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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6년(선조 39)∼1671년(현종12) = 66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와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냈다. 자는 방숙(方叔)이고, 호는 취옹(醉翁)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의(參議)유성증(兪省曾)이며, 어머니 능주 구씨(綾州具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참봉(參奉) 구준(具濬)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 유대의(兪大義)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된 유영(兪泳)이다. 영조(英祖) 대에 우의정과 영의정 등을 지냈으며,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로 유명한 유척기(兪拓基)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한편 유철은 1640년(인조 18) 사간원 사간으로 있으면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청(淸)나라와의 화의를 결사반대하였던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 등의 삼학사(三學士)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 화의를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을 당하였는데, 유철은 이들의 가족들에게 은휼(恩恤)이 없음을 알리고, 이에 대한 가납을 받았다.[『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3일, 인조 15년 1월 29일, 인조 15년 3월 5일, 인조 15년 4월 19일, 인조 15년 6월 8일, 『유철비명(兪㯙碑銘)』] 또 북방편의(北方便宜) 7사를 축조, 진술하여 모두 시행하게 하였다.[『유철비명』] 이후 유철은 암행어사 및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 승정원 우승지(右承旨),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인조실록』 인조 18년 9월 3일, 인조 18년 9월 21일, 인조 19년 3월 15일, 인조 22년 6월 14일] 그러다가 1645년(인조 23) 1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이때 동래(東萊)의 왜인(倭人)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바람에 왜인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인조실록』 인조 23년 1월 9일, 『유철비명』]
1646년(인조 24) 승정원 형방승지(刑房承旨)를 역임하던 중에 <강빈옥사(姜嬪獄事)>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인조에게 올린 전복구이에서 독약이 발견된 것으로,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부인인 강빈(姜嬪)을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강빈의 나인 5명과 음식을 만든 나인 3명을 잡아다가 국문하였으나, 사건의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24년 1월 3일] 그러나 인조는 계속해서 강빈이 독을 넣었다고 주장하였으며, 한 달 뒤인 그해 2월 김류(金瑬)와 이경석(李景奭), 최명길(崔鳴吉), 김육(金堉), 김자점(金自點) 등을 불러 “강빈이 평소 무례한 여자인데 무슨 짓인들 못 하겠냐.”며 처벌할 뜻을 밝혔다.[『인조실록』 인조 24년 2월 3일] 그러면서 강빈의 형제들이 누이가 한 일을 모를 리가 없다며 국문을 실시하였고, 결국 강빈의 오라버니인 강문성(姜文星)과 강문명(姜文明)이 곤장에 맞아 죽었다.[『인조실록』 인조 24년 2월 29일] 이때 유철은 죄인 강문명이 이미 임금을 무시하였다며, 추국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었다.[『인조실록』 인조 24년 2월 15일]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예조 참판(參判)에 제수되었는데, 사람들로부터 “요즈음 재신이 된 것은 유추국(兪推鞫)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인조실록』 인조 24년 2월 15일, 인조 24년 2월 18일, 인조 24년 2월 23일]
이후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3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인조 24년 3월 13일, 인조 24년 11월 26일, 인조 25년 3월 22일] 이어 그해 5월에는 다시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가, 10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648년(인조 26)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다시 제수되었다.[『인조실록』 인조 25년 5월 15일, 인조 25년 10월 26일, 인조 26년 11월 19일]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1년(효종 2) 4월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그해 5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孝宗實錄)』 효종 2년 4월 10일, 효종 2년 5월 19일] 그런데 효종이 배릉(拜陵)할 때 교량(橋梁)을 제대로 경계하지 못하여 위사(衛士)의 말이 빠졌고 횃불이 어가 앞에서 꺼지는 바람에 견책을 받아 덕산(德山)으로 유배되었다.[『효종실록』 효종 2년 9월 9일, 효종 2년 10월 23일, 효종 2년 11월 3일] 그러다가 1652년(효종 3) 12월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이듬해인 1653년(효종 4) 북경(北京)에 갔다가 그해 6월에 돌아와서, 명(明)나라의 영력제(永曆帝)가 사천(四川) 지방에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효종실록』 효종 3년 12월 12일, 효종 4년 1월 28일, 효종 4년 5월 23일, 효종 4년 6월 23일] 그리고 그해 7월에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곧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부사로서 청나라에 갔을 때 역관들이 삼화(蔘貨)를 많이 가져간 것이 문제가 되어 탄핵 당하였으나, 효종의 비호로 무사하였다.[『효종실록』 효종 4년 7월 2일, 효종 4년 7월 27일, 효종 4년 윤7월 2일, 효종 4년 윤7월 3일, 효종 윤7월 10일, 효종 4년 윤7월 17일]
