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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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종(鄭蘭宗)

서지사항
항목명정난종(鄭蘭宗)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정치·행정가/관료/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433년(세종 15)∼1489년(성종 20) = 57세]. 조선 전기 세조(世祖)~성종(成宗) 때의 문신. 문장가. 서예가. 의정부 우참찬(右參贊)과 이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고,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다. 자는 국형(國馨)이고, 호는 허백당(虛白堂)이다. 봉작은 동래군(東萊君)이며,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정사(鄭賜)이고, 어머니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장사랑(將仕郞) 이백인(李伯仁)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정귀령(鄭龜齡)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정해(鄭諧)이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아버지이고, 문학가 정사룡(鄭士龍)의 할아버지이며,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증조할아버지이다.

[세조~예종 시대 활동]
1456년(세조 2) 사마시(司馬試)의 생원(生員)진사(進士) 양과에 합격하고,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으며, 글씨를 잘 썼으므로 승문원 정자(正字)를 겸임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20년 2월 13일,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14] 1459년(세조 5)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하였고, 이후 통례문(通禮門) 봉례랑(奉禮郞)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좌랑(佐郞)이 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그리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이 되었다가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는데, 이때 사간원(司諫院)에서 정난종(鄭蘭宗)이 어세겸(魚世謙) 등과 함께 여기(女妓)를 불러 술을 마셨다며 탄핵하여 태(笞) 40대의 처벌을 받았다.[『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8년 4월 17일]

1462년(세조 8) 5월 세조는 문학(文學)을 장려하기 위하여 정난종과 민수(閔粹) 등으로 하여금 예문관의 관직을 겸임하면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경서(經書)를 친강(親講)하게 하였고, 또 한 달에 2번씩 부시(賦詩)하게 하였다[『세조실록』 세조 8년 5월 17일, 세조 8년 6월 10일] 이는 세조가 <사육신사건(死六臣事件)>으로 집현전(集賢殿)을 폐지하면서 집현전 학사(學士) 가운데 재행(才行)이 뛰어난 자가 오로지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던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도 폐지되었고, 이에 문학의 실력이 뒤떨어졌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조는 학술이 있는 사람들을 뽑아 예문관의 관직을 겸임하면서도 공부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1463년(세조 9) 세자시강원 문학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정랑을 거쳐 예조 정랑으로 전임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이듬해인 1464년(세조 10) 7월에는 문관 2품 이하가 치룬 중시(重試)에서 2등을 차지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세조실록』 세조 10년 7월 23일] 1465년(세조 11) 종부시(宗簿寺) 소윤(少尹)에 임명되었고, 1466년(세조 12) 윤3월 예문관 전한(典翰)을 겸임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국조인물고』 권14] 그 해에 세조가 실시한 중시에서 3등 5위, 발영시(拔英試)에서 2등 3위, 등준시(登俊試)에서 3등 2위를 차지하였는데, 당시 34세였다.[『세조실록』 세조 12년 5월 16일, 세조 12년 7월 25일, 『방목』] 세조가 특별히 시행한 발영시와 등준시에서 정난종이 연달아 선발되자 세조는 그를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하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시켰다.[『세조실록』 세조 12년 5월 7일, 세조 12년 5월 8일, 『국조인물고』 권14] 이어 정난종은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으며, 곧 예조 참판(參判)에 임명되면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다.[『세조실록』 세조 12년 5월 27일, 세조 12년 6월 22일, 세조 12년 7월 25일] 그리고 그해 9월 형조 참판으로 전임되었다.[『세조실록』 세조 12년 9월 11일]

