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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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鄭源)

서지사항
항목명정원(鄭源)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정치·행정가/관료/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495년(연산군 1)∼1546년(명종 1) = 52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인종(仁宗) 때의 문신.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중달(仲達) 또는 중원(仲遠)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문화현감(文化縣監) 정유강(鄭有綱)이고, 어머니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관찰사(觀察使)신찬(申澯)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청주목사(行淸州牧使) 정결(鄭潔)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 정자순(鄭子順)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기도 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 일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중종 시대 활동]
1519년(중종 14) 문과(文科) 별시(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에 분속(分屬)되었다가 곧바로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추천을 받았다. 그러나 비답이 하달되기도 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조광조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배척되었다. 한 해가 넘어서야 비로소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후 탄핵을 받아 체차되었다. 이후 관례에 따라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공조 좌랑(佐郞)과 형조 좌랑을 거쳐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로 나갔다. 이때부터 중앙과 외방을 오고 갔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47 「정원」 이하 「정원행장」으로 약칭]

1524년(중종 19) 9월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강릉훈도(江陵訓導) 정원(鄭源)은 평생 품은 마음이 매우 간사하므로 훈도가 미관(微官)이기는 하나 맡길 수 없습니다. 더구나 강릉은 유생(儒生)이 많은 곳이니, 이 사람이 이끌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중종이 윤허하지 않았으나, 그해 10월 홍언필(洪彦弼)과 정응린(鄭應麟) 등이 다시 논하는 바람에 체직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19년 9월 30일, 중종 19년 10월 2일] 1528년(중종 23) 형조 좌랑이 되었으나, 그해 1월 사헌부(司憲府)에서 “형조 좌랑 정원은 평소 물의가 있어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에 합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탄핵하였다.[『중종실록』 중종 23년 1월 18일] 중종이 “정원이 어찌 형조 좌랑이 못되겠는가?”라며 그를 옹호하였으나, 1529년(중종 24) 4월 대간이 거듭 아뢰는 바람에 결국 그를 체직시켰다.[『중종실록』 중종 12년 1월 18일, 중종 24년 4월 17일]

1537년(중종 32) 7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都事)로 있던 중 또다시 사간원의 탄핵으로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었다. 이때 사간원에서는 “정원은 성격이 본래 간사하고 교활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뜻을 잃은 것을 가지고 항상 분독(忿毒)을 품고 조정의 일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 하고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한어(漢語)를 잘하였으므로 전에 질정관으로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들과 직접 매매를 하였는데 그 행위가 통사보다 심했습니다. 그가 이익을 다툴 때에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그 자제를 집 밖으로 끌어내서 치고 때려 욕보이게까지 하였으므로 일행들이 놀라서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소행도 더럽고 천하니 단 하루도 조정의 반열에 끼어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중종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중종실록』 중종 32년 7월 14일]

이후 정원을 수용한다는 의논이 있었으나, 또 다시 김안로(金安老)에게 미움을 사는 바람에 곤양군수(昆陽郡守)로 쫓겨났다. 한 해가 넘어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돌아와 무덤의 아래에다 여막(廬幕)을 지어놓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자 서해(西海) 가에 집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일생을 끝마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글을 읽고 도(道)를 강론하였으며, 여가에는 오직 백로와 짝을 지어 놀면서 담담하게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정원행장」]

중종 말년에 이르러 왕의 마음이 풀리자, 비로소 조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세자인 인종의 학문이 날로 진취되었으므로 조정에서 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선비를 선발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기려고 하였다.[「정원행장」] 1542년(중종 37) 11월 그가 세자시강원 좌보덕(左輔德)이 되어 3년간 역임하였다.[『중종실록』 중종 37년 11월 12일, 「정원행장」] 1543년(중종 38) 8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가, 12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8년 8월 12일, 중종 38년 12월 27일] 1544년(중종 39) 6월 수은어사(搜銀御史)가 되었으며, 그해 9월에는 재상어사(災傷御史)가 되어 경상도 지방의 풍재(風災) 현황을 조사하였다.[『중종실록』 중종 39년 6월 5일, 중종 39년 9월 18일] 11월에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자, 군기시(軍器寺) 정(正)인 그와 사재감(司宰監) 정인 김서성(金瑞星) 등이 낭관으로 임명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6년 11월 15일]

