월 27일] 1689년(숙종 15)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남인(南人)의 재상 남구만(南九萬)이 “윤진은 학문과 인격이 훌륭하니, 특별히 예로써 대우해야 됩니다.” 하면서 그를 추천하였기 때문이다. 윤진은 서인 집안 출신이었으나, 남인 재상이 그를 추천한 것을 보면, 당시 그의 학문과 덕망이 높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송시열(宋時烈)과 예송(禮訟) 논쟁을 벌이던 남인이 윤진을 비호하고 나섰던 면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서인 내 소론(少論)의 영수인 윤증이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논쟁을 벌일 때 남인 박세채(朴世采) 등과 손을 잡았다. 윤진은 4촌인 윤증 및 윤추 형제와 가깝게 지냈다. 뿐만 아니라 <회니시비(懷尼是非)> 당시 송시열이 윤증이 공격을 하면, 윤진은 윤추와 함께 윤증을 대신하여 송시열을 비난하며 가장 치열하게 논쟁하였다. 그러므로 송시열은 공개적으로 윤진이 가장 나쁘다고 비난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조정의 신하들이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윤진에게 포상해야 한다고 청원하였기 때문이었다.[「윤진묘표」] 그해 8월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 숙종 20년 8월 19일] 1696년(숙종 22) 2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 숙종 22년 2월 21일] 1698년(숙종 24) 심장병으로 고향 이산의 지산(枝山)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8세였다.[『숙종실록』 숙종 24년 3월 10일,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24년 4월 27일, 「윤진묘표」]
저술로는 『덕포유고(德浦遺稿)』가 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11]
[회니시비와 덕포(德浦) 윤진(尹搢)]
충청도 회천(懷川 : 회덕)에 살고 있던 우암(尤庵) 송시열과 이산에 살고 있던 명재 윤증이 노서 윤선거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둘러싸고 시비(是非)를 벌인 것을 회니시비라고 일컫는다. 윤순거의 아들 윤진은 막내삼촌 윤선거에게 글을 배웠고,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윤추 형제는 윤순거에게 글을 배웠는데, 윤순거가 윤증의 호를 명재라고 지어 주었다고 한다. 덕포 윤진은 명재 윤증보다 두 살 아래였고, 윤추보다 한 살 위였으므로, 세 사람은 어릴 때부터 친형제처럼 자랐다.
윤증이 지은 윤진의 묘표를 보면, “나와 윤진은 어려서 같이 놀고 성장하면서 같이 글을 배웠다. 만년에 내가 아우 윤추와 같이 이산의 유봉(酉峯)에서 살자, 윤진도 그 산자락 지산(枝山)에다 집을 지어놓고 같이 송추(松楸)의 밑에서 여생을 보냈다. 윤진은 자품이 강명(剛明)하여 결단을 잘 내렸으므로, 혼미하고 나약한 내가 윤진의 힘을 입은 바가 실로 많았는데, 명칭은 형제간이지만 사실은 두려운 벗이었다.” 하였다.[「윤진묘표」]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회니시비에서 윤증을 대신하여 우암 송시열과 논쟁을 벌였던 사람은 바로 윤진이었다. 왜냐하면, 윤증은 스승 송시열과 가능하면 논쟁을 피하고 싶어 하였기 때문이다. 회니시비에서 덕포, 또는 자경이 자주 거론되는데, 바로 윤진을 가리킨다.
