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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6년(중종 1)∼1545년(명종 즉위년) = 40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과 홍문관 교리(校理) 등을 지냈고,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며, 자는 원룡(元龍)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종부시(宗簿寺)첨정(僉正)을 지낸 정구(鄭球)이고, 어머니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조지서(造紙署)사지(司紙)를 지낸 김중문(金仲文)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현감(縣監)을 지낸 정유의(鄭有義)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목사(牧使)를 지낸 정결(鄭潔)이다. 사림파(士林派)로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고문을 당한 후, 유배를 가던 길에 세상을 떠났다.
[중종 시대 활동]
1528년(중종 23)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으며, 1534년(중종 29)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방목(榜目)』] 급제한 후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으며,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정희등(鄭希登)은 상처(喪妻)를 한 상황이었는데, 척신(戚臣) 김안로(金安老)가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좌천되어 정희등은 호조 좌랑(佐郞)과 예조 좌랑, 병조 좌랑 등을 거쳐,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와 광흥창(廣興倉)수(守), 사복시(司僕寺) 첨정 등의 한직을 지냈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축출된 이후,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과 홍문관 교리(校理), 사간원 정언, 사간원 헌납(獻納) 등의 청요직(淸要職)에 중용되었다.[『월사집(月沙集)』 권47 「장령정공묘갈명(掌令鄭公墓碣銘)」 이하 「정희등묘갈명」] 1541년(중종 36) 당시 흉황(凶荒)이 매우 심하였는데, 그는 사헌부 지평(持平)으로서 실농(失農)이 제일 심한 고을의 구황(救荒)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어사(御使)로 차출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6년 3월 10일] 1543년(중종 38)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8년 6월 21일, 중종 38년 8월 10일] 이때에도 그는 외방(外方)의 수령들이 공채(公債)를 제대로 받아들이는가, 또는 이들이 풍흉(豐凶)을 헤아리지 않고 가난한 백성에게 함부로 공채를 받아들이는 가 등의 폐단을 조사하기 위하여 어사로 파견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8년 12월 10일] 1544년(중종 39)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필선(右弼善)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9년 4월 3일, 중종 39년 4월 22일]
[인종~명종 시대 활동]
1544년(인종 즉위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은 새로운 개혁 정치를 하고자 사림파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그러면서 윤임의 대윤(大尹)과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小尹)이 대립하게 되었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와 경원대군(慶原大君 : 명종)이 소윤인 윤원형의 배경이 되었다.
1545년(인종 1) 5월 사헌부 장령(掌令) 정희등과 사헌부 대사헌(大司憲)민제인(閔齊仁), 사헌부 집의(執義)송희규(宋希奎) 등이 1519년(중종 14)에 발생하였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趙光祖)를 신원(伸寃)시켜 달라고 차자(箚子)를 올렸다.[『인종실록(仁宗實錄)』 인종 1년 5월 12일, 인종 1년 5월 21일] 그러자 인종은 “이 차자를 보니, 논한 바가 지극히 마땅하다. 조광조 등의 복직은 공론에서 나온 것인 줄 알고 있다. 다만 선왕(先王)께서 이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감히 가볍게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인종실록』 인종 1년 5월 21일] 인종 때 사헌부에서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한 것은 이미 사림파가 조정에 많이 등용되었기 때문인데, 정희등은 조광조의 제자는 아니었으나 사림파에 속해 있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7월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12세의 어린 동생 명종이 즉위하였다. 그러자 문정왕후의 동생인 소윤파의 윤원형 일당이 정권을 잡았다. 이에 소윤파의 윤원형·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 등은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대윤파의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즉위년 9월 11일] 그러자 사헌부 장령 정희등이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8월 22일] 이 일로 정희등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평안도 용천(龍川)으로 유배를 가던 가운데 1545년(명종 즉위년) 9월 13일 저녁 서울 근교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는 40세였다.[『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9월 21일, 명종 3년 2월 12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0]