[인종~명종 시대 활동]
1544년(인종 즉위년) 11월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의 윤임(尹任)이 정권을 잡고 신진 사류(士類)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정원은 당시 신진 사류 가운데 가장 명망이 높았으므로, 청요직(淸要職)에 발탁되었다.[「정원행장」] 1545년(인종 1) 윤1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사간원 사간으로 전직되었고, 성균관 전적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인종실록(仁宗實錄)』 인종 1년 윤1월 23일, 인종 1년 5월 12일, 「정원행장」] 1545년(인종 1)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승지로서 개연히 왕을 바로 인도하여 교화를 일으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여겼다. 이에 동지들과 더불어 힘과 마음을 합쳐 새 정사를 보필하여 알면서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모두 개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정원행장」] 그러나 인종은 왕위에 오른 지 8개월만인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545년(명종 즉위년) 7월 12세의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문정대비(文貞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때 소윤(小尹)인 문정대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잡고, 대윤의 윤임 일파를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명종이 즉위할 때 승정원 좌부승지 정원은 왕을 옹립한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즉위년 8월 30일] 그러나 1546년(명종 1) <을사사화>가 일어나서 대윤의 윤임과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이 죽음을 당하자, 그해 8월 좌부승지 정원도 대윤 일파로 몰려 공신호와 관직을 삭탈당하고 평안도 창성(昌盛)에 유배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년 8월 5일, 명종 1년 8월 6일] 그리고 결국 유인숙 일당으로 몰려서, 1546년 11월 2일 유배지 창성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52세였다.[「정원행장」]

[<을사사화>와 정원]
1544년(인종 즉위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였는데, 그때 인종의 나이가 30세였다. 당시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은 병약한 그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고 사림파(士林派)의 선비를 많이 등용하였다. 이때 정원도 발탁되어,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홍문관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정원행장」] 한편 중종은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를 왕후로 책봉하였으며 그로부터 명종을 낳았다. 중종 말년에 정권을 잡은 김안로가 세자인 인종을 보호하고자, 문정왕후와 그의 동생 윤원형을 견제하면서 윤임과 윤원형은 서로 대립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왕위에 즉위한지 8개월 만인 1545년 7월 병으로 승하하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해 8월 문정왕후의 밀지(密旨)를 받은 윤원형은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정순붕(鄭順朋)과 호조 판서(判書)임백령(林百齡), 병조 판서 이기(李芑), 공조 판서 허자(許磁) 등과 결탁하여,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좌의정 유관ㆍ이조판서 유인숙 3인을 귀양을 보냈다가 죽였다. 그리고 대윤파인 정희등(鄭希登), 나숙(羅淑), 박광우(朴光佑) 등의 10여 명도 죽였는데,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였다. 이때 정원도 같은 파로 몰려 세 대신(大臣)을 소급해 처벌하던 날 관작을 삭탈당하고 축출되었다.[「정원행장」]

홍언필 등은 정원이 5촌 조카인 정희등과 가까웠다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정원은 정희등의 행위를 모를 리 없다는 이유로 추국의 대상이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9월 9일] 그리고 체직 및 삭탈관직되었다.[『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9월 10일, 명종 위년 10월 7일] 그리고 얼마 후인 1546년(명종 1) 8월 정원은 창성(昌城)으로 유배를 갔는데, 그해 10월 사간원 대사간 권응정(權應挺), 사헌부 집의 원계검(元繼儉) 등이 “지난날 흉역(凶逆)의 무리가 윤임·유관·유인숙과 결탁하여 은밀히 역모를 꾀하면서 택현설(擇賢說)을 외쳤으니, 그들의 음흉한 정적(情迹)이 환히 드러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정원은 유관과 한마을에 살면서 조석으로 서로 만나 음모를 함께 의논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인종께서 위중하실 때 승지로서 승정원에 있으면서 공공연히 동료들에게 ‘상의 병세가 위독하니 인심의 촉망이 누구에게로 돌아가겠는가?’ 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사를 시험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율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라며 탄핵하였다. 이에 왕은 모두 사사할 것을 명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년 10월 25일]

정원은 사약을 받을 때에 목욕 재래를 하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죽음에 임했다. 조금도 원망하는 빛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매우 애통해 하였다. 11월 2일에 향년 52세로 세상을 떠났다.[「정원행장」]

