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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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경(尹知敬)

서지사항
항목명윤지경(尹知敬)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정치·행정가/관료/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84년(선조 17)∼1634년(인조 12) = 51년].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와 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 : 충청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자는 유일(幼一)이고, 호는 창주(滄洲) 또는 담무자(覃茂子)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윤담무(尹覃茂)이고, 어머니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부사(府使) 유연(柳埏)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윤비(尹棐)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 윤개(尹漑)이다. 정형복(鄭亨復) 및 정온(鄭蘊)과 절친한 사이였다. 윤황(尹煌)윤형지(尹衡志)와 함께 청(淸)나라와의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하여, ‘삼윤(三尹)’이라고 불렸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3년(선조 36) 사마시(司馬試)에 생원으로 합격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6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윤3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設書)와 세자시강원 사서(司書)가 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2년 윤3월 10일, 광해군 2년 12월 22일] 1612년(광해군 4) 12월에는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이후 차례로 승진하여 종3품의 홍문관 전한(典翰)에 이르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12월 21일] 양사(兩司)에서는 여러 차례 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에 교대로 임명되었다.[『용주유고(龍洲遺稿)』 권20 「감사윤공신도비명(監司尹公神道碑銘)」 이하 「윤지경신도비명」으로 약칭] 1614년(광해군 6) 7월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거쳐 그해 10월 서원현감(西原縣監)으로 나갔는데, 이듬해인 1615년(광해군 7) 10월 사헌부에서 “서원현감 윤지경은 직임을 보살피려는 뜻은 없고, 날마다 술 마시기를 일삼으며, 또 고을의 기녀를 간음하여 아전과 백성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파직하소서.”라고 탄핵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6년 10월 4일, 광해군 7년 10월 4일] 이에 광해군이 윤지경을 파직하였다.

1617년(광해군 9) 3월 병조 좌랑(左郞)이 되었다가, 그해 4월 병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 3월 9일, 광해군 9년 4월 25일] 그리고 그해 11월 의정부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廢妃)하는 문제를 논의하자 윤지경은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또한 친구 정형복으로 하여금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고, 폐모론에 반대하다 유배를 가는 정홍익(鄭弘翼)을 도성문 밖까지 전송하였다.[「윤지경신도비명」]

1618년(광해군 10) 윤4월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정사(正使) 신식(申湜), 부사(副使) 박정현(朴鼎賢)과 함께 표문을 받들고 중국 북경(北京)에 가서 중국에서 관복(冠服)을 내려준 것을 사은(謝恩)하고, 아울러 우리나라에 표류해 온 중국 사람들을 압송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 7월 1일, 광해군 9년 12월 22일, 광해군 10년 윤4월 11일, 광해군 10년 윤4월 28일] 이듬해인 1619년(광해군 11) 1월에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고, 그해 5월 홍문관 교리(校理)에 되었다가 6월에는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 1월 27일, 광해군 11년 5월 7일, 광해군 11년 6월 11일] 이어 1620년(광해군 12) 5월에는 홍문관 수찬, 8월에는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그해 9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2년 5월 11일, 광해군 12년 8월 26일, 광해군 12년 9월 5일]