윤증은 처음에 아버지 윤선거와 큰아버지 윤순거에게 가학(家學)으로 글을 배우다가, 14세 때 금산(錦山)의 서사(書舍)에서 시남(市南) 유계(兪棨)에게 4서(書)를 배웠다. 그리고 19세 때 탄옹(炭翁) 권시(權緦)에게 5경(經)을 배우다가 그의 사위가 되었다. 이어 아버지 윤선거의 권유로 29세 때 회천으로 송시열을 찾아가 주자(朱子)의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배웠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와 큰아버지 윤순거의 학문을 이어 받았고, 또 둘째 큰아버지 윤문거(尹文擧)는 송시열과 50여 년 지기(知己)였으므로, 이산의 윤씨 집안과 회천의 송씨 집안은 서로 교유 관계가 아주 깊었다. 또한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은 윤선거와 윤문거, 윤순거 등의 6형제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외손자였으므로 예우를 다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효종(孝宗)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서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제(服制)를 둘러싸고, 서인 송시열 및 송준길의 기년복(朞年服)과 남인 윤선도(尹善道) 및 윤휴(尹鑴)의 삼년복(三年服) 주장이 대립하면서, <제1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때 서인 집안 출신인 윤선거가 남인 윤휴의 차장자설(次長子說)을 몰래 지지하자, 윤선거에 대한 송시열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1669년(현종 10) 윤선거가 세상을 떠난 후, 1673년(현종 14) 11월 윤증이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신도비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윤진과 윤추는 “우리 집안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걱정해 주다가 도리어 원망을 받고 있는데, 후대에 전할 비문을 원망하고 있는 분에게 함부로 부탁해서는 안 됩니다.”라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윤증은 “평소에 두 분이 비록 의견이 다 합치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선친의 마음은 시종 우암과 간격이 없었다. 또 선인의 집우(執友)로는 오직 이 어른만이 계실 뿐이니, 이 어른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청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고, 마침내 윤선거의 행장(行狀)과 연보, 그리고 서간문(書簡文)을 가지고 직접 회천으로 찾아가서 송시열에게 비문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였다.[『명재연보(明齋年譜)』 권1] 윤선거의 행장은 박세채가 지은 것이고, 윤선거의 연보는 윤증의 명을 받고 윤진과 윤추가 편찬한 것이었다.
송시열이 마지못하여 허락하고, 윤선거의 연보와 행장을 읽어보니, 그 연보에는 윤선거가 평소 송시열에게 충고하고 경계했던 말들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또 행장에는 윤선거가 도학(道學)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므로, 송시열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게다가 1669년(현종 10) 윤선거가 쓴 서간문을 읽은 송시열은 결국 감정이 폭발하였다. 이에 박세채에게 편지를 보내, 이미 지나간 ‘윤휴의 일’과 ‘강화도의 일’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면서 윤선거를 흠집 내려고 하였다. ‘윤휴의 일’은 윤선거가 윤휴와 겉으로는 절교를 선언하고 속으로는 그와 내통하였다는 것이고, ‘강화도의 일’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윤선거가 아내 이씨와 같이 죽기로 약조하였는데, 아내만 죽게 하고 자신은 살아남은 것을 말하였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비문에 박세채가 쓴 행장을 그대로 옮겨 쓴 후, 명문(銘文)에 『중용(中庸)』의 지(知)⋅인(仁)⋅용(勇)의 3덕(德)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윤선거가 3덕(德)의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하였으나, 하늘이 수명을 오래 주지 않아서 그 3덕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며 비꼬았다. 비명(碑銘)을 본 윤증은 이를 다시 송시열에게 반송하고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때 회천에 사는 송시열과 이성에 사는 윤증 사이에 비문을 둘러싸고 몇 차례 논쟁하고 시비(是非)한 것을 이른바 회니시비라고 일컫는다. [『명재연보』 권1]
이때 송시열이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네가 지은 행장은 다시 논의해야 할 곳이 무척 많다. 을사년 무렵에 내가 길보(吉甫) 윤선거와 산사(山寺)에서 만났는데,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도 그 자리에 왔었다. 내가 윤선거에게 ‘요사이 윤휴에 대한 형의 생각이 어떠한가.’ 하였다. 그가 문득, ‘그는 흑(黑)이고 음(陰)이며, 소인(小人)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렇다면 형은 그와의 교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더니, ‘내가 흑이고 음이고 소인이라고 여기면서 어찌 그와 절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므로, 내가 ‘형은 이제 깨끗해졌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초려 이유태가 나에게 말하기를, ‘길보 윤선거는 겉으로는 엄정(嚴正)해 보이지만 내면은 실제로 허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니, 그날 한 말은 믿을 수 없을 듯하다.’ 하므로, 내가 나무라기를, ‘어찌 길보 윤선거가 그렇겠는가. 형이 잘못 안 것이다.’ 하였다. 윤선거의 문하에 있다가 그가 죽고 난 뒤, 나에게 온 선비가 말하기를, ‘윤선거와 윤휴의 교제는 시종 변함이 없었으니, 그들이 절교하였다는 말을 아무쪼록 믿지 마십시오.’ 하였는데, 내가 비록 그 말을 깊이 믿지는 않았지만, 또한 의심이 없지도 않아서 초려 이유태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볼 만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의 묘갈명을 지으면서 『중용』의 지⋅인⋅용의 몇 마디 말을 인용하여 윤휴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슬그머니 비판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명재연보』 권1]