[성품과 일화]
정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 됨됨이가 단정하고 정중하였으며, 고아하면서도 맑았다. 정직하고 풍채가 고상하여 속태(俗態)를 벗어나 마치 겨울 산마루에 있는 외로운 소나무처럼 혼자 우뚝 빼어났다.[「정원행장」]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수려하였으며 천성적으로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독서할 줄을 알자 대의(大義)를 깨달았고 행동이 엄정하여 함부로 웃거나 말하지 않았으니 엄연한 성인(成人)과 같았다. 할아버지가 항상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우리 가문은 반드시 이 아이가 일으킬 것이다.”고 하였다. 장성하자 학문을 독실하게 하고 행실을 닦는데 주력하여 덕업(德業)이 날로 진취하였다.[「정원행장」]

일찍이 조광조의 문하에 찾아가 학문하는 큰 방도를 들어보고 나서 각고의 공부를 씩씩하게 가다듬어 나가고 용감하게 실천하였다. 원대한 것을 사모하여 소성(小成)에 안주하지 않아 속루(俗累)를 털어버리고 고명(高明)에다 마음을 두었으므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강개한 기절이 있어 애락(哀樂)이나 시비(是非)가 닥쳐도 전혀 마음을 동요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켰으므로 위무(威武)로도 그 기절을 빼앗을 수 없었다. 조정에 있거나 가정에 있을 때나, 백성을 대하거나 일에 임할 때에는 잠깐의 사이라도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고 제사를 받들 때에는 지극하게 정성과 예절을 다하였고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경건히 하였으며 반드시 신중히 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본인의 녹봉을 가지고 봉양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사모하는 애통이 종신토록 변하지 않았는데 한 가지 맛있는 음식물을 얻을 때마다 오열하고 눈물을 흘리며 먹지 못하였다. 맏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추모해 마지않았고 그의 자식들을 자신의 자식과 똑같이 어루만져 기르고 가르쳐 혼인을 시켜 이룩한 바가 방정하고 엄숙하였다.[「정원행장」]

악을 미워한 나머지 남의 과실을 용납하지 못하였으므로, 상대의 면전에 대고 질책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사룡(鄭士龍)과 함께 명(明)나라에 사절(使節)로 간 적이 있는데, 그의 사람됨을 좋아하지 않은 나머지 만 리 길을 왕복하면서 서로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선비를 사랑하고 손님을 좋아하는 마음이 천성으로 타고나 친한 벗이 찾아올 때마다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였다. 술을 조금 마시다가 취하면 번번이 쓰러져 자면서도 5촌 조카 정희등으로 하여금 자리를 맡아 손님을 접대하도록 하여 환락을 다한 다음에 파하도록 하였다. 정희등은 그를 부모처럼 섬기어 그의 집에 이르면 매우 공순하게 자제의 예를 수행한다고 전해진다.[「정원행장」]

[묘소와 후손]
1546년(명종 2) 봄에 통진(通津) 고양포(高陽浦) 임좌 병향(壬坐丙向)의 산으로 반장하였다.[「정원행장」] 이기설(李基卨)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정원행장」]

첫째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판관(判官)최인복(崔仁福)의 딸이고, 둘째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정승근(鄭承謹)의 딸이며, 셋째 부인 조씨(趙氏)는 장단부사(長湍府使) 조세정(趙世楨)의 딸이고, 넷째 부인 권씨(權氏)는 권우난(權遇鸞)의 딸이다.[『방목』] 모두 아들이 없었고, 셋째 부인이 낳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소격서(昭格署) 참봉부군(參奉府君) 이지남(李至男)의 처가 되었다.[「정원행장」]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전고대방(典故大方)』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충재집(冲齋集)』
■ 『학포집(學圃集)』
■ 『정암집(靜菴集)』
■ 『사재집(思齋集)』
■ 『송재집(松齋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면앙집(俛仰集)』
■ 『미암집(眉巖集)』
■ 『소재집(穌齋集)』
■ 『청강집(淸江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유천유고(柳川遺稿)』
■ 『어우집(於于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용주유고(龍洲遺稿)』
■ 『목재집(木齋集)』
■ 『지호집(芝湖集)』
■ 『야계집(倻溪集)』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