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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6(선조 9)∼1649(인조 27) = 74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예조 참의(參議) 등을 지냈다. 자는 자수(子修)이고, 호는 우곡(愚谷) 또는 요곡(拗谷)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 유대의(兪大儀)이고, 어머니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서윤(庶尹) 이승서(李承緖)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된 유영(兪泳)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호조 판서(判書)유강(兪絳)이다. 조선 후기 영조(英祖) 대에 우의정을 지낸 유척기(兪拓基)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0년(광해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619년(광해군 11) 수원개성별시(水原開城別試) 문과(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44세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11년 9월 18일, 『방목(榜目)』] 급제 후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백헌집(白軒集)』「유성증신도비명(兪省曾神道碑銘)」 이하 「유성증신도비명」으로 약칭] 1620년(광해군 12)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大北派)를 싫어하여 사직하고 조도사(調度使) 이창정(李昌庭)의 막하가 되었다.[「유성증신도비명」] 그러다가 이듬해인 1621년(광해군 13) 호조 좌랑이 되었는데, 이때 영남의 유생들이 대북파의 영수이던 이이첨(李爾瞻)을 논책하는 상소를 하였고, 유성증(兪省曾)이 그 상소문을 썼다. 이에 사헌부(司憲府)에서는 그가 상소를 작성한 것을 지적하며, 유생들을 유도하여 흉한 소장을 대신 만들어 주어 조정과 맞닥뜨리게 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그를 잡아다 국문하여 치죄하여야 한다며 탄핵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3년 8월 13일, 광해군 13년 8월 17일] 이로 인해 유성증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투옥 당하였는데 한 달 후에 신병으로 출옥하였으나, 여전히 대명(待命)을 하였다.[「유성증신도비명」]
한편 유성증의 동생 유세증(兪世曾)은 이이첨 등의 대북파와 뜻을 같이 하면서, 유성증을 끊임없이 회유하였다. 그러나 유성증은 끝까지 대북파와 거리를 두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1년 4월 3일, 「유성증신도비명」, 『포저집(浦渚集)』 권30 「제유참의문(祭兪參議文)」]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이이첨과 정인홍(鄭仁弘)을 비롯한 대북파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는데, 이 대상에는 유성증의 동생인 유세증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그해 4월 유세증은 주살되었고, 이때 유성증은 유세증의 뜻을 적극 반대하였다는 것이 참작되어 연좌에서 제외되었다.[『인조실록』 인조 1년 4월 3일] 그리고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유성증은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후에 예모(禮貌)를 모른다고 하여 체직되었다.[『인조실록』 인조 2년 4월 18일, 인조 2년 6월 25일, 인조 2년 7월 4일] 이후 1626년(인조 4) 4월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면서 형조 정랑(正郞)에 제수되었다가, 윤6월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를 거쳐, 8월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인조실록』 인조 4년 8월 25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4년 4월 26일, 인조 4년 윤6월 11일, 인조 4년 8월 5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는데, 그는 사헌부 지평으로서 인조를 강화도에 호종(扈從)하고 척화를 주장하였다.[『인조실록』 인조 5년 1월 17일, 인조 5년 1월 23일, 『승정원일기』 인조 5년 1월 27일, 「유성증신도비명」] 정묘호란이 끝난 후 그는 외직으로 나가서 영해부사(寧海腐史)를 지냈다. 이때 그는 교도(敎導)를 우선으로 해서 고을 자제들에게 학업을 권장하되 상벌을 매우 엄격하게 하여 몇 해 만에 4, 5명이 연이어 생진시(生進試)에 합격하게 하는 업적을 남겼다.[『승정원일기』 인조 5년 5월 26일, 「유성증신도비명」]