1467년(세조 13) 1월 우찬성(右贊成) 조석문(曹錫文)을 경상도체찰사(慶尙道體察使)로, 정난종을 부사(副使)로 삼아 경상도 곳곳에 진(鎭)과 제방을 설치하는 현장에 가서 그 설치가 타당한지 여부를 직접 조사하게 하였다.[『세조실록』 세조 13년 1월 14일] 그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이 일어나자, 정난종은 한치의(韓致義) 및 신말주(申末舟) 등과 함께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수성도정(壽城都正) 이창(李昌)과 함께 한성부(漢城府)를 지켰다.[『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그리고 7월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임명되어 황해도의 군정(軍丁)을 조발(調發)하였다.[『세조실록』 세조 13년 7월 4일, 『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1468년(예종 즉위년) 9월 세조가 죽고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10월 호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예종실록(睿宗實錄)』 예종 즉위년 10월 20일] 이후 세조의 국장(國葬)에 참여한 관리들에게 1품계씩 가자(加資)하였는데, 이때 정난종도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품되었다.[『예종실록』 예종 즉위년 12월 13일, 『국조인물고』 권14] 이듬해인 1469년(예종 1) 1월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明)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다.[『예종실록』 예종 1년 1월 1일] 그해 3월 <남이(南怡)의 모반 사건>에 영의정 강순(康純)이 연루되자 호조도 연좌되면서 호조의 겸판서(兼判書) 제도가 혁파(革罷)되었다. 이때 정난종은 남이의 모반 사건에 관련된 이들의 재산을 적몰하는 책임자였는데, 강순의 첩 금생(今生)의 집도 적몰 대상이었다. 그런데 금생이 강순과 이혼한 지 오래됐으며 그 집은 본인이 산 것이라 주장한 데다가 또 강순의 부인도 이에 동의하자 금생을 연좌에서 면해주었다. 그러나 한명회(韓明澮)가 금생은 개성군(開城君) 최유(崔濡)의 딸로 강순은 그를 버린 적이 없다며 다시 국문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금생은 반역죄에 연좌되었고, 호조 참판 정난종과 호조 참의 강노(姜老)는 좌천되어 호분위(虎賁衛)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예종실록』 예종 1년 3월 11일] 이어 4월 춘추관(春秋館)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여 『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編纂)에 참여하였으며, 8월에는 이조 참판이 되었다[『예종실록』 예종 1년 4월 1일, 예종 1년 8월 7일]

[성종 시대 활동]
1469년(성종 즉위년) 11월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20세의 나이로 죽고, 성종(成宗)이 겨우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세조의 왕비인 자성대비(慈聖大妃 : 정희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이때 명나라에서 예종에게 사제(賜祭)하고 성종의 승습(承襲)을 허락하는 고명을 보내왔는데, 조선에서 이에 대한 사례로 명나라에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를 파견하였다. 1470년(성종 1) 3월 우의정 김국광(金國光)이 사은사(謝恩使)의 정사(正使)가 되었고, 이조 참판 정난종이 부사가 되어, 명나라로 파견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이듬해인 1471년(성종 2)에는 어린 성종이 즉위하는 데에 공이 있다고 하여,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의 작호(爵號)를 하사받고 동래군에 봉해졌다.[『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그리고 10월에는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영흥부윤(永興府尹)을 겸임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년 10월 5일, 『국조인물고』 권14] 이어 12월에는 춘추관 지사(知事)로서 『세조실록』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5월에는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세조실록』 세조 2년 12월 18일, 세조 3년 5월 10일]

1473년(성종 4) 9월 종2품하 가선대부 동래군으로 승품되었다.[『성종실록』 성종 4년 9월 30일] 1474년(성종 5) 4월에는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국장도감(國葬都監) 제조(提調)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475년(성종 6) 1월에는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 동래군으로 승품되었다.[『성종실록』 성종 5년 4월 15일, 성종 6년 1월 28일] 그해 2월 의경왕(懿敬王 :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의 시호를 가상(加上)하는 옥책서사관(玉冊書寫官)이 되었고, 8월에는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성종 6년 2월 28일, 성종 6년 8월 16일] 그런 가운데 12월에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순릉(順陵)을 지키던 수릉관(守陵官) 한계순(韓繼純)이 질병에 걸렸으므로, 정난종으로 하여금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6년 12월 14일] 그리고 이 공을 인정하여 1476년(성종 7) 4월 순릉수릉관(順陵守陵官) 정난종의 품계를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 동래군으로 승품하였다.[『성종실록』 성종 7년 4월 3일]

1477년(성종 8) 2월 영안북도병마수군절도사(永安北道兵馬水軍節度使 :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북방 경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478년(성종 9) 온성진(穩城鎭)에 길이 40리에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성종실록』 성종 8년 2월 12일, 『국조인물고』 권14] 1479년(성종 10) 서울로 돌아와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국조인물고』 권14] 윤10월 관반(館伴)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는데, 처음에는 중추부(中樞府) 영사(領事) 이극배(李克培)를 관반으로 삼았으나, 의정부에서 정1품의 관원을 관반으로 삼는 것은 관례가 아니라고 지적하였으므로, 정난종을 대신 임명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0년 윤10월 8일] 그리하여 1480년(성종 11) 3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성종실록』 성종 11년 3월 27일, 성종 11년 10월 19일] 11월에는 정현왕후(貞顯王后)를 봉숭(奉崇)할 때 그 옥책문(玉冊文)을 베껴 쓴 공로로 표피(豹皮) 1장을 받았다.[『성종실록』 성종 11년 11월 28일] 1481년(성종 12) 9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는데, 당시 전라도에 큰 흉년이 들자 그를 관찰사로 삼아 진휼(賑恤)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2년 9월 21일, 『국조인물고』 권14]

