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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6년(선조 29)∼1668년(현종 9) = 73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상의원(尙衣院)정(正)과 영월군수(寧越郡守) 등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자(字)는 노직(魯直)이고, 호(號)는 동토(童土)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이성(尼城)이다. 양부(養父)는 큰아버지인 죽산부사(竹山府使) 윤수(尹燧)이고, 양모(養母)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부윤(府尹) 이현배(李玄培)의 딸이다. 생부(生父)는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윤황(尹煌)이고, 생모(生母)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성혼(成渾)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에 추증된 윤창세(尹昌世)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윤돈(尹暾)이다. 윤문거(尹文擧)와 윤선거(尹宣擧)의 친형이자, 윤증(尹拯)의 삼촌이기도 하다. 외삼촌 성문준(成文濬)에게 글씨를, 강항(姜沆)에게 시문(詩文)을,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부자에게 예학(禮學)을 배웠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의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8세였다.[『방목(榜目)』] 그러나 끝내 대과(大科)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음직(蔭職)으로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내시들과 접촉하기 싫어서 그만두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40 「중부동토부군신도비명(仲父童土府君神道碑銘)」 이하 「윤순거신도비명」] 1633년(인조 11) 10월 종6품상 여절교위(勵節校尉)에 승품되어 충무위(忠武衛)부사과(副司果)가 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1년 10월 1일]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생부인 윤황은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충청도 영동(永同)으로 유배되었고, 윤황의 아우 윤전(尹烇)은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이후 윤순거(尹舜擧)는 고향인 충청도 이산(尼山)으로 내려갔다.[「윤순거신도비명」]
1645년(인조 23) 은일(隱逸)로 추천되어 대군(大君)들의 사부(師傅)에 임명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뜻을 낮추면서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으나, 그는 명분론(名分論)을 떨쳐버리고 과감하게 입시(入侍)하여 대군의 사부에 봉직하였다.[「윤순거신도비명」] 이어 1648년(인조 26) 상의원(尙衣院)주부(主簿)와 형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가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갔으며, 가을에는 생모의 상을 당하였다. 1650년(인조 28) 상복을 벗자 경상도 의령현감(宜寧縣監)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이황(李滉)과 남효온(南孝溫)의 사당(祠堂)을 건립하였다.[「윤순거신도비명」] 얼마 뒤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이산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종부사(宗簿司) 주부가 되었다가, 공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으며, 1656년(효종 7)에는 금구현령(金溝縣令)으로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다.[「윤순거신도비명」, 『명재유고』 권1 「금구현재즉사봉정중부안하(金溝縣齋卽事奉呈仲父案下)」]
1660년(현종 1) 영월군수가 되었는데, 영월에 있는 노산군(魯山君 : 단종)의 묘소인 노릉(魯陵)이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중수(重修)하였다.[「윤순거신도비명」] 1665년(현종 6) 7월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임명되어 즉시 서울로 올라왔으나, 그해 8월 동생 윤선거가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으므로, 그는 피혐(被嫌)하여 사은(謝恩)만 하고 고향 이산으로 돌아갔다.[『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 6년 7월 1일, 현종 6년 8월 13일, 「윤순거신도비명」] 그 뒤에 사직서(社稷署)영(令)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위(翊衛), 군자감(軍資監)정(正), 예빈시(禮賓寺) 정, 상의원(尙衣院) 정 등을 역임하였다.[「윤순거신도비명」]
1668년(현종 9) 12월 30일 성남(城南)의 우사(寓舍)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73세였다.
