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78년(선조 11)∼1636년(인조 14) = 59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함흥부통판(咸興府通判)과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자는 자약(子約)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병조 참판(參判)을 지낸 유대정(兪大禎)이며, 어머니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정랑(正郞)정의신(鄭誼臣)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유호(兪灝)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유관(兪綰)이다. 숙종(肅宗) 대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유명한 유하익(柳夏益)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5년(선조 38) 음보(蔭補)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에 임명되었다가 시직(侍直)으로 전임되었고, 이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606년(선조 39)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9세였다.[『방목(榜目)』] 급제 후 승정원(承政院)에 추천되어 주서(注書)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의 막료가 되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27]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유수증(兪守曾)의 장인 유영경(柳永慶)은 선조가 살아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던 사실로 인해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 등의 탄핵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에 연좌되어 1612년(광해군 4) 유수증 또한 유영경의 또 다른 사위인 이현(李袨)과 함께 탄핵을 받고 문외출송(門外出送)을 당한 후 죽을 때까지 금고에 처해지게 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4년 7월 17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9 「폐주광해군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이후 유수증은 동교노원(東郊蘆原)에 은둔하면서 경사(經史)를 읽으며 12년을 지냈다.[『국조인물고』 권27]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함흥부통판으로 기용되었다가, 1625년(인조 3) 형조 좌랑(佐郞)에 제수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년 4월 19일, 인조 3년 11월 7일] 1626년(인조 4) 6월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고 형조 정랑(正郞)이 되었으며, 7월에는 예조 정랑(正郞), 10월에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11월에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 12월에는 호조 정랑(正郞)을 지내다가 안악군수(安岳郡守)가 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4년 11월 4일, 『승정원일기』 인조 4년 윤6월 10일, 『국조인물고』 권27] 그리고 얼마 후인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는 바람에 안악으로 가는 것이 어려웠음에도 부임하였다가, 이듬해인 1628년(인조 6)에 병으로 사임하였다.[『국조인물고』 권27] 이후 1629년(인조 7)부터 6년 동안 사헌부 지평과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 지제교(知製敎), 사헌부 장령(掌令), 성균관 직강, 의빈부(儀賓府)정(正), 남양부사(南陽府使) 등을 역임하였다.[『인조실록』 인조 8년 6월 7일, 인조 13년 11월 18일, 『응천일록(凝川日錄)』 권4, 『국조인물고』 권27]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 3월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10월 간찰을 불에 태웠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인조실록』 인조 14년 3월 22일, 인조 14년 10월 15일] 감찰(監察) 이한(李憪)이 떨어뜨린 간찰을 유수증이 주워서 불에 태우고는 이 사실을 병조 판서(判書) 이성구(李聖求)에게 은밀히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조는 책임질 사람은 따로 있다며 유수증은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4년 10월 15일] 이해 7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에 제수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었는데, 예에 따라 가자(加資)를 청하였으나 승품(陞品)되지 못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4년 7월 26일] 또 국장(國葬) 때에도 도청(都廳)이 되었으나 끝내 품계가 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벼슬길에 장애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국조인물고』 권27]
[성품과 일화]
유수증의 성품에 대해서는 손자 유하익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 풍모를 생각해 보면 여전히 의연(依然)하다. 조정에서의 사실(事實)과 집안에서의 행의(行誼) 가운데 집안에 전하는 바가 참으로 많을 것이나 선행이 있어도 알지 못하고 알아도 전하지 못하였으니 역시 예경(禮經)에서 전하는 뜻이 아니다. 일찍이 묘도(墓道) 문자에 미화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자손들에게 세계(世系)와 연보만을 기록하도록 명하였다.[『국조인물고』 권27]
[묘소와 후손]
유수증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에 있는데 아버지 유대정의 묘 아래에 있으며 부인 전주 유씨(全州柳氏)와 합장하였다. 손자 유하익이 작성한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부인 전주 유씨는 영의정을 지낸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 유영경의 딸로, 자녀가 없어 유수증의 동생인 유시증(柳是曾)의 둘째 아들 유비(柳柲)를 후사로 삼았다.[『국조인물고』 권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