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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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헌(尹民獻)

서지사항
항목명윤민헌(尹民獻)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정치·행정가/관료/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62년(명종 17)∼1628년(인조 6) = 67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이자 서화가. 공조 참의(參議)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 등을 지냈고,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자는 익세(翼世)이고, 호는 태비(苔扉)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 좌랑(佐郞) 윤엄(尹儼)이고,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예조 판서 김주(金澍)의 딸이다. 성종(成宗)의 막내딸 정숙옹주(靜淑翁主)의 부마(駙馬) 윤섭(尹燮)의 증손자이며, 좌의정 윤지선(尹趾善)과 영의정 윤지완(尹趾完) 형제의 할아버지이다. 동생 윤민일(尹民逸)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588년(선조 21)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진사(進士)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방목(榜目)』]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음직(蔭職)으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 )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호주집(湖洲集)』 권6 「증이조판서행공조참의윤공묘지명(贈吏曹判書行工曹參議尹公墓誌銘)」 이하 「윤민헌묘지명」으로 약칭] 1609년(광해군 1)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8세였다.[『방목』]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1610년(광해군 2)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윤민헌묘지명」] 1611년(광해군 3) 형조 좌랑(左郞)이 되었고, 1612년(광해군 4) 외직으로 나가서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3년 4월 13일, 「윤민헌묘지명」]

1613년(광해군 5) 형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을 겸임하고,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그때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정권을 잡고 서인을 탄압하였으므로, 외직으로 밀려나서 괴산군수(槐山郡守)가 되었다. 대북의 영수 정인홍은 성혼과 그 제자들을 미워하였는데, <기축옥사(己丑獄死)>에서 서인 정철(鄭澈)이 그의 친구 최영경(崔永慶)을 죽일 때 성혼이 그 배후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윤민헌이 괴산군수로 있을 때 대북이 그를 미워하여 헐뜯었으므로 마침내 파직되었다.[「윤민헌묘지명」]

1617년(광해군 9)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 되었고,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승진하였다.[「윤민헌묘지명」] 그런데 그해 7월 사간원(司諫院)에서 “성균관 사성 윤민헌은 유생(儒生)들을 가르칠 만큼 명망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본직(本職)에 제수되었으니 교체하여 임명하소서.”라고 탄핵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 7월 12일]

1618년(광해군 10) 대동찰방(大同察訪)이 되었는데, 그해 봄 대북의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시키려고 정청(庭請) 운동을 일으켜서, 이에 반대하는 서인들을 공격하여 조정에서 쫓아내고, 인목대비를 마침내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 6월 8일] 이때 윤민헌은 외방의 찰방(察訪)이라는 한가로운 지위에 있었으므로 비록 화를 당하지 않았으나, 얼마 있지 않아 사직하고 돌아와서 고향 안산(安山)의 조상 묘소 아래에서 살았다.[「윤민헌묘지명」]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그해 4월 군자감(軍資監) 정(正)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9월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년 4월 19일, 「윤민헌묘지명」] 그때 충청도재시경시관(忠淸道再試京試官)으로 청주(淸州)에 나가서 초시(初試) 25명을 뽑았는데, 서울에서 파견한 고시관[京試官]들이 충청도에서 향시(鄕試)를 통해 인재를 선발할 때 윤민헌은 사헌부 장령으로서 과거의 부정을 감독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 1년 9월 14일] 이때 인조가 반정한 직후에 민심을 수습하고자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자, 수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하여 여러 차례 과거의 초시(初試)복시(覆試)가 행해졌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윤민헌이 필요하다고 하여 인조가 윤민헌에게 역마(驛馬)를 타고 빨리 상경(上京)하게 하였다. 이어 그해 10월에 내섬시(內贍寺) 정이 되었다.[『승정원일기』 인조 1년 10월 29일]

1624년(인조 2)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난을 갔는데, 윤민헌이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따라갔다. 그 공로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고,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를 거쳐 공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윤민헌묘지명」] 1625년(인조 3) 6월 중국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자, 윤민헌이 사신에게 문안(問安)하는 가승지(假承旨)에 임명되어 평양에 가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접대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 3년 6월 13일] 그러나 오래 묵은 고질병이 있어서 공직을 수행할 수가 없었으므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안산으로 돌아와서 3년 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1628년(인조 6) 7월 22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7세였다.[「윤민헌묘지명」]

윤민헌은 글씨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글씨는 조맹부(趙孟頫) 서체를 본따서 송설체(松雪體)를 썼는데, 해서(楷書)에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유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침착하고 과묵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바른데다가 번거로움이 없었으며, 또 평소에 살아가면서 남들에게 억지로 웃음을 짓지 않았고, 일을 할 때마다 스스로 지조를 지키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동생 윤민일과 함께 성혼을 찾아가서 수학할 때 부지런히 배우고 힘써 익혀서 학업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계 선생께서 언제나 나에게 훈계하기를, ‘너는 명예와 이익을 좇는 자들처럼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내가 비록 옛 선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가만히 스스로 이 말씀을 마음속으로 깊이 되새겨서, 감히 세속에 실추(失墜)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였다.[「윤민헌묘지명」]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서 유교의 경전(經典)과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널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시문(詩文)을 잘 지었는데, 그가 지은 시(詩)는 고상하고 기운찼으나, 오직 남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해서에 능하였으나, 글씨를 가지고 남들에게 자랑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아는 사람이 대개 드물었다.[「윤민헌묘지명」] 그러므로 지금 남아 있는 윤민헌의 시문(詩文)이나 서화(書畵)가 거의 없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은 일찍이 ‘우계(牛溪) 서당’에서 윤민헌과 함께 공부한 친한 친구였는데, 언제나 윤민헌의 학문을 칭찬하고 그 은자(隱者)다운 태도를 부러워하였다. 오윤겸이 정승 및 판서로 크게 출세하자, 윤민헌은 일부러 그를 피하고 서로 왕래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세속에 실추하지 않으려는 그의 고결한 뜻을 보여준 것이다.[「윤민헌묘지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안산(安山) 궤화동(樻火洞)에 있는데, 사위인 채유후(蔡裕後)가 지은 묘지명(墓地銘)이 남아있다.[「윤민헌묘지명」]

부인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사재감(司宰監) 정 김찬선(金纘先)의 딸이다.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윤강(尹絳)은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딸은 이조 판서 채유후의 처가 되었다[「윤민헌묘지명」] 손자 5형제 중에서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윤지미(尹趾美)는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고, 윤지선(尹趾善)은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윤지완(尹趾完)은 영의정(領議政)을 지냈고, 윤지인(尹趾仁)은 이조 판서를 지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전고대방(典故大方)』
■ 『간이집(簡易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