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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4년(명종 9)∼1599년(선조 32) = 4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문신. 이조 좌랑(佐郞)과 이조 참의(參議) 등을 지냈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자는 신보(新甫)이고, 호는 신포(新浦)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유홍(兪泓)이며, 어머니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교리(校理) 이준인(李遵仁)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유관(兪綰)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예조 판서를 역임한 유여림(兪汝霖)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9년(선조 12)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1583년(선조 16) 별시(別試)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0세였다.[『방목(榜目)』]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에 선보(選補)되어 정자(正字)가 되었다. 이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가 예문관 대교(待敎)를 거쳐 예문관 봉교(奉敎)를 역임하였다. 1584년(선조 17) 이이(李珥)의 천거로 홍문관(弘文館)의 직임에 발탁되어 정자(正字)에 임명되었고, 1585년(선조 18) 홍문관 저작(著作)을 거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18년 6월 5일, 『시남집(市南集)』 권23 「공조참의유공묘갈명(工曹參議兪公墓碣銘)」 이하 「유대진묘갈명」으로 약칭] 이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 되었다가 공조 낭관(郎官)과 형조 낭관, 병조 낭관, 호조 낭관 등을 역임하였다.[「유대진묘갈명」]
1589년(선조 22)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 12월 정암수(丁巖壽)가 이산해(李山海), 정언신(鄭彦信), 정인홍(鄭仁弘), 유성룡(柳成龍) 등은 나라를 병들게 하는 간인(姦人)이며 역당이므로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선조에게 올리는 일이 있었다. 상소를 본 선조는 연명한 사람 모두를 잡아들일 수 없으니 정암수를 포함하여 10명만을 추국하도록 명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2년 12월 14일, 선조 24년 7월 5일] 그러자 유대진(兪大進)이 소속된 사간원 및 사헌부(司憲府)는 초야의 사류를 발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국문한다면 언로가 막힐 수 있다며 추국을 반대하였고, 태학생(太學生)들 또한 정암수를 탄원하는 상소를 올리는 덕분에 정암수는 구원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2년 12월 19일, 선조 22년 12월 22일, 선조 22년 12월 27일] 그러나 2년 후인 1591년(선조 24) 대간이 “정암수 등을 잡아올 때에 당시 대간들이 간사한 권신의 사주를 받고 불가하다고 다투었으니, 그들을 모두 파직시키소서.”라며 당시 대간들을 탄핵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4년 7월 5일] 이에 당시 헌납이었던 유대진 또한 양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서용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4년 7월 5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24년 7월 1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4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한편 유대진은 1590년(선조 23) 이조 좌랑을 거쳐 정랑(正郞)이 되었고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과 내섬시(內贍寺)정(正)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적의 유병(遊兵)을 토벌하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의병을 일으켰다.[『연려실기술』 권17 「선조조고사본말」] 1593년(선조 26)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공조 참의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이어 외직으로 나가서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유대진묘갈명」] 한편 1594년(선조 27) 선조는 명(明)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전라도에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유대진을 대호군(大護軍)으로 파견하였으나, 가족들을 만나는 등의 일로 일정을 지체한 것이 문제가 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7년 8월 5일, 선조 27년 9월 3일] 1599년(선조 32) 8월 22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6세였다.
[성품과 일화]
유대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순수하였으며 기질은 온화하고 중후하였다. 효우(孝友)와 돈목(敦睦)이 천성에서 우러나와 자연스러웠다. 화평하고 담박함을 스스로 지키며 교유를 일삼지 않고 물러나서 한미한 선비처럼 지냈다. 임종할 때에 상장(喪葬)을 모두 검약하게 하라고 유언하였으니 이에서도 공의 평소 뜻을 볼 수 있겠다.[「유대진묘갈명」]
또 성혼(成渾)은 “하늘이 좋은 자질을 부여하여 독후하고 견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받들어 습관이 천성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학문이 고명한 경지에 나아갔으나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습니다.”라고 하였다.[『우계집(牛溪集)』 연보보유(年譜補遺) 권3 「유대진제문(兪大進祭文)」]
[묘소와 후손]
유대진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선영 술좌(戌坐)에 있다.
그의 첫째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사평(司評) 신박(申博)의 딸인데,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둘째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도사(都事)남호(南琥)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유철증(兪哲曾)이고, 딸은 좌랑 정기강(鄭基岡)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에서 딸 둘을 낳았는데, 큰 딸은 첨지 허평(許坪)의 측실이 되었고, 작은 딸은 한부(韓頫)에게 시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