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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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운(鄭之雲)

서지사항
항목명정지운(鄭之雲)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학자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09년(중종 4)∼1561년(명종 16) = 53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학자. 자는 정이(靜而)이고, 호는 추만(秋巒)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주거지는 경기도 고양(高陽)과 서울이다. 아버지는 정인필(鄭寅弼)이다. 할아버지는 정한숙(鄭漢淑)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를 지낸 정하(鄭夏)이다. 김정국(金正國)과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그의 제자로는 정지림(鄭之霖), 정식(鄭軾), 김은휘(金殷輝) 등이 있다. <사칠논변(四七論辯)>의 발단이 되는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었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1509년(중종 4)에 서울 근교의 고양 이포리(已浦里)에서 태어난 정지운(鄭之雲)은 어릴 때부터 고양 망동(芒洞)에 퇴거(退居)하고 있던 김정국(金正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아울러 김안국(金安國)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19년 10월 1일] 서울로 이사한 후 새로 설치된 동몽학(童蒙學)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다. 당시 동몽학에 소속되면 봉록(俸祿)을 얻고 사로(仕路)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그는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하고 도리어 더욱 자기의 재능과 이름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다.[『퇴계집(退溪集)』 권46 「추만거사정군묘갈명(秋巒居士鄭君墓碣銘)」 이하 「정진운묘갈명」] 대신 그는 성리학에 매진하여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어 조화(造化)의 이(理)를 구명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16년 3월 9일] 그리고 스승 김안국에게 가지고 가서 도설을 질문하였는데, 김안국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에 대해서는 많은 공부를 하지 않고는 섣불리 논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책상 위에 두고서 깊이 생각하고 탐구하는 한편 학자가 찾아오면 내보이고 이야기도 하였으나 끝내 한마디도 개정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정지운이 이를 유감으로 여겼다.

한편 이황(李滉)은 어느 날 조카가 보여준 「천명도(天命圖)」를 보다가 도식과 해설이 틀린 곳이 있어, 그 지은이를 수소문 하던 끝에 같은 동네에 살던 정지운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편지를 왕복한 후에 정지운을 만났는데, 이후 정지운은 이황으로부터 『심경(心經)』과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을 배웠다.[『퇴계집(退溪集)』 권41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叙)」, 「정진운묘갈명」] 아울러 1553년(명종 8)에는 이황의 의견을 따라 『천명도설(天命圖說)』을 다시 정정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지은 것을 「천명구도(天命舊圖)」라 하고, 뒤에 정정한 것을 「천명신도(天命新圖)」라 하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정지운의 『천명도설』은 사칠논변의 발단이 되었다. 사칠논변의 발단은 1553년 이황이 53세 되던 해에 정지운의 「천명도」에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고 되어 있는 것을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수정한 것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전파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시작되었다. 그리고 1559년(명종 14)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만물은 항상 이와 기가 함께 있으므로 사단과 칠정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이황은 기대승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단의 발함은 순수한 이이기 때문에 불선이 없고 칠정의 발함은 기를 겸하였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四端之發純理 故無不善 七情之發兼氣 故有善惡]”라고 수정하였다.[『고봉집(高峯集)』] 그러나 이후 8년에 걸친 서신 왕래에서도 이발(理發)에 대한 견해 차이는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효종실록(孝宗實錄)』 효종 9년 12월 17일]

한편 정지운은 1561년(명종 16) 부인 충주 안씨(忠州安氏)의 아우인 풍덕군수(豐德郡守) 안홍(安鴻)의 주선으로 천마산(天磨山)에 유람 갔다가, 병이 갑자기 위중해져서 집에 돌아오는 도중에 승평부(昇平府 : 개성직할시 개풍군 풍덕리)의 강구(江口)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3세였다.[『명종실록』 명종 16년 3월 9일] 이후 1688년(숙종 14) 지방 유림의 공의로 문봉서원(文峯書院)이 건립되었는데, 이때 정지운은 남효온(南孝溫) 등과 함께 이곳에 위패가 모셔졌다. 그리고 약 20여 년 후인 1709년(숙종 35) 문봉서원은 사액 서원이 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1 「경기(京畿) 고양군(高揚郡)」]

[성품과 일화]
정지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특이하고 덕망이 훌륭하였다. 또한 그의 효심이 지극하였는데, 2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 예를 다하였고, 스승 김정국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심상(心喪) 3년을 지냈다. 살림이 가난하여 집조차도 없어서 서울의 서문(西門) 안에 남의 집을 빌려서 살면서 끼니를 걸러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사람됨이 풍채가 준수하고 마음이 소탈하였으며 옛것을 좋아하였다.[「정진운묘갈명」]

또한 “행동은 진실하였고 분수를 지켰으며 피아의 한계를 초월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보기에 절제가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타고난 천성이었으며 세상의 험한 일을 많이 겪었어도 조금도 꺾인 적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성리학에 전심하여 『천명도설』을 저술하고 깊은 이치를 연구하였는데 뒤에 이황을 만나 서로 논증하며 바로잡았다. 그 내용은 모두 성현(聖賢)에 근본 하였고 표절하거나 이것저것 모아 놓는 논설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자들이 이를 보면 개발되는 바가 많았다. 그가 졸하니 식자들이 애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6년 3월 9일]

[묘소와 후손]
정지운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중산마을 고봉산 남쪽 기슭에 있으며, 부인 충주 안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1562년(명종 17)에 세운 묘갈(墓碣)에는 ‘추만거사정지운지묘(秋巒居士鄭之雲之墓)’라 새겨져 있는데, 이황이 비문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다. 이 외에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남아 있다.

부인 충주 안씨는 안숙손(安叔孫)의 딸인데, 슬하에 2녀를 두었다. 1녀는 이학명(李鶴鳴)에게 시집을 갔고, 2녀는 송대훈(宋大訓)에게 시집갔다.[「정진운묘갈명」]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고봉집(高峯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천명도설(天命圖說)』
■ 『퇴계집(退溪集)』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금장태, 『한국 유교의 과제』,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 [집필자] 정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