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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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립(尹敬立)

서지사항
항목명윤경립(尹敬立)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정치·행정가/관료/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61년(명종 16)∼1611년(광해군 3) = 51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충청도감사(忠淸道監司) 등을 지냈다. 자(字)는 존중(存中)이고, 호는 우천(牛川)이다.[『방목(榜目)』]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조 판서(判書) 윤국형(尹國馨)이고, 어머니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경력(經歷) 조수(趙琇)의 딸이다. 의정부 좌참찬(左參贊) 윤의립(尹毅立)과 선비화가 윤정립(尹貞立)의 형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 양과에 합격하고, 3년 뒤에 1588년(선조 21)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8세였다.[『동주집(東州集)』 권9 「충청도관찰사윤공묘갈명(忠淸道觀察使尹公墓碣銘)」 이하 「윤경립묘갈명」으로 약칭]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권지정자(權知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89년(선조 22) 사관(史官)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나, 사간원(司諫院)에서 “승문원 권지정자 윤경립(尹敬立)은 본래 이름도 없이 사관(史官)의 후보자에 올랐으니, 삭제하소서.” 하였으므로 제외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22년 12월 4일]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평소 정여립과 친분이 있었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로 옮겼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조선에서 명(明)나라에 5만 명의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중국 조정에서 동정군(東征軍)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차 동정군’은 그해 6월 요양(遼陽)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요동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왔고, ‘제2차 동정군’은 그해 12월 동정제독(東征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요동 군호(軍戶) 4만 2천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때 전쟁 중인 조선에서 군량미와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가가 어려웠기 때문에, 명나라는 육로⋅해로를 통해 중국에서 군량미를 조선의 의주(義州)로 수송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6년 8월 27일] 제독 이여송이 명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을 거쳐 서울로 남하하였으므로, 의주의 양곡을 명나라 군사 진영까지 운반하는 것은 조선 측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자 비변사(備邊司)는 1593년(선조 26) 홍문관 정자 윤경립과 병조 좌랑 박문서(朴文敍)를 관량어사(管糧御史)와 독운어사(督運御史)에 추천하였고, 이에 윤경립은 박문서와 함께 의주의 군량미를 조선의 곳곳에서 전투를 치루는 명나라 군사들에게 공급하였다. 군량미의 원활한 공급으로 명나라 군사를 위무(慰撫)하고 그 사기를 진작시켰으므로, 선조가 특별히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시켰다.[「윤경립묘갈명」] 이때 9품의 정자에서 6품의 부수찬으로 관계(官階)가 한꺼번에 3계단이 승품(陞品)하였다고 하여, 대간에서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해 8월 명나라 측에서 명나라 진영에 군량미를 제때에 공급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물었는데, 비변사에서는 윤경립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그를 명나라 군영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부득이한 상황이라는 점을 들어 명나라 진영으로 윤경립을 보낼 것을 결정하였으며, 아울러 자문(咨文)도 지어서 보내도록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6년 8월 27일] 이에 윤경립은 명나라 군영에 붙잡혀 가서 엄중한 심문을 받고 겨우 풀려났다. 1594년(선조 27) 1월 윤경립이 독운어사로서 군량미를 운반하느라고 호남 지방에 머물고 있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해 11월 부수찬 윤경립이 홍문관 수찬(修撰)정경세(鄭經世) 등과 함께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정철(鄭澈)의 관작을 추탈할 것을 청하였으나, 선조가 들어주지 않았다.[『선조실록』 선조 27년 11월 9일, 선조 27년 11월 13일]

1595년(선조 28) 1월 이조 좌랑(左郞)으로 옮겨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와 세자시강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해 9월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이 되었는데, 그때 국가에서 훈련국(訓鍊局)을 설치하자, 그는 명나라 군영에 잡혀 있을 때 구한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의 병법(兵法)을 훈련국에 보내주었다. 선조가 친히 이것을 열람하고 전쟁에 큰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칭찬하고, 특별히 그를 성균관 사예(司藝)로 승진시켰다.[「윤경립묘갈명」] 한편 척계광의 병법에 의하여 우리나라에서 벽돌을 만들어 집을 짓는 기술이 일반화되었다. 1596년(선조 29) 2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고, 그해 4월 의정부 검상(檢詳)을 거쳐, 그해 6월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9년 4월 28일] 그해 7월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나자, 훈련대장 조경(趙儆)이 소속 경병(京兵) 8백 명을 거느리고 싸우러 갔는데, 훈련도감(訓練都監) 도청(都廳) 윤경립도 참여하여 이몽학의 반란을 진압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7] 1597년(선조 30) 2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그해 3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거쳐, 6월에는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2월 25일, 선조 30년 3월 5일, 선조 30년 6월 12일]

