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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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빈(金仁嬪)

서지사항
항목명김인빈(金仁嬪)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왕족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55년(명종 10)~1613년(광해군 5) = 59세].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宣祖)의 후궁. 시호는 경혜(敬惠)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김한우(金漢佑)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인 보성군(寶城君)의 증손자 이효성(李孝性)의 딸이다. 선조와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3남인 정원군(定遠君 : 원종(元宗))의 첫째 아들이 훗날 조선의 16대 임금으로 등극한 인조(仁祖)이며, 인조를 시작으로 조선의 임금들은 모두 김인빈의 후손이다.

[선조의 후궁]
1555년 2월에 태어난 인빈김씨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明宗)의 후궁이던 이숙의(李淑儀)가 궁으로 데리고 오면서 어려서부터 궁에서 자랐다. 이숙의는 김인빈의 외사촌 언니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가 16살에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시녀로 궁에 들어가 18살에 명종의 후궁이 되었다.[『상촌집(象村集)』 권24 「숙의이씨묘지명(淑儀李氏墓誌銘)」] 이후 어머니 여자 형제의 딸인 김인빈을 궁으로 데리고 온 것인데, 김인빈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유순하고 침착하였으며 소꿉놀이를 하여도 부녀의 규범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눈여겨 본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는 김인빈이 14세가 되던 해에 선조에게 부탁하여 후궁으로 삼게 하였다.[『상촌집』 권28 「인빈김씨신도비명(仁嬪金氏神道碑銘)」] 이후 김인빈은 1573년(선조 6) 숙원(淑媛)의 칭호를 하사받고, 이어 귀인(貴人)으로 신분이 올랐으며, 1604년(선조 37) 정1품인 인빈(仁嬪)의 작호를 받았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37년 11월 12일]

선조의 정비(正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책봉되기 이전에 이미 후궁이 되었던 김인빈은 선조가 가장 총애하였던 후궁이었다. 그리하여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였을 당시 선조는 의인왕후가 아닌 김인빈과 함께 의주(義州)로 피난을 떠났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의인왕후는 연이은 피난 생활과 선조의 이와 같은 박대를 견디다 못하여 전쟁이 끝난 1600년(선조 33) 병이 들고 말았다. 그러자 김인빈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직접 의인왕후를 돌보았으며,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장례 예법을 모두 주관하였다고 전해진다.[『계곡집(谿谷集)』 권13 「인빈김씨신도비명(仁嬪金氏神道碑銘)」]

1608년(선조 41) 선조가 세상을 뜨자 3년상을 치른 후에 사제(私第)로 나와 거주하였는데, 호화로운 장식을 멀리하고 웃을 때에도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며, 또한 후손들이 찾아와서 장수를 축원하여도 즐거워한 적이 없다고 한다.[『계곡집』 권13 「인빈김씨신도비명」, 『상촌집』 권28 「인빈김씨신도비명」] 이런 가운데 김인빈은 1613년(광해군 5) 10월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나이가 59세였다.

한편 김인빈은 선조와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의안군(義安君)으로 어려서 죽었으며, 차남은 신성군(信城君)으로 임진왜란 당시 사망하였다. 삼남은 후에 원종으로 추증되는 정원군이고, 사남은 의창군(義昌君)이다. 이어 장녀 정신옹주(貞愼翁主)는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와 차녀 정혜옹주(貞惠翁主)는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와 삼녀 정숙옹주(貞淑翁主)는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혼인하였다. 또 사녀 정안옹주(貞安翁主)는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와 오녀 정휘옹주(貞徽翁主)는 전창위(全昌尉) 유정량(柳廷亮)과 혼인하였다.

