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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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립(尹毅立)

서지사항
항목명윤의립(尹毅立)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정치·행정가/관료/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68년(선조 1)∼1643년(인조 21) = 76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이자 서화가. 초명은 윤의립(尹義立)이다. 예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지중(止中)이고, 호는 월담(月潭)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조 판서 윤국형(尹國馨)이고, 어머니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경력(經歷)을 지낸 조수(趙琇)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에 추증된 윤희렴(尹希廉)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윤정림(尹廷霖)이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윤경립(尹敬立)의 동생이자, 선비화가 윤정립(尹貞立)의 형이기도 하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93년(선조 26) 윤11월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실록』]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음직(蔭職)으로 청요직(淸要職)에 임명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으나, 당시 동인(東人)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아버지 윤국형이 동인의 중진으로 우의정 유성룡(柳成龍)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으므로 가능하였다. 그러나 사헌부(司憲府)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 국가 일을 돌보기보다 먼저 가족을 피난 시켰다고 비난을 하면서 선조를 호종(扈從)하지 않고 먼저 자기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켰다는 죄로 추고(推考)당하였다.

이어 1594년(선조 27) 정시(庭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그해 12월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하였다.[『실록』] 그리고 1595년(선조 28) 3월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11월 예문관 봉교(奉敎)를 거쳐, 그해 12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設書)가 되었다.[『실록』] 1597년(선조 30) 6월에는 홍문관 저작(著作)이 되었으며, 1598년(선조 31) 1월에는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고,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겸임하였다.[『실록』] 이때 동인과 북인(北人)의 정권 다툼에서 유성룡이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당하자, 아버지 윤국형도 판서에서 쫓겨났다. 이때부터 선조는 윤의립을 동인이라고 인식하여, 이후 여러 번 청요직에 의망(擬望)되었어도 낙점(落點)하지 않았다.

1601년(선조 34) 6월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임명되었고, 그해 7월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 8월에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로 승진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실록』] 그가 홍문관 교리와 부응교로 있을 때 환관이 군사를 열병(閱兵)하는 잘못을 논하였고,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홍로(李弘老)가 조정의 대신들에게 뇌물을 보내어 환심을 사는 것을 탄핵하면서 강직하다는 평을 받았다.[『비문』] 1602년(선조 35) 1월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다.[『실록』] 그 뒤에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었는데, 어사(御使)로 나가서 해변의 경비를 순시(巡視)하고 돌아와서 왕에게 자세히 보고한 후,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비문』] 이후 1604년(선조 37) 12월 사옹원(司饔院) 정(正)에 임명되었다가, 1605년(선조 38)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고, 이어 강화부사(江華府使)에 임명되어 3년 동안 근무하다가 또다시 병으로 사임하였다.[『실록』, 『비문』] 1607년(선조 40) 12월에는 지제교(知製敎)가 되어 왕의 교서를 지었다.[『실록』]


광해군(光海君)이 왕위에 오른 1608년(광해군 즉위년) 3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으며, 그해 4월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실록』] 1609년(광해군 1년) 2월에는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는데, 임기가 만료될 무렵에 부친상을 당하였다.[『실록』, 『비문』] 1614년(광해군 6) 4월 호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가 이어 춘천부사(春川府使)가 되었으며, 1617년(광해군 9)에는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옮겼는데, 그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다.[『실록』, 『비문』] 1618년(광해군 10) 7월 조정에 들어와서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가,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윤의립은 79세의 노모가 있다며 교체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사헌부의 반대로 그해 8월 부사(副使) 목대흠(睦大欽)과 함께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 왔다.[『실록』] 그리고 1621년(광해군 13) 장단부사(長湍府使)로 나갔다가 모친상을 당하였다.[『비문』]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그해 10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고, 그해 11월 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상길(李尙吉)을 대신하여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평안도 서쪽에 있는 섬 가도(椵島 : 평안도 피도)로 가서 명나라 제독(提督) 모문룡(毛文龍)을 만났다.[『승정원일기』, 『비문』] 후금(後金)의 누루하치가 요동(遼東) 지방을 침입하자, 모문룡이 요동 지방에 살던 중국인들을 데리고 가도로 와서 조선에 군량미를 요구하였는데, 광해군 때에는 이상길이 모문룡을 적극 보호하였다.[『실록』] 그러다가 인조 즉위 후 윤의립이 접반사로 가자, 모문룡이 몹시 화를 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형 윤경립의 서자 윤인발(尹仁發)이 이괄의 서기(書記)로서 반란을 주도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윤인발은 이괄의 아들 이전(李旃)과 친하였는데, 이괄의 난이 적발되었을 때 즉시 도망쳐서 길을 가다가 도적을 만나 피살된 것같이 다른 사람의 시체를 난도질하여 사람들이 보아도 알아볼 수 없게 한 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영변으로 도망갔다. 윤인발의 집에서는 윤인발이 도적을 만나 살해된 줄 알고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3] 그러면서 이미 세상을 떠난 윤경립을 제외하고 윤의립과 그 동생 윤정립이 모반대역(謀叛大逆) 죄에 연좌되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자 이원익(李元翼)과 장만(張晩) 등의 서인들이 “대개 적자와 서자 사이는 원수처럼 틈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라며 변호하였으므로, 인조가 이를 불문에 부쳤다. 이때 윤의립은 세 번이나 상소하여 자신을 연좌시키도록 청하였으나, 인조가 특별히 용서하였다. 이때 모문룡이 윤의립을 무함(誣陷)하려 하자, 인조는 모문룡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윤의립을 밀양부사(密陽府使)로 임명하였다.