한편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을 계기로 송인수(宋麟壽) 등이 처형되는 <정미사화(丁未士禍)>가 일어나면서, 정희등에게 죄가 추가되었고, 이에 남은 가산을 몰수당했다.[『명종실록』 명종 3년 3월 11일, 『연려실기술』 권10] 그러다가 정희등은 1568년(선조 1) 신원되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1년 2월 24일, 선조 1년 2월 25일, 『연려실기술』 권10] 그리고 1744년(영조 20) 정문(旌門)하고 증직(贈職)되었으며, 1788년(정조 12) ‘의민(毅愍)’의 시호를 받았다.[『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20년 11월 23일,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10년 2월 26일, 정조 10년 3월 14일, 정조 12년 4월 6일]
[을사사화와 정희등]
1545년(명종 즉위년) 7월 인종이 왕위에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병으로 돌아가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문정왕후의 밀지(密旨)를 받은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은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 정순붕과 호조 판서 임백령(林百齡), 병조 판서 이기, 공조 판서 허자(許磁) 등과 결탁하여 이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문정왕후의 언문 편지에는, “인종의 외숙 윤임과 좌의정 유관, 이조 판서 유인숙 3인에게 죄를 주도록 하라.”고 쓰여 있었다. 윤원형은 그 밀지를 사헌부 대사헌 민제인과 대사간(大司諫)김광준(金光準)에게 전해 주면서, 먼저 대간(臺諫)에서 그들을 탄핵하도록 하였다. 다음날 양사(兩司)가 중학재(中學齋 : 4학(學)의 하나)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대사헌 민제인과 대사간 김광준이 대간들에게 문정왕후의 밀지를 보여주고 윤임 등의 3인을 탄핵하자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좌중의 대간들이 모두 반대하기를, “이것은 간특한 자가 화를 얽어서 만들려는 수단이다. 우리가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바로 그 술책 가운데 빠지는 것이니, 우리는 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혹자는 앉고 혹자는 일어서서 노기가 등등하였다. 장령 정희등은, “조정의 중대한 일을 논핵하는데, 어찌 대비의 내지(內旨)를 가지고 한단 말이냐.”며, 극력 반대하였다. 대사헌 민제인이 하루 종일 대비의 밀지에 따르기를 간청했으나, 끝내 아무도 따르지 않아 그대로 헤어졌다.
그날 밤 한밤중에 윤원형이 백관을 충순당(忠順堂)에 소집하였다. 소윤파의 정순붕, 임백령, 이기, 허자 등이 대윤파의 윤임, 유관, 유인숙의 죄를 탄핵하니, 좌찬성(左贊成)이언적(李彦迪)이 반대하기를, “일은 반드시 광명정대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인데, 장차 사림(士林)에 화(禍)가 미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그러자 어린 명종 옆에 앉아 있던 문정왕후가 크게 화를 내면서, “사림에게 화가 생기는 것을 꺼려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고, 이들 3인을 즉시 귀양 보내도록 하였다.[『동각잡기(東閣雜記)』 하권] 결국 이들 세 사람은 인종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귀양 가서 처형되었고, 정희등과 박광우(朴光佑) 등도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명종이 어렸으므로, 어머니 문정왕후가 병조 판서 이기와 상의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문정왕후는 양사(兩司)가 대윤파를 제거하는 것을 반대하였다는 보고를 자세히 받았으나, 언관(言官) 모두를 죄 주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백인걸(白仁傑)만 구속하고, 정희등 등은 본직에서 교체하였다. 그러나 윤임의 사위 이덕응(李德應)이 붙잡혀 와서 문초를 받다가 “박광우와 정희등은 중학재에서 첫 번 회합을 가진 뒤에 바로 유관의 집으로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옥관(獄官)들이 이덕응을 다시 문초하기를, “네가 어느 달 어느 날 소격동(昭格洞)에서 내려오다가 길에서 대간들을 보았다는데, 그게 누구냐.” 하였고, 이에 이덕응이 “장령 정희등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옥관들이 “역적의 입에서 증거가 나왔다.”며, 임금의 명을 받아 가지고 정희등과 박광우 등 언관들을 모두 체포하여 문초하였다.