1621년(광해군 13) 윤2월 어사(御使)가 되어 경기도를 비롯하여 황연도(黃延道 : 황해도)와 평안도 등지에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간계를 부리는 자들을 적발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3년 윤2월 13일] 이후 홍문관 수찬과 세자시강원 보덕, 의정부 검상을 역임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3년 3월 15일, 광해군 13년 3월 18일, 광해군 13년 12월 15일] 그러다가 1622년(광해군 14) 3월에는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는데, 추국청(推鞫廳)의 문사낭청(問事郞廳)을 겸임하게 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4년 3월 17일, 광해군 14년 6월 20일] 이때 폐비론에 반대하는 서인(西人)들을 심문하게 되자,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광주(廣州)로 가버렸다. 그러자 추국청에서 윤지경이 다시 추국(推鞫)에 참여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므로 광해군은 이를 받아들여 윤지경에게 관직에 나올 것을 명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4년 8월 9일] 그리하여 윤지경은 다시 관직에 나간 후, 세자시강원 보덕을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4년 9월 10일]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던 날 밤에 세자시강원 보덕이던 윤경지는 궐내에 입직하다가 세자와 왕비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반정군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처형당할 뻔했으나, 이귀(李貴)가 이를 발견하고 구원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3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그리고 곧 인조를 만났는데, 처음에는 인조에게 배례(拜禮)를 하지 않다가 인조반정에 대하여 들은 후에 배례를 하였으며, 얼마 후 홍문관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5년 3월 13일, 『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1년 3월 13일, 인조 1년 3월 16일] 이어 윤지경이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를 예로 들어 광해군을 잘 돌봐 줄 것을 요청하자, 인조는 “귀에 거슬리는 말은 사람마다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제 윤지경의 폐주(廢主 : 광해군)를 잘 대우하라는 말은 실로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몹시 가상히 여긴다.”고 탄복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년 3월 25일, 인조 1년 3월 26일]

그해 5월 홍문관 전한에 임명되었고, 10월에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11월에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인조실록』 인조 1년 5월 8일, 인조 1년 11월 5일] 그리고 1626년(인조 4) 3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어 사간원 사간(司諫)지제교(知製敎)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으며, 이어 세자시강원 보덕과 의정부 사인, 사헌부 집의, 세자시강원 보덕 등을 역임하였다.[『인조실록』 인조 4년 3월 19일, 인조 4년 4월 21일, 인조 4년 8월 2일, 인조 4년 8월 25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4년 3월 19일, 인조 4년 12월 21일]

그런 가운데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 이때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강화도로 피난할 것을 주장했으나, 윤지경은 군사 5백 명만 있으면 임진강에서 오랑캐를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인조실록』 인조 5년 1월 20일] 인조가 그 기개를 높이 평가하여 검독어사(檢督御史)로 임명하였고, 이에 윤지경은 바로 임진강으로 나가 군사를 징발하여 오랑캐의 기병을 막고자 전쟁 무기와 설비를 갖추는 도중에 강화가 성립되어 그만두었다.[『인조실록』 인조 5년 1월 21일, 인조 5년 1월 24일] 전쟁이 끝난 후 인조는 윤지경의 활약을 칭찬하고, 그를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인조실록』 인조 5년 4월 2일, 인조 5년 5월 20일] 이어 1628년(인조 6) 1월에는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고, 이에 그해 5월 인조가 약을 조제하여 보내도록 하였다.[『인조실록』 인조 6년 1월 5일, 인조 6년 5월 6일] 1629년(인조 7) 3월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가, 그해 7월 승정원 우승지가 되었다.[『승정원일기』 인조 7년 3월 25일, 인조 7년 7월 19일]