1625년(인조 3) 3월 형조 참판이 되었는데, 인조가 그의 막내딸을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하고자 하였다. 윤의립의 고조할아버지 윤암(尹巖)이 태종(太宗)의 딸인 숙경옹주(淑慶翁主)와 혼인하였으므로 윤의립과 그의 딸 또한 왕가의 외손이라는 점에서 인조는 윤의립의 딸을 간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자점(金自點)을 비롯한 서인들은 윤의립의 딸이 역적 윤인발의 4촌이라면서 세자빈의 간택을 중지하도록 요구하였는데, 여기에는 윤의립이 동인이라는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인조는 세자빈 간택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윤의립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서인들의 탄핵으로 인하여 사임하였고, 이후 개성유수(開城留守)와 연안부사(延安府使), 길주목사(吉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실록』, 『승정원일기』, 『비문』] 그러다가 1628년(인조 6) 9월 다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또 대간에서 그를 탄핵하였으나 인조가 들어주지 않았다.[『실록』] 그러나 그해 10월 원로 공신 이귀(李貴)가 윤의립이 윤인발의 삼촌임을 들어 직임 교체를 주장하자, 결국 인조가 이에 따랐다.[『실록』]

이후 1629년(인조 7) 1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그해 4월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며,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온 후에는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 『비문』] 또한 1631년(인조 9)에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가, 1632년(인조 10) 인천부사(仁川府使)로 나갔다.[『승정원일기』, 『비문』] 1633년(인조 11) 1월 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가 되었고, 1634년(인조 12) 2월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 그 뒤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예조 참판과 공조 참판을 역임하였다.[『비문』]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淸)나라 군사들에게 포위어서 45일 동안 지냈다. 그때 윤의립은 인조를 호종하였으므로, 그 공로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품되었고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69세의 윤의립은 노질(老疾)이 있다면서 관직을 사양하였는데, 인조가 한 달이 넘도록 허락하지 않다가, 비변사(備邊司) 및 대신들이 요청을 하자 비로소 관직을 교체하였다.[『실록』, 『비문』] 당시 청나라에서는 3정승 6판서의 아들 한 사람을 심양(瀋陽)에 볼모로 보내도록 강요하였으므로, 윤의립은 그의 아들이 청나라로 떠난 후에 관직을 교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때 윤의립이 형조 판서에서 교체되었으므로, 그의 맏아들 윤인적(尹仁迪)은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가는 고역(苦役)을 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5년 동안 병세가 날로 더욱 심해진 윤의립은 예조 판서를 비롯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춘추관(春秋館) 지사(知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러자 인조가 비교적 직무가 간편한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과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임명하면서, 관직에 나오면서 양로(養老)하게 하였다.[『비문』] 1638년(인조 16) 12월 예조 판서에 임명되자, 다시 병으로 사양하다가 마지못해서 부임하였는데, 1641년(인조 19) 11월 파직되었다. 그때 청나라에서 6판서의 아들을 볼모로 보내도록 요구하였는데, 사간원에서 윤의립이 이것을 모면하기 위하여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를 대며 예조 판서에서 체직되기를 간청한다고 탄핵하였다. 그러면서 삭탈관직과 문외출송(門外出送)을 청하자 인조는 당시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파직시켰다가 몇 달 뒤에 다시 서용(敍用)하였다.[『실록』] 그러나 그때 그는 이미 몸이 몹시 쇠약하고 정신이 불안하여 조회(朝會)하고 임금을 알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비문』] 마침내 1643년(인조 21) 9월 29일 노병(老病)으로 서울의 본가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6세였다.[『실록』]

