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694년(숙종 20)~1721년(경종 1) = 28세].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英祖)의 후궁이자, 추존왕 진종(眞宗)의 어머니. 궁호는 연호(延祜)이고, 시호는 온희(溫僖)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후철(李後哲)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사과(司果) 김매일(金梅一)의 딸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이신선(李信瑄)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이언량(李彦良)이다.
[영조의 후궁]
이정빈(李靖嬪)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이 사저(私邸)에 있던 시절 얻은 후궁으로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남아 있는 기록은 많지 않다. 이정빈은 1711년(숙종 37) 8세의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며, 이후 동궁(東宮)에 소속되었는데, 당시 동궁은 경종(景宗)이었다. 이때 이정빈이 어떻게 영조의 승은을 입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훗날 진종이 되는 이성경(李聖敬)이 1719년(숙종 45) 2월 15일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4년 11월 26일] 1718년(숙종 44) 초여름에 이정빈은 영조의 승은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성경을 가졌을 때 이정빈은 꿈에서 봉황과 같은 상서로운 새와 금빛 거북이를 보았다고 전해진다.[『영조실록』 영조 4년 11월 26일] 이후 이정빈은 딸 둘을 더 낳았고, 1721년(경종 1)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품계는 소훈(昭訓)이었다.[『경종실록(景宗實錄)』 경종 2년 5월 13일]
그리고 같은 해 연잉군은 후손이 없는 경종의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어 궁에 들어갔으며, 그 해 겨울 이영빈의 아들인 이성경이 궁에 따라 들어갔다.[『경종실록』 경종 1년 8월 20일, 경종 1년 8월 21일, 경종 1년 9월 27일, 『영조실록』 영조 4년 11월 26일] 이어 1724년(영조 즉위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이성경은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고, 이듬해인 1725년(영조 1) 2월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영조실록』 영조 즉위년 11월 3일, 영조 1년 2월 25일, 영조 4년 11월 26일] 그리고 며칠 후 그의 생모는 정빈(靖嬪)으로 추증되었는데, 당시 이정빈은 소원(昭媛)의 품계를 갖고 있었다.[『영조실록』 영조 1년 2월 27일]
한편 이정빈의 죽음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경종의 측에 있던 소론(少論)이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요구하던 노론(老論)을 축출하고자 <목호룡(睦虎龍)의 고변> 사건을 일으켰을 때, 고변의 내용 가운데 당시 이정빈이 노론의 독살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화가 난 연잉군이 정국을 뒤집어 남인(南人)을 불러들이려 한다는 소문을 노론이 내고 있다고 목호룡은 고변하였다.[『경종실록』 경종 2년 3월 27일, 경종 2년 5월 13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즉위년 11월 10일] 게다가 당시 사건의 조사 보고서인 임인옥안(壬寅獄案)에는 역적의 수괴로 연잉군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1741년(영조 17) 영조의 명에 따라 소각되는 바람에 자세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다.[『영조실록』 영조 17년 9월 25일] 사실 정국을 뒤집으려 한다는 소문과 역적의 수괴라고 언급되는 상황은 영조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노론은 역모를 일으키려 하였다며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였고, 영조는 소론 온건파와 남인 청류당(淸流黨)의 도움을 받아 큰 탈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더 이상 정치적 사건에 휩쓸리지 않도록 처신에 주의하여야만 하였다. 이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노론을 등용하고,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였다. 이때 노론의 영수인 민진원(閔鎭遠)은 당시 이정빈을 독살한 사람으로 동궁 주방 나인이 거론되었는데, 당시에는 영조가 사저에 있었기 때문에 동궁 주방 나인은 있을 수 없다며 이 고변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영조가 동의를 표하고, 이정빈의 죽음에는 아무런 의혹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영조실록』 영조 1년 3월 2일, 영조 1년 3월 26일]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진종 추증]