중학재에서 회합이 끝난 후, 박광우(朴光佑)와 정희등(鄭希登)이 갔던 소격동과 장의동(壯義洞)은 바로 유관(柳灌)과 윤임(尹任)이 사는 동네였다. 그때 윤원형 일파는 그들을 감시하다가, 박광우와 정희등이 중학재에서 들은 말을 유관과 윤임에게 누설하였을까봐 그들을 체포하였던 것이다. 이들 외에 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은 모두 귀양만 갔다.[『연려실기술』 권10, 『동각잡기』 하권]
당시 고문의 강도가 상당하였는데, 정희등은 가까이에 인종의 관이 있다며 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다.[『연려실기술』 권10, 『장빈호찬(長貧胡撰)』] 정희등에게는 노모가 있었는데, 정희등이 심문 후 귀양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보기 위하여 성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정희등이 죽었다는 말이 들리자, 종자(從子)는 돌아가려고 하고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면서, 노상에서 방황하며 통곡하였다. 이때 길가는 이들치고 가슴 아프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9월 11일]
[성품과 일화]
정희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됨이 뜻이 높고 성품이 결백하여 남다른 기질이 있었다. 그릇이 크며 지조가 굳세고 발랐는데, 어릴 적에 장난을 칠 때에도 올바른 일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평소에 강개하고 호매하여 곧은 절의를 세운 옛사람을 사모하고 그들의 언행을 벽에 써 붙여 놓고 보기를 즐겼다. 남을 대하여 직접 그의 잘못을 책하고 숨겨주지 아니하며, 옳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일지라도 좋지 않게 보았기 때문에 모두 그를 두렵게 생각하였다.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에, 척신 김안로에게 잘못 보여 오랫동안 낭관으로 머물러 있었다.[『연려실기술』 10권]
그의 곧은 성품은 여러 일화로 전해진다. 아내를 잃고 홀아비로 있었는데, 김안로가 사위를 삼으려고 하자, 그가 “차라리 종신토록 장가를 들지 않을지언정 그 집에는 장가들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진복창(陳復昌)을 힘껏 천거하자 그가 대항해 말하기를, “이 자는 간괴(奸魁)이다.” 하고는 그 사람이 앉았던 자리를 걷어 태워버리기도 하였다. 이기가 찬성이 되었을 때, 정희등이 주도가 되어 이기를 논핵(論劾)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정순붕이 발끈 화를 내고 이기와 함께 정희등을 해치려고 모의하였으나 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윤원형은 평소 정희등의 재망(才望)을 중히 여겨 편지를 보내 함께 일을 하자며 자신의 중한 신분을 이용해 꾀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는 답장을 하지 않고 욕을 해댔다.「정희등묘갈명」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을 때 인종이 세자로 있었는데, 정희등을 ‘『소학(小學)』으로써 자신을 단속하여 어버이를 섬기면 지극히 훌륭한 행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듣고서는 날마다 퇴선(退膳 : 임금의 밥상에서 물린 음식)을 그의 집으로 보냈다. 또 특별히 어제(御製) 『대학연의(大學衍義)』를 하사하기도 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을사사화 때 노비 박성번(朴成蕃)이 정희등과 같이 붙잡혀 가서 고문을 당할 때 정희등의 높은 의기(意氣)에 탄복하여, “정희등과 한 자리에서 고문을 받았으니, 비록 죽더라도 영광스럽다.”고 한다. 이덕응이 허위 자백을 한 뒤에 박성번에게, “배 한 개만 달라.”고 사정을 하였는데, 박성번의 집안사람이 배 갖다 준 것을 보고 이덕응이 하나만 달라고 사정한 것이었다. 박성번이 배를 주지 않고 꾸짖기를, “평생에 글을 읽어서 배운 것이 무엇이냐. 너의 입으로 허위 자백을 해서 집안이 결단 났을 뿐만 아니라 선비들도 일망타진 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배 두어 개를 사령을 시켜서 정희등에게 주며, “죽는 마당에도 지조가 변하지 아니하니, 우러러 매우 존경합니다.”고 하였다.[『유분록(幽憤錄)』]
정희등은 문초를 받을 때, 연달아 세 차례의 고문을 당했는데도 죽지 않고 숨이 붙어 있어서 귀양을 가게 됐다. 정희등은 평안도 용천(龍泉)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때 정희등은 자기 발로 걸어갈 수 없어서 소달구지에 실려서 가다가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길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관리가 정희등의 가산을 장부에 올려 모두 관가에 몰수하였기 때문에 집안사람은 돌아온 정희등의 시체를 염습(斂襲)할 비용조차 없었으므로 시체 옆에서 울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날 밤 한밤중에 서울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상하고 무명 3백여 자의 값을 거두어 주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묻지 말라.” 하고 떠났다. 장사 지내는 날 영남 지방에서 선비 1백여 명이 무덤 앞에 와서 울었는데, 모두 부의(賻儀)를 하고 이름을 말하지 않고 떠났다.[『연려실기술』 권10]
[묘소와 후손]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 있고,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정희등묘갈명」]
첫째 부인은 진주 유씨(晉州柳氏)인데, 자녀는 딸 둘을 두었다. 장녀는 승지(承旨)윤주(尹澍)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사인(士人) 윤인흡(尹仁洽)의 처가 되었다. 둘째 부인 예안 이씨(禮安李氏)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정눌(鄭訥)은 무과에 급제하여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냈고, 차남 정근(鄭謹)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를 지냈다. 장녀는 만호(萬戶) 유의민(柳義民)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봉사(奉事)이정우(李庭友)에게 출가했다.[「정희등묘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