한편 1597년(선조 30) 1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그해 6월 명나라 흠차경리(欽差經理) 양호(楊鎬)가 명나라의 남방 군사 약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에서 직접 군량미를 조선으로 운반하였으나, 이것이 매우 불편하였으므로, 정유재란 때에는 명나라에서 은화를 보내어 조선에서 물자를 구입해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1598년(선조 31) 3월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고, 그해 5월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승진하였는데, 명나라 흠차경리 양호가 선조에게 “근신(近臣)을 차출해서 호남·호서 두 지방의 꼴과 양식을 관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선조가 마침내 우부승지 윤경립과 호조 참의 이민각(李民覺)을 양호찰리사(兩湖察理使)로 임명하고, 충청도와 전라도 두 지방에 가서 명나라 군사에게 공급할 군량미를 마련하게 하였다. 찰리사(察里使) 윤경립은 전라도 전주(全州)에서 남원(南原)에 이르러 경내의 부자들에게 돈을 주고 군량미를 사서 모았다.[『난중잡록(亂中雜錄)』 권3] 곧 선조는 윤경립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하였는데, 이 무렵 군량미를 매매하는 과정에서 민간 상인인 잠상(潛商)역관(譯官)이 손을 잡고 값을 조작하는 경우가 많았다.[「윤경립묘갈명」] 그러므로 이를 엄단하기 위해서 충청도감사 윤경립이 역관 배덕춘(裵德春)을 체포하여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목을 베어서 효시(梟示)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서 파면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2년 3월 16일]

1599년(선조 32) 11월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었고, 이어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나, 두 고을에서 모두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2년 11월 4일] 1601년(선조 34) 1월 황주목사(黃州牧使)가 임명되었는데,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 선조가 비단 옷을 내려주었다.[『선조실록』 선조 34년 1월 6일, 「윤경립묘갈명」] 청주·광주·황주의 목사를 지내면서 양전(量田)과 균역(均役)을 공평하게 시행하여, 명관(名官)이라는 소문이 났다. 1604년(선조 37)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사로잡은 왜구와 중국인 포로 등 남녀 32명을 같이 데리고 가서 명나라에 쇄환(刷還)하니,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가 많은 은화를 상으로 내려주었다[『연려실기술』 권17] 1605년(선조 38) 4월 명나라 북경에서 돌아왔는데, 그해 5월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고, 그해 10월 광주목사가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8년 10월 19일]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 2월 선조가 돌아가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병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어, 군사의 기강을 엄격히 세우고 청탁을 없애는 등 군대 안의 부조리를 일소(一掃)하였다.[「윤경립묘갈명」] 그는 원래 체격이 장대하고 항상 기운이 넘쳐서, 모두 무병장수하리라고 믿었는데. 1611년(광해군 3) 5월 병조 참지(參知)로서 여러 곳을 순찰하다가, 갑자기 전염병에 걸려서 불과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51세였다.[「윤경립묘갈명」]

[성품과 일화]
윤경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체격이 장대하고 생김새가 아주 빼어났다. 자질이 후덕하고 영특하며, 커다란 도량을 가졌다. 인정이 많고 소박하며 충성스러웠고, 가슴에 평온한 마음을 품고, 일찍이 남과의 거리를 두거나 외모를 꾸미지 않았고, 또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기 명성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감정에 따라서 솔직하게 행동하였고, 구차스럽게 남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벼슬에서 물러나서 두문불출하고 사적인 친분을 끊고, 술을 마시면서 스스로의 감정을 억제하고 권세와 이익을 멀리하였다. 그러나 일의 시비(是非)를 논할 때에는,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이 확고하여 남이 범하기가 어려웠다.[「윤경립묘갈명」]

그가 지방의 진(鎭)에 나가 있을 때에는 공직에 부지런히 봉사하였고, 자신을 깨끗하고 엄정하게 단속하였다. 그가 관직을 떠날 때에는 백성들이 무척 그를 아쉬워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항상 인자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집안에 있을 때에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여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하니, 부모가 아들의 효성을 항상 칭찬하였다. 동생과 누이를 대할 때에는 돈독한 우의를 다지고 인륜을 다하였다. 가족들이 병이 나면 몸소 약을 달여 먹이고 밤새도록 간호하였다.[「윤경립묘갈명」]