1630년(인조 8) 2월 예조 참의(參議)가 되었는데, 그때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자, 윤지경은 임금이 수성(修省)해야 할 도리를 진달하고, 구언(求言)하는 분부를 내릴 것을 청하니, 인조가 즉시 승지(承旨)로 하여금 교서를 초하여 직언을 널리 구하게 하였다.[『인조실록』 인조 8년 2월 16일] 그해 9월 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교체되었고, 이듬해인 1631년(인조 9) 4월 승지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11월 공청도관찰사가 되었다.[『인조실록』 인조 8년 9월 17일, 인조 9년 4월 16일, 인조 9년 11월 11일『승정원일기』 인조 8년 9월 13일, 인조 8년 9월 16일] 1633년(인조 11) 6월 중추원(中樞院) 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으나, 공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공공연히 기생을 끼고 다니다가 체직되어 돌아오는 날 그 기생을 데리고 왔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인하여 인조로부터 추고(推考)하라는 명을 받았다.[『인조실록』 인조 11년 6월 24일] 이후 묵은 병이 더욱 심해져서 광주의 옛집으로 돌아왔다가, 1634년(인조 12) 7월 17일 광주 본가의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51세였다.[「윤지경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윤지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용모가 헌칠하고 장대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지조가 곧고 의리를 좋아하였다.[「윤지경신도비명」] 어렸을 때 모습이 시원스럽고 명랑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모두 말하기를, “윤씨 집안에 대대로 사람이 있다.” 하였다. 박이서(朴彝叙)가 일찍이 그를 보고 “이런 집에 이처럼 훌륭한 아이가 있다니, 내가 가르쳐서 성취시켜야겠다.” 하고, 어린 윤지경을 데려다가 글을 가르치다가 마침내 사위로 삼았다.[『연려실기술』 권29 「인조조고사본말」] 일생 동안 독서를 좋아하여 벼슬하기 전에 이미 경전과 사서(史書)에 통달하였고, 벼슬살이할 적에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고 여러 서적을 열람하였다. 사람들이 금옥(金玉)을 보배로 여겼지만 그는 기와장이나 돌멩이로 보았고, 사람들이 팔진미(八珍味)를 먹고 즐겼지만 그는 채소와 나물만을 즐겨 먹었으며, 사람들은 고관대작을 구하려고 있는 힘을 다했지만 그는 높은 벼슬이 두려워서 마치 겁쟁이와도 같이 뒤로 슬슬 피하였다.[「윤지경신도비명」]

인조반정 때 삼사(三司)에서 폐위된 세자가 도망쳐서 궁궐을 빠져나간 죄를 논하였는데, 윤지경은 스스로 여러 신하들과 입장이 다르다며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 논의에 참여하도록 권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그는 세자시강원 보덕으로서 폐위된 세자를 가르쳤던 것을 들며, “의리가 있는데, 내 마음으로는 차마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겠다.” 하고, 끝까지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연려실기술』 권29 「인조조고사본말」] 또한 1626년(인조 4) 신흠(申欽)전시(殿試)의 명관(命官)이 되었는데, 어떤 대독관(對讀官)이 아부하여 신흠의 아들과 손자가 모두 합격하니 나라 안이 떠들썩하였다. 이때 윤지경은 어사중승(御使中丞)의 신분으로 이를 탄핵하여 그 시험을 무효화시키기도 하였다.[「윤지경신도비명」] 1631년(인조 9) 11월에는 공청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인조를 인견(引見)하였는데, 그때 윤지경의 신발이 매우 낡아빠진 것을 보고, 인조가 자신이 신었던 어화(御靴)를 벗어서 내시를 시켜 궁전 문 밖까지 뒤따라 나와서 주게 하였다고도 한다.[『연려실기술』 권29 「인조조고사본말」]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데, 조경(趙絅)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지경신도비명」]

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이조 참판 박이서의 딸이다.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윤집(尹鏶)이고, 장녀는 헌납(獻納) 강호(姜鎬)에게 시집갔으며, 차녀는 이진선(李振先)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다.[「윤지경신도비명」] 한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자빈을 간택할 때 윤지경의 딸이 초간택을 거쳐 재간택에 뽑히기도 하였으나, 마지막 삼간택 때 강석기(姜碩期)의 딸이 간택되었다.[『승정원일기』]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용주유고(龍洲遺稿)』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계집(桐溪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묵재일기(黙齋日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서계집(西溪集)』
■ 『속잡록(續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평일기(延平日記)』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송강집(松江集)』
■ 『오리집(梧里集)』
■ 『창석집(蒼石集)』
■ 『인재집(訒齋集)』
■ 『우복집(愚伏集)』
■ 『잠야집(潛冶集)』
■ 『백강집(白江集)』
■ 『현곡집(玄谷集)』
■ 『동명집(東溟集)』
■ 『남계집(南溪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해좌집(海左集)』
■ 『감수재집(感樹齋集)』
■ 『만오집(晩悟集)』
■ 『천묵유고(天默遺稿)』
■ 『묵수당집(嘿守堂集)』
■ 『무하당유고(無何堂遺稿)』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