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00년(정종 2)∼1453년(단종 1) = 54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 때의 문신. 이조 정랑(正郞) 등을 역임하였고, 의정부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용궁(龍宮)이다. 아버지는 정구령(鄭龜齡)이고, 어머니 상주 박씨(尙州朴氏)는 박문로(朴文老)의 딸이다. 동래군(東萊君)의 정난종(鄭蘭宗)의 아버지이고,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할아버지이다. 직계 자손 중에서 좌의정 정창연(鄭昌衍)과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를 비롯하여 13명의 재상이 나왔다.
[세종 시대 활동]
1420년(세종 2)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고, 바로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었고, 1425년(세종 7) 10월 사헌부 정언(正言)이 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 7년 10월 24일] 이어 이조 낭관(郎官)과 예조 낭관, 형조 낭관을 역임하고, 1429년(세종 11) 3월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가 되어 강원도 회양(淮陽)에 가서 강무장(講武場)에서 사렵(私獵)한 사람을 국문(鞫問)하였다.[『세종실록』 세종 11년 3월 9일] 1432년(세종 14) 1월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다가, 1442년(세종 24) 7월 강원도경력(江原道經歷)이 되었으며, 의정부 검상(檢詳)을 거쳐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세종실록』 세종 14년 1월 15일, 세종 24년 7월 12일] 1446년(세종 28) 10월 수(守)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세종실록』 세종 28년 10월 15일]
1448년(세종 30) 4월 수 예문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는데, 경상도 삼포(三浦)의 왜관(倭館)에 가서 일본 상인들이 가지고 온 단목(丹木)과 동(銅), 납(鑞), 철(鐵)의 품질 등급을 매겨서 거래할 때 세금을 거두었다.[『세종실록』 세종 30년 4월 6일] 당시 왜관에서는 관리의 입회 아래 대마도(對馬島)의 일본 상인과 동래(東萊)의 조선 상인들이 거래하였는데, 관리는 등급을 매기고 양쪽으로부터 가격의 1할을 세금으로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원하여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되었으나,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다. 1453년(단종 1) 병으로 고향인 용궁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54세였다.[『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에 있는데,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정문익공유고』] 경상도의 마산리사(馬山里社)에 제향되었고, 경상도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손자 정광필 등과 함께 봉안(奉安)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4]
부인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상호군(上護軍) 이백인(李伯仁)의 딸인데, 자녀는 5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생원(生員) 정난손(鄭蘭孫)이고, 차남은 정난수(鄭蘭秀), 3남은 정난종(鄭蘭宗)이고, 4남은 생원 정난원(鄭蘭元)이며, 5남은 정난무(鄭蘭茂)이다. 장녀는 김정용(金貞用)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부록(部錄) 조원우(趙元祐)에게 시집갔다.[『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