1629년(인조 7) 그는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 되었다가, 1630년(인조 8)에는 군자감(軍資監)정(正)과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 및 홍문관 교리(校理), 그리고 사헌부 집의(執義) 등을 지냈다.[『인조실록』 인조 7년 11월 24일, 인조 8년 7월 15일 『승정원일기』 인조 8년 4월 20일, 인조 8년 10월 3일, 인조 8년 10월 10일, 인조 8년 12월 10일] 한편 그는 사헌부 집의로 있을 때 정묘호란 후의 수습책으로 양전(量田)을 시행하여 경계(經界)를 바르게 하기를 청하는 동시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민역(民役)을 고르게 하며, 절행(節行)을 포장(褒章)하여 풍교(風敎)를 수립하자고 제안하였다.[「유성증신도비명」] 1631년(인조 9)에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과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 홍문관 수찬,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성균관 사성(司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보덕(輔德),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인조실록』 인조 9년 4월 24일, 인조 9년 7월 26일, 인조 9년 8월 16일, 『승정원일기』 인조 9년 5월 16일, 인조 9년 7월 21일, 인조 9년 9월 15일, 인조 9년 윤11월 6일] 그리고 1632년(인조 10) 외직으로 나가서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냈는데, 관용과 조화로 백성들을 어루만졌으므로 그가 조정의 부름을 받아 그 고장을 떠나자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칭송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 10년 3월 4일, 「유성증신도비명」]
이어 그는 사간원 사간과 홍문관 교리, 홍문관 부교리, 세자시강원 보덕, 사헌부 집의, 지제교(知製敎), 춘추관(春秋館)기주관(記注官) 등의 관직을 거쳤다.[『인조실록』 인조 11년 11월 10일, 인조 12년 윤8월 19일, 인조 12년 10월 22일, 『승정원일기』 인조 12년 7월 27일, 인조 12년 12월 16일, 인조 13년 1월 16일] 그리고 1635년(인조 13) 1월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를 태묘에 모시기 위한 부묘도감(祔廟都監)이 설치되었는데, 이 때 낭청(郎廳)을 맡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 13년 1월 28일, 「유성증신도비명」] 그리고 그 해 5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인조실록』 인조 13년 5월 16일]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여 청(淸)나라가 침입하자 대가를 호종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들어가던 중에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길은 이미 막힌 상태였다. 그리하여 강화도로 돌아가서 파수대장(把守大將)이 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5년 5월 13일, 「유성증신도비명」]
1638년(인조 16) 9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발탁되었으며, 1642년(인조 20) 10월에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고, 1645년(인조 23) 4월에는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되었다.[『인조실록』 인조 16년 9월 2일, 인조 20년 10월 11일, 인조 23년 4월 25일]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감시(監試)와 회시(會試)의 시관(試官)으로 의망(擬望)한 이들이 적절하지 않은 인물이라며 문제가 되면서 파직되었으나 얼마 후 다시 예조 참의가 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24년 2월 12일, 인조 24년 7월 13일] 1649년(인조 27) 도성 서쪽 옛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4세였다.
[성품과 일화]
유성증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돈후충신(敦厚忠信)하여 장자의 풍모가 있었다. 천성이 논의를 좋아하지 않아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부터 늘 화평(和平)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정(邪正)과 시비(是非)의 구분에서는 명확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또한 겉은 온순하였으나 속은 방정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옳지 않다고 여기면 아무리 고귀한 자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명리(名利)에 나아가지 않았다. 각박하지 않았고 검소하되 꾸미지 아니하였다.[「유성증신도비명」]
또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봉양치 못하였는데 늦게 수령으로 나가게 되자 곧 슬픔과 사모하는 마음이 더하였다. 그리하여 선인(先人)의 뜻을 이어서 묘도(墓道)의 일을 모두 경영해 이루었고, 제사의 예(禮)에 근신(謹愼)과 정결을 다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심하자 유성증은 자신의 허벅지로부터 피를 내어 약에 타서 올리니 어머니의 병이 곧 나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유성증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유성증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에 있는데, 부인 능주 구씨(綾州具氏)와 합장하였다.
부인 능주 구씨는 전생서(典牲署)참봉(參奉) 구준(具濬)의 딸로,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유황(兪榥)은 공조 참의를 지냈고, 차남 유철(兪㯙)은 예조 참판(參判)을 지냈다. 딸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로 유명룡(兪命龍)이 있다.[「유성증신도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