[건저문제(建儲問題) 및 광해군과의 관계]
선조는 김인빈 이전에 김공빈(金恭嬪)을 총애하였는데, 김공빈은 선조의 큰 아들인 임해군(臨海君)과 둘째 아들인 광해군(光海君)의 생모였다. 그러나 김공빈은 1577년(선조 10) 산후병으로 2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광해군의 나이 3살이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5년 10월 29일] 김공빈이 세상을 뜨기 몇 달 전에 김인빈은 자신의 첫 아들이자 선조의 셋째 아들인 의안군(義安君)을 낳았다. 정비인 의인왕후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과 관련된 문제가 언제든지 제기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1591년(선조 24) 서인(西人)이었던 정철(鄭澈)이 동인(東人)의 이산해(李山海), 우의정 류성룡(柳成龍) 등과 상의하여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死)>로 서인에게 원한이 있던 이산해는 이 약속을 어기고 김인빈의 오라버니인 김공량(金公諒)과 결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김인빈에게 정철이 김인빈이 낳은 신성군(信城君)을 죽이고 광해군을 왕세자로 세우려 한다고 무고(誣告)하였다. 김인빈은 이러한 사실을 선조에게 알렸고,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던 정철 등이 왕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자 선조는 정철을 진주(晉州)로 유배 보냈으며, 정철에게 동의한 다른 서인들 또한 정권에서 축출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4년 6월 23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4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이렇듯 <건저문제>로 정철이 축출되는 과정에 김인빈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김인빈은 정사에 간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선조의 광해군 형제에 대한 총애는 줄어들었고, 김인빈 가문과 광해군 형제의 사이도 틀어졌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10월 29일]

그러나 이렇게 틀어진 관계는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회복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선조는 서둘러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선조와 광해군의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궁내에서도 광해군의 지위는 상당히 위태로웠다.[『선조실록』 선조 25년 4월 29일] 이때 다른 이들과 달리 김인빈은 광해군의 의중을 선조에게 전달하며 광해군이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10월 29일] 뿐만 아니라 1608년(선조 41) 1월 정인홍(鄭仁弘)이 왕세자 문제와 관련하여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는 등 논박이 거듭되던 끝에 광해군을 지지하던 정인홍이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도 김인빈은 광해군을 위하여 선조에게 변명해주었다.[『선조실록』 선조 41년 1월 26일] 이를 두고 광해군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라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10월 29일]

이어 얼마 후에 선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곧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이 역모를 일으킬 준비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임해군의 옥사>가 발생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 2월 14일] 이때 김인빈이 힘을 쓰면서 김인빈의 아들들 가운데 살아 있던 정원군과 의창군은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참여할 수 있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10월 29일] 이렇듯 김인빈과 광해군과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김인빈이 세상을 떠났을 때 비록 사헌부(司憲府)의 만류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광해군은 3일간 조시(朝市)를 정지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10월 30일]

[인조의 등극 및 김인빈의 시호 추증]
김인빈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의 후손들도 별다른 일이 없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사정은 달라졌다. 1615년(광해군 7) <능창군 추대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김인빈이 살아 있던 1612년(광해군 4) 권총(權聰)이 선조 말년에 김인빈이 광해군을 해칠 음모를 갖고 있었다며 그를 고변한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때 정원군과 의창군은 궐문 밖에서 상소를 하며 광해군의 처분을 기다렸고, 다행히 권총의 주장에 대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그들은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연려실기술』 권19 「폐주광해군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광해군은 정원군을 주시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정원군은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그러자 정원군은 광해군의 존호를 올리자는 계청을 올리는 등 광해군에 대한 충성을 앞장서서 보이기 시작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6월 1일]

이런 가운데 소명국(蘇鳴國)이 신경희(申景禧)를 비롯하여 양시우(楊時遇), 김정익(金廷益) 등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인 능창군(綾昌君)을 추대하여 역모를 일으키려 하였다고 고발하였던 것이다.[『광해군일기』 광해군 7년 8월 14일] 능창군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계곡집』 권13 「인빈김씨신도비명」] 결국 이 사건으로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가서 죽음을 당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7년 11월 10일, 광해군 7년 11월 17일] 이후 정원군은 이 일로 병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폭음이 이어지면서 1619년(광해군 11) 마흔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 12월 29일, 『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4년 3월 21일]