1483년(성종 14) 봄 성종이 연산군(燕山君)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난종은 주문사(奏聞使)의 부사로 임명되어 명나라로 파견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중국에서 돌아온 후,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道使)에 임명되어, 영변부사(寧邊府使)를 겸임하면서 위원진(渭原鎭)에 성(城)을 쌓았다.[『성종실록』 성종 14년 6월 28일] 그 이듬해인 1485년(성종 16) 강계(江界) 사람 박형손(朴亨孫)이 역(役)이 힘들다며 그가 모반을 준비한다고 무함하여 고변(告變)하였으나, 성종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박형손을 국문하여 그 정상을 알아내 처벌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6년 윤4월 5일, 성종 17년 6월 5일] 이에 정난종이 상소를 올려 자신의 심정을 진달하는 한편 자신을 해직시켜 달라고 간청하였지만, 성종은 손수 쓴 서찰을 보내며 이를 만류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6년 윤4월 20일] 임기가 차서 소환되자 1485년(성종 16) 6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고, 12월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성종 16년 6월 21일, 성종 16년 12월 28일]

1486년(성종 17) 9월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어 황해도를 순행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7년 9월 29일, 『국조인물고』 권14] 그해 11월에는 황해도 재령군에 있는 전탄(箭灘)의 제방을 쌓는 공사를 살펴보는 전탄천방순찰사(箭灘川防巡察使)의 특별 임무를 맡았으므로, 둑을 쌓은 상황을 글로 자세히 써서 서계(書啓)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7년 11월 19일] 1487년(성종 18) 경연(經筵) 동지사와 의금부(義禁府) 동지사를 겸임하였고, 공조 판서를 거쳐 그해 9월 호조 판서가 되었다.[『성종실록』 성종 18년 6월 13일, 성종 18년 9월 28일, 『국조인물고』 권14] 이듬해인 1488년(성종 19)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성종실록』 성종 19년 9월 1일] 1489년(성종 20) 병에 걸려 그해 2월 서울 본가(本家)의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57세였다. [『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서예의 대가 정난종]
정난종은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와 성종 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로서 초서(草書)예서(隸書) 등을 잘 썼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1459년(세조 5) 예문관 대교가 되었을 때, 글씨를 잘 쓴다며 세조로부터 서체를 모은 법첩(法帖) 1부를 하사받기도 하였다.[『세조실록』 세조 5년 9월 20일] 이에 정난종은 서법(書法)을 깊이 연구하였는데, 특히 원나라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철저하게 익혀서 그의 글씨체인 촉체(蜀體)에도 일가견을 이루게 되었다[『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권34]

1465년(세조 11) 세조가 불교에 심취하면서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하여 정난종에게 주자체(鑄字體)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 활자가 바로 ‘을유자(乙酉字)’이다. 또한 정난종의 대표적인 글씨로는 창덕궁(昌德宮) 진선문(進善門)의 편액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2] 금석문(金石文)으로는 서울 탑골공원의 「원각사비(圓覺寺碑) 음기(陰記)」,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윤자운신도비(尹子雲神道碑)」, 「윤자운묘표(尹子雲墓表)」, 연산(連山)의 「김철산비문(金鐵山碑文)」 등이 남아 있다. 또 청동(靑銅)에 새긴 금문(金文)으로는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종명(鐘銘)」, 고성의 「유점사(楡岾寺) 종명(鐘銘)」, 양주의 「봉선사(奉先寺) 종명(鐘銘)」, 덕수궁의 「흥천사(興天寺) 종명(鐘銘)」 등이 남아 있다. 정난종이 종이에 쓴 진짜 필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다만 『동국명필(東國名筆)』과 『해동명적(海東名跡)』, 『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그의 글씨가 모사(模寫)되어 전하고 있다.