그가 지은 책으로는 『회은록(懷恩錄)』, 『내외세보(內外世譜)』, 『읍훈록(挹薰錄)』, 『야언통재(野言通載)』, 『산가청사(山家淸事)』 등이 남아 있다.[『비문』] 또한 동생 윤정립과 함께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하였는데, 『산수화첩(山水畫帖)』 등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윤의립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됨이 단아하고 관대하며 겸손하고 신중하였다. 조정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지방 장관을 여러 번 맡았는데, 치적이 드러나서 칭송을 들었다. 재상의 지위에 오른 지 20여 년이나 되었으나, 가세가 매우 청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실록』] 또한 바탕이 중후하고 기품이 온전하였다. 사람의 안팎이 온전하고 순수하여 안은 질박하고 알찼으며, 바깥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금처럼 단단하고 옥처럼 굳세었다. 안으로 덕을 쌓아서 바깥으로 아름다운 행동이 드러났으므로, 자기 몸가짐과 집안 유지에 한 점의 하자도 없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친척에게 우애하였으며,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먼 지방에 사는 소원(疏遠)한 친족이라고 하더라도 일이 있어서 그를 찾아오면, 그 어려움을 함께 풀어주고 따뜻한 정의(情意)를 베풀었다. 보통 때에도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남들의 뜻을 거스르는 적이 없었다.[『비문』]

한편 1597년(선조 30) 6월 나이 30세의 윤의립이 홍문관 저작이 되었을 때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가 선조가 입고 있는 옷이 법복(法服)이 아니라고 지적하니, 선조가 놀라 즉시 명나라 조정의 관복을 그린 서첩(書帖)을 가져오게 하여 비교하여 보니, 윤의립의 지적이 맞은 일이 있었다. 이에 선조가 크게 칭찬하고 그 서첩을 윤의립에게 하사하였으며, 관직을 승진시켜 홍문관 수찬과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임하게 하였는데, 이는 윤의립이 평소에 그림을 그리면서 법복을 그려 보았기 때문이었다.[『실록』, 『비문』]

[묘소와 후손]
윤의립의 묘소는 경기도 적성(積城) 경신동에 있는데,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비문』]

첫째 부인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군기시(軍器寺) 정 박문영(朴文榮)의 딸이다. 자녀는 1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 윤인적(尹仁迪)은 일찍 죽었고, 딸은 목사(牧使) 황수(黃瀡), 군수(郡守) 안정(安鋌), 시직(侍直) 박이장(朴以章), 현감 이효승(李孝承)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부인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양주목사(楊州牧使) 정약(鄭爚)의 딸이다. 자녀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현령 윤세헌(尹世獻)과 윤세량(尹世亮), 윤세익(尹世益)이고, 딸은 지평(持平) 오정원(吳挺垣)에게 출가하였다.[『비문』]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곡집(谿谷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묵재일기(黙齋日記)』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순암집(順菴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혼정편록(混定編錄)』
■ 『송강집(松江集)』
■ 『동강집(東岡集)』
■ 『오리집(梧里集)』
■ 『악록집(岳麓集)』
■ 『오봉집(五峯集)』
■ 『우복집(愚伏集)』
■ 『남파상국집(南坡相國集)』
■ 『만회집(晩悔集)』
■ 『동악집(東岳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지천집(遲川集)』
■ 『동명집(東溟集)』
■ 『백헌집(白軒集)』
■ 『만랑집(漫浪集)』
■ 『송자대전(宋子" 大全)』
■ 『외재집(畏齋集)』
■ 『남계집(南溪集)』
■ 『겸재집(謙齋集)』
■ 『남당집(南塘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대산집(臺山集)』
■ 『계당집(溪堂集)』
■ 『죽유집(竹牖集)』
■ 『모당집(慕堂集)』
■ 『해월집(海月集)』
■ 『성옹유고(醒翁遺稿)』
■ 『낙서집(洛西集)』
■ 『완정집(浣亭集)』
■ 『망와집(忘窩集)』
■ 『현주집(玄洲集)』
■ 『태천집(苔川集)』
■ 『묵수당집(嘿守堂集)』
■ 『석병집(石屛集)』
■ 『당촌집(塘村集)』
■ 『죽당집(竹堂集)』
■ 『송파집(松坡集)』
■ 『검재집(儉齋集)』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