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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1년(선조 4)∼1626년(인조 4) = 5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 등을 지냈고,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자는 익지(翼之)이고, 호는 휴옹(休翁), 또는 휴헌(休軒), 휴암(休菴)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정사신(鄭思愼)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사직(司直) 안혼(安混)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승지에 증직된 정린수(鄭麟壽)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한성참군(漢城參軍)을 지낸 정수후(鄭守厚)이다. 광해군(光海君) 대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는데, 이때 얻은 병으로 결국 세상을 떠났다.
[선조 시대 활동]
1589년(선조 22)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으며, 1597년(선조 30)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방목(榜目)』] 그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되었으며, 관례에 따라 예조 좌랑(佐郞)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30년 8월 15일, 선조 30년 12월 29일, 『계곡집(谿谷集)』 권12 「가선대부행홍문관부제학겸경연참찬관정공묘갈명(嘉善大夫行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鄭公墓碣銘)」 이하 「정홍익묘갈명」으로 약칭] 1598년(선조 31)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가 되었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를 거쳐, 병조 좌랑에 임명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1년 2월 20일, 선조 31년 9월 26일, 선조 31년 10월 2일] 1599년(선조 32)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으며, 그 뒤에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에 임명되었고, 곧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가게 되었으나 병 때문에 부임하지 못했다.[『선조실록』 선조 32년 3월 5일, 「정홍익묘갈명」] 이후 형조 좌랑을 거쳐 1601년(선조 34) 병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4년 1월 22일, 「정홍익묘갈명」]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體察使)가 되었을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와 평안도 등을 순찰(巡察)하였으며,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황해도를 염찰(廉察)하기도 하였다.[「정홍익묘갈명」]
1602년(선조 35)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이어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5년 1월 7일, 선조 35년 윤2월 3일] 이때 대북파(大北派)의 영수이던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정인홍(鄭仁弘)이 <기축옥사(己丑獄死)>와 관련하여 서인(西人)이던 성혼(成渾)을 탄핵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4년 1월 15일] 그러자 정홍익(鄭弘翼)이 성혼이 서인의 영수이던 정철과 교분이 두터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등한 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며 적극 변론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5년 윤2월 8일] 이 일로 정홍익은 당시 권신들의 뜻을 거스르면서 체직되어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5년 윤2월 9일, 「정홍익묘갈명」] 그리고 얼마 뒤에 단천(端川)의 채은관(採銀官)으로 좌천되었는데, 이후 어머니와 아버지의 상(喪)을 연달아 당해 무덤 옆에서 시묘살이를 하느라고 몸이 상해 거의 죽을 뻔하였다. 상례(喪禮)를 치른 후 1606년(선조 39) 어천찰방(魚川察訪)에 임명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9년 9월 24일, 「정홍익묘갈명」]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즉위년 7월 13일, 광해군 즉위년 7월 16일] 1610년(광해군 2)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 윤3월 22일, 광해군 2년 6월 7일] 1612년(광해군 4)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어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1월 11일, 광해군 4년 2월 12일] 얼마 후 명(明)나라 사신의 평양영위사(平壤迎慰使)로 차임되었으나, 1년이 지나서 파직되어 돌아왔다.[『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8월 5일]
1617년(광해군 9) 겨울에 정권을 잡은 대북파의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기 위하여 ‘폐모론’을 일으켰다. 당시 서인들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이때 정홍익도 앞장서서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그해 12월 진도(珍島)에 위리안치 되었으며, 그 후 길주(吉州)와 종성(鐘城)으로 다시 유배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 11월 25일, 광해군 9년 11월 26일, 광해군 9년 11월 28일, 광해군 9년 12월 10일, 광해군 9년 12월 11일, 광해군 9년 12월 16일, 광해군 9년 12월 21일]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서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제일 먼저 추천되어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겼는데, 오랜 귀양살이에서 얻은 풍토병이 더욱 악화되어 부임하지 못했다.[『인조실록』 인조 1년 3월 17일, 인조 4년 1월 15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년 3월 17일, 「정홍익묘갈명」] 얼마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1625년(인조 3)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와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인조실록』 인조 4년 1월 15일, 『승정원일기』 인조 1년 5월 1일, 인조 1년 5월 3일, 인조 3년 2월 12일, 「정홍익묘갈명」] 그러나 그는 병 때문에 모든 관직에 부임하지 못하다가, 1626년(인조 4) 1월 마침내 수토병(水土病)으로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6세였다.[「정홍익묘갈명」] 집이 가난하여 염빈(殮殯)을 할 수 없었으므로, 인조가 귀장(歸葬)할 때 군인들이 큰길 근처에서 호송하도록 하고, 또 장례 물품과 석회(石灰)를 지급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인조 4년 1월 15일]
한편 1658년(효종 9) 5월 참찬관(參贊官)조복양(趙復陽)이 정홍익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효종실록(孝宗實錄)』 효종 9년 5월 3일] 그러나 이듬해인 1659년(효종 10) 2월 사헌부에서 시호는 정2품 이상에게만 내리는 것인데, 정홍익은 종2품이라 절차상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그러나 “정홍익의 충절은 본디 추증함이 합당하니, 해조로 하여금 다시 여쭈어 거행하게 하소서.”하였다.[『효종실록』 효종 10년 2월 27일] 이에 절차에 따라 정2품의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문집으로는 『휴옹집(休翁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정홍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인품이 단아하고 지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 지었다.[『인조실록』 인조 4년 1월 15일] 술을 마신 뒤에는 해학을 좋아하여 곧잘 재미있는 농담을 잘 하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남달리 청렴결백하여 평생 단정하고 확고하게 자기의 지조를 지키고 일찍이 남을 따라 그 뜻을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정홍익묘갈명」]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려고 백관(百官)들을 모아놓고서는 형틀과 법망(法網)을 갖추고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경사(卿士)와 대부(大夫)들이 모두 두려워서 억지로 그 뜻에 따랐으며, 평소 강직하다고 이름난 자들도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제대로 다하지 못했다. 이때 정도(正道)를 지키며 흔들리지 않고 말의 뜻이 늠름한 자는 겨우 서너 명이 있었는데, 정홍익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의논이 올라가자 광해군이 크게 화를 내어 그는 결국 유배를 떠났다. 이후 종성의 유배소에서 6년 동안 지내면서 황토병을 얻어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이 어두워졌다고 전해진다.[「정홍익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장지동에 있고, 계곡(溪谷) 장유(張維)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정홍익묘갈명」] 함경도 북청(北靑)의 노덕서원(老德書院)과 종성(鐘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 경상도 진도(珍島)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9, 권50]
첫째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진사(進士) 이혼(李渾)의 딸인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둘째 부인 강릉 최씨(江陵崔氏)는 영안군(寧安君) 최산립(崔山立)의 딸인데, 딸 하나를 낳았으며, 사인(士人) 목돈선(睦敦善)의 처가 되었다.[「정홍익묘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