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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6년(선조 9)∼1654년(효종 5) = 79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효종(孝宗) 때의 문신. 돈녕부(敦寧府)지사(知事)와 형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으며,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자는 수백(壽伯)이고, 호는 제곡(濟谷)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정창연(鄭昌衍)이고,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별좌(別坐) 한세원(韓世遠)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역임한 정유길(鄭惟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정복겸(鄭福謙)이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좌의정 정치화(鄭致和) 형제의 아버지이자, 광해군(光海君)의 왕비인 문성군부인(文成郡夫人)의 외사촌이기도 하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1년(선조 34)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회시(會試)의 대책(對策)에서 1등으로 뽑혔다.[『백헌집(白軒集)』 권44 「지돈녕부사정공신도비명(知敦寧府事鄭公神道碑銘)」 이하 「정광성신도비명」으로 약칭] 1603년(선조 36)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방목(榜目)』]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고, 대교(待敎)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37년 2월 4일, 선조 37년 9월 19일, 「정광성신도비명」] 1605년(선조 38)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되었고, 이어 예문관 봉교(奉敎)가 되었다가, 홍문관 전적(典籍)으로 전임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8년 6월 19일 선조 38년 6월 20일, 선조 38년 7월 27일, 「정광성신도비명」] 1606년(선조 39)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전임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9년 1월 20일, 선조 39년 3월 13일, 선조 39년 6월 4일, 선조 39년 12월 1일] 1607년(선조 40)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성균관 전적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선조 40년 4월 28일, 선조 40년 5월 20일, 선조 40년 12월 20일]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大北派)인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정권을 잡았다. 정광성(鄭廣成)의 아버지 정창연은 광해군의 문성군부인의 외삼촌이었으나, 이들 부자는 서인(西人)이었다. 당시 사헌부 지평(持平)이었던 정광성은 대간(臺諫)에서 소북파(小北派)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지 않는다는 홍문관의 탄핵을 받고 대간이 모두 파직당할 때 함께 파직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즉위년 2월 3일, 광해군 즉위년 2월 13일, 광해군 즉위년 2월 15일] 그러나 그해 5월 광해군이 그를 암행어사에 임명하였으므로, 강원도 고을을 암행하면서 민간의 폐단과 수령의 현부(賢否)를 탐문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 5월 15일] 이어 11월에는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며, 홍서봉(洪瑞鳳) 및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때 정광성은 사가독서 선발에서 빼달라고 상소하였으나,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았다.[『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 11월 6일, 광해군 즉위년 11월 10일]
1609년(광해군 1) 이조 좌랑과 이조 정랑(正郞)을 역임한 후,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 2월 16일, 광해군 1년 4월 19일, 광해군 1년 8월 30일, 「정광성신도비명」] 1610년(광해군 2)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을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 8월 18일, 「정광성신도비명」] 1611년(광해군 3)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전한(典翰)으로 승진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3년 8월 26일, 「정광성신도비명」] 1612년(광해군 4) 1월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었으며,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1월 6일, 광해군 4년 2월 12일] 1613년(광해군 5)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서,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1614년(광해군 6)에는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가, 형조 참의(參議)로 전임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2월 25일, 광해군 5년 2월 29일, 광해군 5년 3월 29일, 광해군 5년 5월 19일, 광해군 6년 10월 19일] 이어 1615년(광해군 7) 9월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직되었고, 곧 분조(分朝)의 승지(承旨)로 발탁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7년 9월 3일, 광해군 7년 11월 9일]