영조와 이정빈의 첫째 아들로 세자에 책봉된 이성경은 1728년(영조 4)에 1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영조실록』 영조 4년 11월 26일] 이에 영조는 이성경에게 ‘효장(孝章)’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자혜롭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라 하고, 경신(敬愼)하고 고명(高明)한 것을 장이라 하였다.[『영조실록』 영조 4년 12월 2일] 그리고 7년 후인 1735년(영조 11) 영조는 이영빈(李暎嬪)과의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을 낳았고,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영조실록』 영조 11년 1월 21일, 영조 12년 3월 15일] 이 왕세자가 훗날 뒤주에서 죽는 비극의 주인공인 사도세자(思悼世子), 즉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정조(正祖)의 친아버지이다. 장헌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총명하여 아버지 영조의 기대를 많이 받아 15세가 되던 1749년(영조 25)부터 대리청정을 하였다.[『영조실록』 영조 25년 1월 27일] 그러나 이러는 가운데 영조와 장헌세자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762년(영조 38) 영조의 명을 받은 장헌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영조실록』 영조 38년 윤5월 21일] 그리고 2달 여 후에 영조는 세손, 즉 장헌세자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어 2년 후인 1764년(영조 40)에는 왕세자를 자신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하였다. 동시에 영조는 왕세자에게 장헌세자를 추숭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영조실록』 영조 40년 2월 20일, 영조 40년 9월 26일]
효장세자의 후사가 된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년) 즉위 직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숭하고,[『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즉위년 3월 19일] 1778년(정조 2) 진종의 생모인 이정빈에게 영조의 유지에 따라 임금을 낳은 후궁으로 대접하여 궁호(宮號)와 원호(園號), 그리고 시호(諡號)를 내렸다. 궁호는 연호(延祜)이고, 원호는 수길(綏吉)이며, 시호는 온희(溫僖)이다.[『정조실록』 정조 2년 3월 18일, 『일성록(日省錄)』 정조 2년 1월 30일]
[묘소와 후손]
이정빈의 무덤은 처음에는 정빈묘(靖嬪墓)라 하였으나, 1778년 이정빈이 임금을 낳은 후궁으로 인정받으며 수길원(綏吉園)으로 승격하였다.[『정조실록』 정조 2년 3월 18일]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으며, 담장과 비석, 그리고 문인석(文人石) 등의 석물들이 남아 있다. 1991년 사적 제359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경복궁(景福宮)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사당을 세우고 이정빈의 신주를 모셨는데, 이곳이 바로 연호궁(延祜宮)이다.[『정조실록』 정조 2년 3월 18일, 정조 2년 6월 1일] 이후 1870년(고종 7) 연호궁은 장희빈(張禧嬪)과 이영빈, 그리고 성의빈(成宜嬪)의 신주와 함께 육상궁(毓祥宮)의 별묘(別廟)로 옮겨졌다.[『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7년 1월 2일] 이어 1908년(순종 2년) 개정한 제사 제도의 칙령에 따라 다른 후궁들의 신주도 육상궁으로 옮겨졌고,[『순종실록(純宗實錄)』 순종 1년 7월 23일] 1929년에는 덕안궁(德安宮)이 육상궁에 추가되면서 이곳은 7개의 신주를 모셨다는 의미로 ‘칠궁(七宮)’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2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이정빈은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1남은 진종이다. 1녀는 어려서 세상을 떠났으며, 2녀는 화순옹주(和順翁主)로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과 혼인하였다.[『영조실록』 영조 8년 11월 29일] 한편 화순옹주는 1758년(영조 34) 1월 남편 김한신이 세상을 떠나자 곡기를 끊어버렸고, 영조가 화순옹주의 집에 방문하여 음식을 권하여도 듣지 않다가, 곧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영조실록』 영조 34년 1월 4일, 영조 34년 1월 8일, 영조 34년 1월 17일] 이때 신하들이 영조에게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난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화순옹주의 정려(旌閭)를 청하였으나, 영조는 화순옹주가 비록 정절은 있을지 모르나, 부모에게는 불효한 것이므로 정려할 수 없다며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영조실록』 영조 34년 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