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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4년(중종 19)∼1594년(선조 27) = 71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와 우의정 등을 지냈다.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자는 지숙(止叔)이고, 호는 송당(松塘) 또는 퇴우당(退憂堂)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생원 유관(兪綰)이며, 어머니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사복시(司僕寺)정(正)으로 추증된 남충세(南忠世)의 딸이다.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유기창(兪起昌)의 증손자이고, 예조 판서(判書)유여림(兪汝霖)의 손자이다.
[명종 시대 활동]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0세였다.[『방목(榜目)』]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부정자(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가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거쳐 1555년(명종 10) 천거를 받아 예문관(藝文館)으로 옮겼다.[『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10년 3월 12일, 명종 10년 7월 9일] 이어 검열(檢閱)을 거쳐 대교(待敎)가 되었고,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를 거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승진하면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1557년(명종 12) 어사로 강원도에 파견되어 민심을 수습하였다. 돌아와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남쪽지방이 왜란을 겪자 경상우도평사(慶尙右道評師)로 천거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2년 1월 20일, 명종 12년 4월 15일, 『계곡집(谿谷集)』 권14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기성부원군 증시 충목 유공 신도비명(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杞城府院君贈諡忠穆兪公神道碑銘」 이하 「유홍신도비명」]
1558년(명종 13)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3년 4월 22일, 명종 13년 6월 3일, 명종 13년 6월 25일, 명종 13년 7월 4일] 1559년(명종 14)에는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옮겼다.[『명종실록』 명종 14년 1월 4일, 명종 14년 3월 8일, 명종 14년 3월 17일, 명종 14년 4월 18일, 명종 14년 6월 10일] 그해 8월 병조 정랑(正郎)을 거쳐 1560년(명종 15)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1561년(명종 16) 경기도사(京畿都事)가 되었으며, 1562년(명종 17) 병조 정랑이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4년 8월 29일, 명종 15년 5월 21일, 명종 16년 5월 6일, 명종 17년 4월 25일]
그리고 1563년(명종 18) 홍문관 교리로서 당시 실력자이던 이양(李樑)의 권력 남용을 탄핵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8년 5월 29일] 이와 관련해서 당시 유홍(兪泓)이 황삼성(黃三省)에게 “이양이 해괴하고 망녕되니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에 붙었던 무리는 가을 파리가 양지에 모이는 것과 같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황삼성이 그 말을 누설하는 바람에 유홍이 큰 화를 당할 뻔하였으나 이양이 축출되면서 무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1 「명종조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 같은 해 겨울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된 유홍은 1564년(명종 19)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8년 12월 7일, 명종 19년 1월 22일] 이때 유홍은 내시들의 폐단을 상소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복시 정으로 체직되었다. 그 후 감시(監試) 고관(考官)으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에게 장원을 주었고, 1565년(명종 20) 홍문관 응교(應敎)를 거쳐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이 되었다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상사(喪事)에 산릉도감(山陵都監) 도청(都廳)이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9년 2월 17일, 명종 20년 2월 19일, 명종 20년 3월 18일, 「유홍신도비명」]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전임되었다.[『명종실록』 명종 20년 10월 19일, 명종 21년 1월 5일] 한편 1565년(명종 20) 11월 첫 번째 부인인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상(喪)을 당하자,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서, 이듬해인 1566년(명종 21) 3월 춘천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유홍신도비명」]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 1) 호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1571년 (선조 4)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인 1572년(선조 5)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때 폭풍에 표류된 명(明)나라 사람을 구하여 명나라의 천자로부터 표리와 백금을 받았다.[『송당집(松堂集)』]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1573년(선조 6) 회령부사(會寧府使)가 되었으며, 다음해 3월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6월 7월 17일, 선조 7년 3월 19일, 「유홍신도비명」] 1575년(선조 8) 어머니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상을 당하였고, 복을 벗은 1577년(선조 10)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면직되었다.[『선조실록』 선조 11년 1월 9일] 1578년(선조 11) 10월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1579년(선조 12) 호조 참판을 지냈다. 1581년(선조 14)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 1582년(선조 15) 6월 특별히 가자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고, 1583년(선조 16) 공조 판서를 거쳐 1584년(선조 17) 2월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이어 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겸직하였으며, 8월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내다가, 그해 연말 내직으로 들어와 중추부 지사가 되었다.[「유홍신도비명」]