1616년(광해군 8) 이이첨 등의 대북파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소북파를 제거하기위하여 <해주옥사(海州獄事)>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해주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가 살해당하였고, 소북파 수백 명이 제거되었다. 당시 정광성과 정창연 부자의 이름도 공초(供招)에서 나왔으므로, 이들 부자는 대궐 밖에서 석고대죄(席藁待罪)하였으나, 광해군의 처갓집 친족이라고 하여 용서를 받았으며, 정광성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8년 5월 11일, 광해군 8년 9월 24일, 「정광성신도비명」] 1617년(광해군 9)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이어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 4월 25일, 광해군 9년 9월 27일, 광해군 9년 11월 13일]
이때 대북파 이이첨 등은 인목대비를 폐위하기 위하여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서인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조정의 분위기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때 정광경의 아버지 좌의정 정창연 또한 이 논의에 반대하며 참여하지 않았으나, 두 아들에게는 정청 운동에 참여하라고 엄명(嚴命)하였으므로, 정광성은 동생 정광경(鄭廣敬)과 함께 정청 운동에 참여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 1월 4일] 이것은 좌의정 정창연이 문성군부인의 외삼촌이었기 때문에, 왕비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1618년(광해군 10)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기근으로 많은 이들이 죽었는데, 그가 기민(饑民)을 진휼에 최선을 다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자, 황해도 사람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정광성신도비명」] 1619년(광해군 11) 5월 승정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으나, 이듬해인 1620년(광해군 12)에 어버이의 병으로 인하여 물러났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 5월 7일, 「정광성신도비명」] 1621년(광해군 13)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갔는데, 얼마 뒤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3년 3월 27일, 광해군 13년 9월 16일, 「정광성신도비명」]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자급(資級)은 강등되었다. 어버이 정창연이 연로하다고 하여 체직되어 돌아왔으며, 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정광성신도비명」]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인조(仁祖)가 공주(公州)로 피난가게 되자, 그도 장례원 판결사(判決事)로서 아버지 정창연과 함께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러나 병든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선 정창연이 수원(水原)에 이르자 혼자 힘으로는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정광성이 아버지를 모시고 바닷가로 가고, 그의 동생 정광경이 사헌부 집의로서 인조를 호종하였다.[「정광성신도비명」] 1625년(인조 3) 승정원 좌승지(左承旨) 및 형조 참의(參議)를 역임하였고, 이듬해인 1626년(인조 4)에는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3년 2월 23일, 인조 3년 4월 9일, 인조 4년 2월 4일, 인조 5년 9월 25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그는 인조를 호종하여 강화도로 들어갔으나, 아버지 정창연이 병이 심하여 수원에 체류하였으므로, 벼슬을 그만두고 수원에 가서 아버지 병을 간호하였다. 이후 도승지(都承旨)가 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직되었다.[『인조실록』 인조 5년 9월 25일, 「정광성신도비명」] 1628년(인조 6)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1629년(인조 7) 체차되어 한직(閒職)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정광성신도비명」] 1630년(인조 8)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호조 참의가 되었으며, 이어 특지(特旨)로 공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상소하여 개차(改差)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광해군 대에 외척들이 오만방자한 가운데에도 그의 집안만은 그렇지 않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인조실록』 인조 8년 12월 20일, 인조 8년 12월 25일, 『승정원일기』, 「정광성신도비명」]
1632년(인조 10) 도승지가 되었으나, 본인이 광해군 대에 정청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굳이 사직하니, 인조가 허락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0년 2월 24일, 인조 10년 4월 12일] 1633년(인조 11) 가선대부로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승정원일기』] 1634년(인조 12) 인조의 생부(生父) 원종(元宗)을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 부묘례 천조관(薦俎官)이 되었다.[『인조실록』 인조 12년 윤8월 21일] 1635년(인조 13)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인조 13년 9월 24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도승지에서 체직되어 군직(軍職)을 맡았다. 청(淸)나라 군사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 갔다. 인조는 처음에 강화도로 피난하려고 하여 늙고 병든 신료들에게 먼저 강을 건너게 하였으므로, 그도 아버지 정창연을 부축하고 강외(江外)로 나갔으나, 조금 뒤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길이 막힌 상태였으므로 아버지 정창연을 모시고 수원으로 갔는데, 이때 아버지 정창연이 촌사(村舍)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동생 정광경은 도승지로서 어가를 호종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홀로 상례(喪禮)를 치렀다.[「정광성신도비명」] 1639년(인조 17) 상례를 끝마치고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 병란(兵亂)과 상사(喪事)를 겪은 뒤인데다가 또 영예가 너무 성대한 것을 경계하는 걱정 때문에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져서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10여 개월이 지난 뒤에 영해부사를 사직하고 수원의 옛 집으로 돌아왔다.[「정광성신도비명」]