이후 윤진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천의 송상(宋相 : 송시열)이 반드시 멀지 않아 다시 말을 지어내어, 스스로 전면에 나서서 공격할 것이다.” 하였다. 1684년(숙종 10) 이후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를 비호했다는 사실, 윤증이 스승을 배반했다는 사실, 윤휴 부자가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무함했다는 사실,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배척했다는 사실 등을 거론하며, 윤증에게 죄를 모두 덮어씌우려고 하였다.송시열의 상소문 가운데는 윤추와 윤진의 언행을 인용하면서 두 사람에 대해서 크게 비난한 부분도 많았다. 또 노론의 여러 제자들도 연달아 상소를 올려 윤선거와 윤증 부자를 무함하였다. 박세채가 “문생의 도리로서 한 번 변론하는 상소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충고할 정도였다. 이에 1687년(숙종 13) 2월 윤증의 문인인 명촌(明村) 나양좌(羅良佐)가 성지선(成至善) 및 조득중(趙得重) 등과 함께 변론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윤증이 제자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만류하기를, “변론하는 상소를 올리겠다는 논의에 대해서 나는 전처럼 변론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선친에 대한 두 가지 일 가운데 강화도)의 일은 이미 선친의 상소에서 자세히 아뢰었던 사실이므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윤휴와의 관계도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세상에 어찌 윤휴와 편당(偏黨)이 되어, 주자를 배반하는 일을 하였겠는가. 선친께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인데, 어떻게 한 세상을 속일 수 있겠는가. 가만히 내버려 두고 공의(公議)가 저절로 안정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명재연보』 권1]
중년에 이른 윤증에게 회니시비는 실로 횡역(橫逆)이었다. 송시열이 침범하여 욕보이고 기를 꺾고 속박한 것이 거의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으나, 윤증은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스스로의 도리를 지키며 올바른 권도(權度)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옛 사제(師弟)간의 정의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송시열을 ‘우옹(尤翁)’이라고 불렀다. 송시열이 직접 상소한 이후에는 ‘회천’이라고 칭하였으나, 한 번도 ‘송시열’이라고 그의 성명을 바로 일컬은 적은 없었다. 윤증이 일찍이 이르기를, “날조한 상소를 보면 나를 거의 원수보다 심하게 대하였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원망스럽거나 노여운 줄 모르겠다. 도리어 그 미혹됨이 불쌍하게 여겨지니, 이것이 바로 내 성정(性情)과 기질의 부족한 점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도 회천의 일에 잘못한 점이 없지 않으니, 사람들이 나더러 한 가지도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은 편파적인 논의이다. 후세에 은혜와 원망이 모두 잊혀진 다음에 반드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의가 있겠지만, 반드시 나를 두고 스승을 배반했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내가 겪었던 일 때문에 ‘사제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면, 이것은 내가 후세에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윤진이 일찍이 감탄하기를, “우리 형의 의로운 처신은 어진 군자의 마음가짐이다.” 하였다.[『명재연보』 권1]
[성품과 일화]
윤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순수하며, 단정하고 침중(沈重)하였는데, 항상 부지런하여 평소에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기마음을 지키는 데 전념하고, 영예로운 진취(進就)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아버지 윤순거와 막내삼촌 윤선거에게 글을 배워 문예(文藝)가 숙성하였으므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약관(弱冠)의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러나 큰형 윤절이 봉명사신으로 동래에 갔다가 갑자기 죽자, 큰 충격을 받았다. 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애훼(哀毁)하다가, 마음의 병을 얻어서 거의 10년 동안 스스로 세상사를 포기하고 지냈다.[「윤진묘표」]
그에 대한 평가는 당파에 따라 다르다. 노론 측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윤진은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서 용퇴(勇退)하였다. 비록 취할 만한 점도 있기는 하였으나, 지론(持論)이 너무 편벽되어 사문(斯文)의 흔단(釁端)을 조성하였으니, 사람들이 이 점을 부족하게 여겼다.[『숙종실록』 숙종 24년 3월 10일]