1655년(효종 6) 11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는데, 이때 천안군수(天安郡守) 서변(徐忭)이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처남인 승정원 도승지 오정일(吳挺一)이 허적(許積) 등과 모의하여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무고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은 오정일의 집에서 인평대군과 허적 등이 모여 술을 마시던 중에 승정원 승지 유도삼(柳道三)이 술에 취해 인평대군에게 ‘소인(小人)’이라 하지 않고 ‘소신(小臣)’이라 칭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효종실록』 효종 7년 5월 12일] 이때 서변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서변이 형장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사건은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효종실록』 효종 7년 5월 14일] 그런 가운데 유철이 비록 유도삼의 말은 망발이었으나, 술에 취해 경솔하였던 잘못은 모면하기 어려우며, 사사로이 대군을 만나는 것은 국법으로 금하고 있다며 유도삼을 탄핵하였다.[『효종실록』 효종 7년 5월 25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30 「효종조고사본말(孝宗祖故事本末)」] 그러자 효종은 사주를 한 사람으로 유철을 지목하면서 하나뿐인 동생을 제거하려는 계획이라며 유철을 국문하도록 하였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유철을 구하려고 하자, 효종이 “간사한 무리로써 간장(諫長)을 삼은 것은 대신(大臣)의 죄이니, 경(卿)은 의당 대죄(待罪)해야 한다. 이런 적을 죽이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효종실록』 효종 7년 5월 25일] 이어 사간원 사간 윤집(尹鏶)이 효종과 독계(獨啓)하면서 유철에 대한 형벌이 과하다며 거듭 형벌에 대한 명령을 거두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경석(李景奭)을 비롯한 이시해(李時楷)와 이시방(李時昉)도 연달아 형문을 가하지 말 것을 주청한 덕에 유철은 사형에서 진도(珍島)로 정배(定配)되는 것으로 처벌이 감해졌다.[『효종실록』 효종 7년 5월 25일, 효종 7년 5월 27일, 효종 8년 10월 26일,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7 「윤집독계(尹鏶獨啓)」] 얼마 후 대신들이 그의 행동이 죄가 되지 않음을 여러 차례에 걸쳐 말하니, 효종이 유철을 강원도 평해군(平海郡 : 현 경상북도 울진군)으로 이배(移配)하라고 명하였다.[『효종실록』 효종 7년 윤5월 16일] 이후에도 연신(筵臣)들이 언로의 열리고 막힘에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다고 진달한 끝에, 유철은 그해 7월 사면되었다.[『효종실록』 효종 7년 7월 22일, 『잠곡유고(潛谷遺稿)』 권6 「청관유철차(請寬兪㯙箚)」]
이후 유철은 효종 대에는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현종이 왕위에 오른 후 1660년(효종 1) 4월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 1년 8월 1일] 이어 사헌부 대사헌, 예조 참판,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 병조 참판, 강화 유수(江華留守), 사간원 대사간, 승정원 도승지, 개성 유수(開城留守), 호조 참판,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효종실록』 효종 2년 7월 26일, 효종 2년 윤7월 13일, 효종 2년 12월 16일, 효종 3년 1월 16일, 효종 3년 2월 8일, 효종 4년 10월 8일, 효종 5년 1월 20일, 효종 7년 1월 23일, 효종 8년 6월 14일, 효종 10년 1월 12일, 효종 10년 2월 20일, 효종 10년 6월 25일] 그러다가 1671년(현종 12) 1월 12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6세였다. 저서로 『취옹집(醉翁集)』을 남겼다.
[성품과 일화]
유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후덕하고 신중하였으며, 도량이 넓고 컸다. 평상시 엄숙하여 범접할 수 없는 듯하였으나, 그와 더불어 말을 하면 충실하고 관대하였으며, 말씨도 부드럽고 온화하였다. 또 성품이 효성에 독실(篤實)하였는데, 5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종신토록 원통하게 여겼고, 말이 이에 미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었다. 사람이 아이를 낳을 때에 임하여 통증을 호소하는 것을 보고 공이 즉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의 선비(先妣)도 나를 나을 때에 이와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라고 하였다. 형 유황(兪榥)이 죽자 혼자가 된 형수를 섬기고 어린 조카들을 잘 키우면서 지극히 공경하고 사랑하였다. 그리고 평소에 검소하고 절약하여 거마(車馬)와 의복을 챙기지 않았다. 주호(酒戶)에는 매우 너그러웠으나, 일찍이 술 때문에 심지(心志)를 어지럽힌 적이 없었다. 남과 절연(絶緣)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능히 여색(女色)을 멀리하였다.[『유철비명』]
한편 이러한 평가와는 달리 젊었을 때 청현(淸顯)의 직에 두루 등용되기는 하였으나 사람됨은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는 평가도 있다. 인조 때에 강빈옥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승정원 형방승지로 품계가 올라갔으므로 당시 여론이 천하게 여긴 끝에 ‘유추국’이라는 악평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사간원 대사간 당시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와서도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고 전혀 염치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천하게 여겼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현종실록』 현종 10년 3월 10일 현종 12년 1월 13일]
[묘소와 후손]
유철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차산리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김수증(金壽增)이 글씨를 썼다. 현재 그의 묘소에는 묘갈과 상석(床石), 장대석(長臺石), 향로석(香爐石), 동자석,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신도비(神道碑) 등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임효달(任孝達)의 딸인데, 자식이 없다. 둘째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한전(韓甸)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다. 1남 유명순(兪命舜)은 일찍 죽었고, 2남 유명건(兪命健)은 목사(牧使)를 지냈다. 3남 유명악(兪命岳)은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유척기는 영조 때에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1녀는 안상길(安相吉)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아들 유명룡(兪命龍)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