한편 원래 숭례문(崇禮門)의 『숭례문(崇禮門)』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를 정난종의 글씨라고 일찍부터 주장하기도 하였다.[『오주연문장전산고』 권34]

[성품과 일화]
정난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도량이 활달하고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국조인물고』 권14] 풍채가 아름답고 서법 또한 교묘하여,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전하였다. 그러나 절조(節操)가 부족하였으니 외모가 그 실상보다 더 낳았다.[『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하루는 정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정(殿庭)에 들어가서 세조를 호위하였는데, 세조가 내신(內臣)으로 하여금 우선(羽扇 : 깃털 부채)을 가지고 제장(諸將)을 지휘해 부르도록 하였다. 내신의 우선 신호에 따라 장수들이 뒤질세라 서로 앞 다투어 전(殿)으로 달려 올라갔으나, 정난종은 이것이 장수를 부르는 방도가 아니라고 여겨 혼자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세조가 종신(宗臣)으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불러 오도록 하였으나, 이름을 세 번이나 불러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조가 내신을 시켜 선전표신(宣傳標信)을 가지고 가서 그의 소매를 잡아끌어서야 비로소 전에 오르게 할 수 있었다. 세조는 본래 정난종이 장수의 재능이 있음을 알고 곤기(閫寄)를 주고자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묵직한 태도를 마음에 들어 했으며, 그의 의지를 함부로 빼앗을 수 없음을 보고 더욱더 그를 중하게 여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또한 세조는 일찍이 정난종을 인재로 여겨 여러 번 일을 맡기고 시험을 하였는데, 언제나 마음에 들어 하였다. 어느 날 세조가 그를 편전(便殿)에 인대(引對)하여 『주역(周易)』과 『원각경』의 우열을 물었는데, 그가 대답하기를, “불씨(佛氏)의 요망한 서적을 어찌 세 성인(聖人 :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의 경서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조가 마치 진노한 것처럼 꾸미고는 역사(力士)에게 명하여 그를 끌어내어 두들겨 패라고 하였으나,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세조가 태도를 바꾸어 따져 묻지 않았다.[『국조인물고』 권14]

그가 함경도를 지킬 때에 북쪽의 오랑캐 니마거[尼麻車] 우디캐 무리들이 정난종이 병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고서 조선을 침입하려고 하였다. 그가 그 일을 미리 알아채고서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서 막하의 보좌관들과 더불어 계획하기를, “병법(兵法)에 일에 앞서 적의 마음을 공격하는 방법이 있으니, 내가 꾀를 내어 그들을 흔들 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5진의 성 밑에 사는 호추(胡酋) 수십 명을 불러 모아서는 “조정의 분부가 있어서 절도사로 하여금 오진(五鎭)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니마거 우디캐를 토벌하게 하여 전일에 그들이 우리 변방을 노략질한 죄를 징계하도록 하였으니, 너희들도 마땅히 종군해야 한다.”고 하고, 그들과 날짜를 약속한 후에 보냈다. 니마거 우디캐는 그 소문을 듣고 무서워하여 ‘대장군(大將軍)이다.’며 산야(山野)로 달아나 숨기까지 하였다. 이 일로 경작하던 수확물도 내버리고 말과 가축도 다수 폐사(斃死)하게 되었으므로, 이후 수년 동안 감히 조선 변경을 엿보지 못하였다. 막하에서 보좌하는 관원들이 그의 기지에 감복하여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계문(啓聞)하려고 하였으나, 그가 또 중지시키며, “맡은 직무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어찌 번거롭게 알릴 필요가 있는가.”하고 보고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국조인물고』 권14]

[묘소와 후손]
시호는 익혜이다.[『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13일]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속달동에 있으며, 남곤(南袞)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국조인물고』 권14] 차남 정광필이 영의정이 되자, 의정부 영의정 동래부원군(東萊府院君)에 추증되었다.[『국조인물고』 권14]

부인(夫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장사랑(將仕郞) 이지지(李知止)의 딸이다.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정광보(鄭光輔)는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를 지냈고, 차남 정광필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3남 정광좌(鄭光佐)는 안산군수(安山郡守)를 지냈고, 4남 정광형(鄭光衡)은 사복시(司僕寺) 직장(直長)을 지냈다. 딸은 승사랑(承仕郞) 안광수(安光晬)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1남을 두었는데, 서출 정담(鄭聃)은 내수사(內需司) 별제(別提)를 지냈다.[『국조인물고』 권14]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국조보감(國朝寶鑑)』
■ 『농암집(農巖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가집(四佳集)』
■ 『소문쇄록(謏聞瑣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용재집(容齋集)』
■ 『용재총화(慵齋叢話)』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태허정집(太虛亭集)』
■ 『보한재집(保閑齋集)』
■ 『허백정집(虛白亭集)』
■ 『허백당집(虛白堂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낙전당집(樂全堂集)』
■ 『문곡집(文谷集)』
■ 『식산집(息山集)』
■ 『봉암집(鳳巖集)』
■ 『추재집(秋齋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성재집(省齋集)』
■ 『하음집(河陰集)』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