[윤순거의 편저와 유묵(遺墨)]
1609년(광해군 1) 아버지 윤황이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원하여 전라도 영광군수(靈光郡守)로 나가면서 윤순거도 전라도 영광에서 살았다. 그때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일본에 잡혀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강항이 영광에 살고 있었다. 윤황은 강항의 문장과 절행(節行)이 뛰어나다며 윤순거에게 시문을 배우게 하였으므로, 윤순거는 강항에게서 문장을 익혔다.[「윤순거신도비명」] 강항이 세상을 떠난 후 1654년(효종 5) 그의 제자들이 모여서 『수은집(睡隱集)』을 편찬할 때 윤순거가 「간양록지(看羊錄識)」를 쓰고, 다음 해인 1566년(효종 6) 『강항의 행장(行狀)』을 지었다.[『명재유고』 권35] 한편 강항은 『건거록(巾車錄)』이라 이름하고 일본 표류기를 간단히 기록하였는데, 윤순거가 이것을 보충 정리하여 『간양록(看羊錄)』으로 이름을 고치고 강항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서 지조와 절개를 지킨 사실을 자세히 밝혔다. 1668년(현종 9) 4월 현종이 경연(經筵)에서 이 책을 통하여 강항의 충성심을 알고 강항을 이조 참의(參議)에 추증하였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현종 9년 4월 13일, 「윤순거신도비명」]
또 1660년(현종 1) 윤순거가 영월군수가 되었을 때, 영월에는 노산군(魯山君 : 단종(端宗))의 묘소인 노릉(魯陵)이 있었다. 묘소 곁에는 옛날에 지은 암자 하나가 있었으나, 모두 퇴락하여 볼품이 없었으므로, 그가 공장(工匠)을 모집하여 노릉과 승사를 중수하였다.[「윤순거신도비명」] 또 노산군의 일대기와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에 대한 기록, 그리고 노릉을 소재로 한 시문(詩文)들을 모아서 『노릉지(魯陵志)』를 편찬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29년 10월 13일] 후에 숙종(肅宗) 때 노론(老論)이 정권을 잡고 명분론을 내세워 노산군의 위호를 단종으로 복위할 때, 숙종은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장릉지(莊陵志)』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때 홍문관에서 윤순거의 『노릉지』를 바탕으로 『장릉지』를 편찬하고 윤순거가 지은 지발(志跋)과 암기(庵記) 등을 그대로 전재(轉載)하였다.[「윤순거신도비명」]
윤선거가 죽고 난 뒤에는 그 제자들이 모여서 그의 시문을 모아 『동토집(童土集)』을 편찬하였다.[『명재유고』 권43 「세자시강원진선정공행상(世子侍講院進善鄭公行狀)」]
윤순거는 글씨도 잘 썼는데, 어렸을 때부터 외할아버지인 성혼에게 글을 배우고, 외삼촌인 성문준에게 글씨를 익혔다. 처음에는 외삼촌으로부터 당시에 유행하던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를 익혔으나, 점차 성장하면서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따랐다. 그러나 윤순거가 쓴 글씨는 모두 흩어져서 없어지고, 강원도 철원의 심원사(深源寺)에 「취운당대사비(翠雲堂大師碑)」가 남아 있을 뿐이다.
[성품과 일화]
윤순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고매하고 청렴하였다. 손에서 책이 떠날 때가 없었고 늙어서도 책 읽기를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젊었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이라면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한결같이 규율(規律)로써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여, 세상의 영욕(榮辱)과 득실(得失) 따위에 대하여 일체 관심이 없었다. 중년에는 병으로 인하여 외면 공부에 다소 소홀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일찍이 광명정대한 도학(道學)의 길을 스스로 체득하여 더욱 자기 수련을 쌓아서, 학업을 이룩하였다. 집안에 있을 때에는 은혜와 사랑이 누구에게나 두루 미쳤다. 또한 잔꾀를 부리는 사람을 배척하였고, 간사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다. 또한 고향 이산에 있을 때에는 일가친척과 동네 사람들에게 예법을 가르치고 상부상조하도록 향약(鄕約)과 같은 동네 규약[洞約]을 만들었다.[「윤순거신도비명」]
1650년(인조 28) 윤순거가 경상도 의령현감으로 있을 때 “생육신의 하나인 추강(秋江) 남효온의 절의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업적과 서로 비등하므로, 현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남효온이 경상도 의령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윤순거는 남효온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윤순거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논산(論山) 이산의 선영에 있는데, 조카 윤증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둘째 아들 윤진(尹搢)이 출세하게 되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윤순거신도비명」]
충청도 연산(連山)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전라도 영광(靈光)의 용계사(龍溪祠), 전라도 금구(金溝)의 구성서원(九成書院)에 제향되었다.[『사계전서(沙溪全書) 』 권47] 1707년(숙종 33) 9월 충청도의 진사(進士) 이만성(李萬誠) 등의 상소로 이산에 있는 윤황의 서원에도 제향되었다.[『숙종실록』 숙종 33년 9월 2일]
부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관찰사(觀察使) 이춘원(李春元)의 딸이다. 자녀는 3남을 두었는데, 장남 윤절(尹晢)은 수찬(修撰)을 지내다가 일찍 죽었고, 차남 윤진(尹搢)은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3남 윤지(尹搘)는 어려서 죽었다. 측실(側室)에게서 3남 1녀를 두었는데, 서자는 윤지(尹指), 윤조(尹措), 윤찬(尹攢)이고, 서녀는 송광환(宋光渙)에게 출가하였다.[「윤순거신도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