그리고 1623년(인조 1) 정원군의 첫째 아들이자 능창군의 형님인 능양군(綾陽君)이 광해군 대에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로사직이 망해간다는 이유를 제시하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인조실록』 인조 1년 3월 13일] 즉 선조와 김인빈의 손자가 16대 임금으로 등극한 것이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인조는 1632년(인조 10)에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은 원종으로, 어머니는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증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1월 12월 29일]

김인빈에게 ‘경혜(敬惠)’라는 시호를 증시한 것은 영조(英祖) 대인 1755년(영조 31) 6월에 이르러서였다.[『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31년 6월 22일] 이는 1753년(영조 29년) 영조가 본인의 생모인 최숙빈(崔淑嬪)에게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추시하였으므로, 이와 격을 맞추기 위하여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김인빈에게도 조치를 취한 것이다.[『영조실록』 영조 29년 6월 25일] 그리고 이에 앞서 김인빈의 사당은 저경궁(儲慶宮)으로, 묘는 순강원(順康園)으로 칭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방(房)에서 궁(宮)으로, 묘(墓)에서 원(園)으로의 격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영조실록』 영조 31년 6월 2일] 한편 김인빈을 궁에 데려 온 외사촌 언니 이숙의도 이때 경빈(慶嬪)으로 추증되었다.[『영조실록』 영조 31년 6월 14일]

이후 고종(高宗) 대에 들어서면서 왕실의 사당을 합치기로 하면서 김인빈의 신주 또한 김영빈(金寧嬪)과 윤화빈(尹和嬪)의 신주와 함께 경우궁(景祐宮) 안에 있는 사당에 모시기로 하였으나, 김인빈의 신주는 제외되고 다른 신주들만이 합쳐서 모셔졌다.[『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7년 1월 2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7년 2월 26일] 그러다가 1908년(순종 2년) 개정한 제사 제도의 칙령에 따라 저경궁의 신주는 다른 후궁들의 신주와 함께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겨졌다.[『순종실록(純宗實錄)』 순종 2년 7월 23일] 이어 1929년 덕안궁(德安宮)이 육상궁에 추가되면서 이곳은 7개의 신주를 모셨다는 의미로 ‘칠궁(七宮)’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2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김인빈의 묘소인 순강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2로 150외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주위를 둘러싼 담장과 묘비석 및 문인석(文人石), 혼유석(魂遊石) 등을 비롯한 석물이 남아 있으며, 묘소 앞에는 정자각과 비각 등이 조성되어 있다. 순강원은 1991년 사적 제356호로 지정되었다.

[성품과 일화]
김인빈은 천성적으로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부덕(婦德)을 온전히 갖추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리하여 선조의 총애를 받던 40년 동안 겸손하였으며, 언제나 침착하였고 미천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매도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로부터 호감을 얻었다고 한다.[『계곡집』 권13 「인빈김씨신도비명」]

김인빈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의 13대 임금인 명종(明宗)이 후사를 보지 못하는 것을 크게 걱정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꿈에 어느 날 한 사람이 나타나 “상주(尙州) 이아무개의 딸을 받아들이면 길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문정왕후는 사람을 시켜 이아무개의 딸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다가 어떤 승려의 도움을 받아 한 사람을 후궁으로 데려왔다. 이 사람이 바로 김인빈의 외사촌인 이숙의였는데, 이숙의 역시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숙의를 통하여 김인빈이 궁에 들어왔고, 이후 그의 손자인 인조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문정왕후의 꿈이 이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계곡집』 권13 「인빈김씨신도비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순종실록(純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계곡집(谿谷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상촌집(象村集)』
■ 『선원록(璿源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익사공신교서(翼社功臣敎書)』
■ 『두산백과』
■ 『민족문화대백과』
■ 지두환, 『선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
■ 정우택, 「광해군대 정치론의 분화와 개혁정책」,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 [집필자] 김가람, 황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