효종 즉위 후 1653년(효종 4)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는데, 효종은 선조 때에 시종하던 신하라며 그를 우대하였다.[『효종실록(孝宗實錄)』 효종 4년 9월 21일] 그리하여 1654년(효종 5) 가자(加資)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었고 기로사에 들어갔다.[『효종실록』 효종 5년 1월 24일] 당시 효종이 하교하기를, “정광성의 나이가 80에 가까우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영상(領相)의 아비이니 은혜를 추급(追及)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효종실록』 효종 5년 1월 21일] 이때 그의 맏아들 정태화가 영의정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돈녕부 지사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4월 22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9세였다.[『효종실록』 효종 5년 4월 11일, 효종 5년 4월 22일, 「정광성신도비명」] 그의 후손들이 그의 시문을 모아서 편찬한 『백헌집(白軒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정광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몸가짐이 단아하고 간소하였고, 성품도 정직하고 신중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으므로 할아버지 정유길이 기특하게 여기고 애지중지하여 항상 품에 끌어안고서 글을 가르쳤는데, 들으면 대뜸 외우곤 하였다. 나이 열두 살에 천연두를 앓자, 방안에 깊이 들어앉아 지내면서 『감강목(通鑑綱目)』을 독파하여 그 내용을 거의 모두 환하게 알았다. 이에 정유길이 말하기를, “내가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책을 좋아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을 당시에도 누가 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어코 구해다가 보았다.[「정광성신도비명」] 또한 단아하고 정직하여 어릴 때 또래 아이들과 놀 때에도 속이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성품도 또한 효성스럽고 신중하였으며, 재능과 명망이 있었으며, 몸가짐이 간소 검약하였다.[『효종실록』 효종 5년 4월 22일, 「정광성신도비명」]
아버지 정창연이 나이가 들어서 수십일 동안 병으로 위독하였는데, 약을 써도 효험이 없자, 그는 애타게 걱정하면서 병구완하느라 밤에 잘 때에도 옷을 벗지 않았다. 하루는 저녁에 그가 선잠이 들었는데, 어떤 신인(神人)이, “사순청량음(四順淸涼飮)을 복용해야 한다.”는 꿈을 꾸었다.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지만, 그 약의 독성을 염려하여 시행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그의 말을 듣고서, 청량음을 올리도록 재촉하였다. 그런데 한번 복용한 후에 효험을 보았고, 세 번 복용하자 병이 낫게 되었으므로, 모두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정광성신도비명」]
두 누이가 홀몸이 되어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수시로 가서 살펴보았고 늙어서도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서제(庶弟)를 사랑으로 돌보아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족친(族親)의 급한 처지를 두루 보살펴주었다. 시골 농장에 농사에 쓰던 소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소가 늙었다며 하인이 주인인 그에게 고하고 팔려고 하였다. 이 늙은 소는 팔아 버리면 당장 도살장으로 끌려갈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소가 이제껏 힘을 써준 덕분에 밥을 먹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 그 소를 도살당하게 놔둘 수가 없어서, 이내 늙은 종에게 맡겨 기르게 하여 자연사 하도록 하였다.[「정광성신도비명」]
글을 볼 때에는 몇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문사(文詞)가 풍부하고 통창(通暢)하였으나 요모조모 다듬는 것을 위주로 짓지는 않았다. 시문을 창수(唱酬)할 때에는 그 자리에서 즉시 지어내더라도 그 문장의 연원이 샘솟듯이 끊임없이 우러나왔다. 그러나 일찍이 뽐내거나 우쭐거리며 스스로 기뻐한 적이 없었다. 평생에 사치스러운 것을 가장 미워하여 조복(朝服)이 아니고서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거친 밥을 먹고 채소를 씹으면서 분수를 따라 편안히 여겼다. 항상 붕당(朋黨)의 논쟁을 수치스럽게 여겨 색목(色目)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만일 패거리를 지어 끼리끼리 어울리는 일에 대해 들으면 혀를 차면서 탄식해 마지않았다.[「정광성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있고,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정광성신도비명」]
첫째 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첨지(僉知) 송기(宋圻)의 딸인데, 일찍 죽었다. 둘째 부인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관찰사(觀察使)황근중(黃謹中)의 딸인데, 자녀는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정태화(鄭太和)는 영의정을 지냈고, 차남 정치화(鄭致和)는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3남 정만화(鄭萬和)는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딸은 이조 판서 윤강(尹絳)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은 딸 하나를 낳았다.[「정광성신도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