1604년(선조 37) 중국 복건(福建) 사람 온진(溫進) 등 16명과 남만(南蠻 : 베트남) 사람 2명이 장사하러 바다로 나갔다가 왜구에게 물건을 약탈당하고 붙잡혀서 왜구의 배에 함께 타고 일본으로 끌려가다가, 폭풍을 만나 경상도 지방 앞 바다에서 표류하던 중에 우리 병선(兵船)에게 붙잡혔다. 그때 윤경립이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으로 가게 되었는데, 사로잡은 왜인과 중국인 등 남녀 32명을 동지사 윤경립의 북경으로 가는 인편에 붙여서 보냈다.[『연려실기술』 권17] 그때 그는 흔쾌히 그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갔으며, 쇄환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의복과 식량을 넉넉하게 주었다. 당시 흉년이 극심하여 사신 일행이 요양(遼陽)을 거쳐서 북경으로 가는 길가에 죽는 사람들이 길가에 즐비하였다. 또 소나 말도 많이 죽었기 때문에 요동도사(遼東都司)에서 조선의 사신 일행에게 타고 갈 수레마저 지급해 주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북경에 도착하여, 명나라 만력제에게 동지를 하례하고, 또 쇄환하는 32명을 바치자, 만력제가 그 포상금으로 많은 은화를 하사하였다.

정사(正使) 윤경립 등 30여 명의 사신 일행은 북경의 회동관(會同館)에 있는 조선 사신의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에 40일 간 머물면서 회동관 무역을 하고, 북경 시내를 구경하였다. 1605년(선조 38) 2월 동지사 윤경립 등이 돌아올 때 명나라 순안사(巡按使)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은화를 주고서 말과 당나귀를 구하고 수레를 빌려서 타고 돌아왔다. 왜냐하면, 앞서 북경으로 올 때 요동도사에서 수레를 발급해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해 4월 동지사 윤경립이 서울에 도착하여, 중국의 어려운 형편을 자세히 보고하자, 예조에서 사은사의 노자와 관련하여 뜻밖의 비용에 대비할 것을 요청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8년 4월 27일] 이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성절사와 사은사는 모두 노자를 인삼으로 넉넉히 지급 받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장흥리(長興里)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윤경립묘갈명」]

부인 광릉 이씨(廣陵李氏)는 증 광천군(廣川君) 이호약(李好約)의 딸인데, 그보다 17년 앞서 죽었다.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감찰(監察) 윤인계(尹仁啓)와 학생(學生) 윤세징(尹世徵)이며, 세 딸은 판부사(判府事) 김신국(金藎國)승지(承旨)임효달(任孝達)과 참봉(參奉)이효일(李孝一)에게 각각 출가하였다.[「윤경립묘갈명」] 서자에 윤인발(尹仁發)이 있었다.

윤인발은 이괄(李适)의 아들 이전(李旃)과 친하였다. 1623년(인조 1) 문회(文晦)ㆍ이우(李佑) 등이 “윤인발과 이괄의 아들 이전이 무뢰한을 끌어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밀고하였다. 그때 윤인발은 즉시 도망쳤는데, 길을 가다가 도적을 만나 피살된 것같이 다른 사람의 시체를 난도질해서 사람들이 보아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위장해 놓은 다음에, 윤인발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영변으로 도망갔다. 윤인발의 집에서는 그해 10월 윤인발이 이부 고개에서 도적을 만나 살해되어 그 낯가죽이 벗겨지고 거세된 채 죽은 줄 알고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연려실기술』 권23] 그런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진압되고, 죄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죄수들이 모두 “윤인발이 다시 나타나서 항상 이괄의 측근에 있으면서 서기(書記)를 맡아 보았다.”고 진술하였으나, 추국관(推鞫官)들은 믿을 수 없다며 죄인들을 곤장을 때리고 사건을 마무리 하였다.[『속잡록(續雜錄)』 권2] 이때 이원익(李元翼)과 장만(張晩)과 같은 서인의 대신들이 윤경립의 동생 윤의립과 윤정립을 변호하여 주어서, 겨우 두 형제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동주집(東州集)』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속잡록(續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 『포저집(浦渚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동강집(東岡集)』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지퇴당집(知退堂集)』
■ 『검간집(黔澗集)』
■ 『선원유고(仙源遺稿)』
■ 『월사집(月沙集)』
■ 『노서유고(魯西遺稿)』
■ 『문월당집(問月堂集)』
■ 『양서집(瀼西集)』
■ 『낙서집(洛西集)』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