이에 비하여 소론 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그는 식견이 통달 투철하여 일과 사람을 논함에 있어서 적중하는 것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기도 했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청현(淸顯)한 벼슬을 역임하고, 어버이가 죽자 즉시 뜻을 결정해 은퇴하였다. 대개 당시의 형세를 헤아리고 송시열의 주장이 너무 지나침을 병통으로 여겨서, 많은 사람을 따라 구차하게 의견을 합치는 것을 싫어하여 그만둔 것이다.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으나 번번이 나아가지 않자, 문순공(文純公) 박세채가 조용히 은퇴 생활하는 윤진을 칭찬하고, 당상관[緋玉]으로 승진시키도록 청했다. 벼슬에 임명되자마자, 그는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에 참판[亞卿]으로 발탁되었는데, 이것은 문충공(文忠公) 남구만이 그를 박세당(朴世堂) 및 임영(林泳)과 함께 불러서 등용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늙어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24년 4월 27일]
1680년(숙종 6) 5월 이조 판서 김석주가 왕에게 아뢰기를, “당상관(堂上官)의 의망은 구차스러운 인사를 면하지 못합니다. 지금 시종(侍從)의 신하 중에서 전 사간 송규렴(宋奎濂)은 벼슬길에 나온 지 30년인데, 비록 노모(老母)가 있다고 하여 먼 지방에 가서 벼슬살이할 수 없다고 하지만, 어찌 끝내 종사(從仕)하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 윤진도 또한 종사한 지 오래되었는데, 비록 잘 놀라고 가슴이 뛰는 심장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 대단한 병이 아닙니다. 또 사람됨이 정묘(精妙)하고 긴절(緊切)하며, 여러 해 동안 시골에서 독서하여 놀라운 학문의 진보를 보였습니다. 모두 당상관으로 승진시킨다면, 비록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은전을 베푼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니, 벼슬한 지 오래된 차례에 따라 승진하는 구차(久次)로 논한다면 또한 반드시 실정에 맞을 것입니다.” 하였다. 숙종이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후일의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당상관에 의망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숙종 7년 5월 3일] 김석주의 추천에 의하여 숙종이 특별히 윤진의 자품(資品)을 올리고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 숙종 7년 5월 26일] 그러자 윤진은 고향 이산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숙종에게 사은은 하였으나, 벼슬에 부임하지 않고, 곧바로 시골로 내려갔다.
윤증은 이산의 유봉에 살았는데, 유봉의 산자락인 지산에 집을 짓고 살면서 종학당(宗學堂)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종학당은 1643년(인조 21) 아버지 윤순거가 종중(宗中)의 자제들과 문중의 내외 친척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건립한 3채의 서당(書堂)이었다. 일찍이 윤진은 청소년 시절에 윤증과 윤추 형제와 함께 종학당의 백록당(白鹿堂)에서 아버지 윤순거와 막내삼촌 윤선거의 가르침을 받았다. 1691년(숙종 17) 1월 윤증이 수옹(壽翁) 이세구(李世龜)에게 보낸 글에서, “자경(子敬 : 윤진의 자)은 아이들 가르치는 일로 날을 보내고 있는데, 늙은이의 재미가 그것 밖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명재유고』 보유] 이를 보면, 윤진은 아버지 윤순거의 뒤를 이어 종학당의 당장(堂長)이 되어 종중과 내외 친척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 열정을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종학당의 종중 자제 교육은 윤순거와 윤진 부자의 노력으로 그 토대가 닦여, 1910년 조선이 망할 때까지 267년간 계속되었다. 조선 후기 노성(魯城)의 종학당에서 수학한 파평 윤씨 가운데 무려 46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종학당은 지금 논산시 유형 문화재 1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재 윤증은 윤진에 대하여 “윤진은 늙어도 정신이 쇠퇴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나보다 뒤에 죽을 것이라고 여겼으나, 뜻밖에 윤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뿐만 아니라 뒤이어 나의 아우 윤추도 가버렸고, 나만 지루하게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나는 항상 길 안내자가 없는 맹인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장차 내가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 염려되어 주야로 전전긍긍 하면서, 마치 얇은 살얼음을 밟는 것과 같은 심정이다. 이 때문에 어진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옛날을 생각하는 마음이 항상 가슴속에 간절하다.” 하였다.[「윤진묘표」]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데, 4촌형 명재 윤증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윤진묘표」]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첫째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이조 참판 이시술(李時術)의 딸이고,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태장(李台章)의 딸이다.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윤혜교(尹惠敎)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냈고, 차남 윤무교(尹懋敎)는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지냈다. 장녀는 판관(判官)이의수(李宜遂)에게, 차녀는 사인(士人) 이형(李瑩)에게, 3녀는 직장(直長) 심준(沈埈)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측실에서 난 딸은 이만석(李萬石)에게 시집갔다.[「윤진묘표」] 막내사위 심준은 명재 윤증이 아끼던 제자인데, 그의 할아버지 고송재(孤松齋) 심정희(沈廷熙)는 윤증의 절친한 친구였다. [『명재유고』 권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