1587년(선조 20) 10월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는데, 이때 조선에서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잘못된 종계(宗系)를 시정해달라는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요청하였다. 이전부터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종계변무를 요청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명나라 태조의 유훈(遺訓)이라며 정정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결국 사은사 유홍이 바로 잡아주겠다는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선조실록』 선조 20년 10월 10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20년 9월 1일] 그러나 『대명회전(大明會典)』이 아직 반사(頒賜)되지 않고 있었으므로 선조는 유홍에게 명나라 조정에 청해서 거의 완성된 『대명회전』을 얻어오게 하였다. 유홍이 예부(禮部)를 찾아가 이를 청하였는데, 예부에서는 아직 황제의 어람(御覽)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주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나, 유홍이 거듭 요청한 끝에 예부 상서(尙書) 심이(沈鯉)가 그 정성에 감동하여 제본(題本)을 갖춰 순부(順付)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허락하여 부권(付卷)이 특별히 하사되고 칙서까지 내려졌다.[『선조실록』 선조 21년 3월 28일, 선조 21년 5월 2일, 선조 21년 5월 15일] 1588년(선조 21) 조선의 숙원 사업이었던 종계변무를 이루고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온 유홍은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하였으며, 의금부 판사(判事)를 겸직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1년 2월 1일]
한편 이듬해인 16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자가 매우 많았다. 이때 유홍이 “역옥(逆獄)을 다스리는 과정에 함부로 처리하는 일이 많으니, 정상을 잘 살펴서 형벌의 적용을 신중하게 하소서.”라고 하는 덕분에 평반(平反 : 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처음보다 공평하게 판결함)된 자들이 많았다.[「유홍신도비명」] 1590년(선조 23)에는 종계변무의 공을 인정받아 광국공신(光國功臣)과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책훈되었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기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이해 12월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3년 12월 1일, 「유홍신도비명」]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가 관서방면으로 파천하려고 하니, 유홍이 서울을 고수하여 사직(社稷)과 함께 죽을 것을 상소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4월 14일] 그해 5월에 우의정에 임명되어 신성군(信成君)과 정원군(定遠君)을 모시고 평안도로 갔으며, 선조가 평양을 떠나 영변부로 향할 때 선조를 수행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5월 3일, 선조 25년 6월 1일,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5월 1일] 그런 가운데 그해 6월 유홍은 선조에게 자신은 노쇠하여 요동으로 갈 수 없으니 세자에게 보내달라고 청하였고, 선조의 재가를 받았다.[『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15일] 그리하여 강원도에서 세자를 모시다가, 그해 10월 서울의 민심 수습과 서울 수복을 위하여 강화도로 파견되었으며, 11월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 8월 6일, 선조 25년 10월 11일, 선조 25년 11월 17일] 그러나 그가 도체찰사로는 적당하지 않다며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 그의 체직을 요청하였는데, 선조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거듭된 요청으로 인해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 체차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11월 18일, 선조 25년 12월 13일, 선조 25년 12월 15일, 선조 25년 12월 16일, 선조 26년 1월 26일]
이후 서울에 거주하며 우의정의 업무를 보던 유홍은 수성대장(守城大將)이 되어 불타 버린 도성을 소제(掃除)하고 민심을 수습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6년 5월 22일, 선조 26년 6월 14일, 선조 26년 9월 2일] 그런 가운데 선조가 서울로 돌아온 후 사헌부에서는 유홍이 도체찰사를 역임하던 당시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며 탄핵하였고, 선조는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나간 신하라며 그를 옹호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6년 10월 28일, 선조 26년 11월 5일, 선조 26년 윤11월 8일]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 1월 유홍은 해주(海州)에서 중전(中殿)을 모셨으며, 그해 11월 좌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사헌부로부터 정승의 지위에 오르고는 자신의 재산을 증식하는 것에만 급급할 뿐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다며 체차해달라는 논핵을 받았다.[『선조실록』 선조 27년 1월 11일, 선조 27년 11월 6일, 선조 27년 12월 14일, 『선조수정실록』 선조 27년 12월 1일] 선조는 대신을 가볍게 체차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으나, 사간원과 홍문관 등에서도 거듭 탄핵을 하는 바람에 유홍은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선조실록』 선조 27년 12월 16일, 선조 27년 12월 20일, 선조 27년 12월 22일, 선조 27년 12월 26일] 그리고 그해 12월 25일 해주 우사(寓舍)에서 병으로 졸하니, 향년(享年) 71세였다.[『선조실록』 선조 28년 1월 3일]
한편 유홍의 시와 묘갈명(墓碣銘),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을 모아서, 그의 손자 유백증(兪伯曾)이 간행한 4권 2책의 『송담집(松塘集)』이 전해지고 있다.
[성품과 일화]
유홍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됨이 관후(寬厚)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효우(孝友)가 독실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대사(大事)에 임하거나 대의(大議)를 결정할 때면 자신이 확연하여 일찍이 신념을 굽힌 적이 없었다. 논변하는 것을 보면 사기(辭氣)가 위연(偉然)하였다.[「유홍신도비명」] 유홍의 독실한 효행에 대해서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행상(行喪)하지 못한 까닭에 기월(忌月)을 당해서는 매번 27일 동안 행소(行素)함으로써 추모의 정을 부쳤으며, 모친을 여의었을 때는 시묘살이를 하며 몹시 서러워하였다. 종자(宗子)가 아니라서 입사(立祀)할 수 없는 까닭에 고비(考妣)의 허위(虛位)를 마련하여 출입할 때면 반드시 절하고 고했다.”고 하였다. 또 “조정에 벼슬할 적에는 의논이 위연(偉然)하여 자신이 매우 도타웠으나 재략이 모자라서 건명(建明)한 바가 없이 파직되었다.”고 전해진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7년 12월 1일]
1560년(명종 15) 유홍이 이조 좌랑이 되었을 때 사관은 그의 성품에 대해 “성품이 깐깐하고 사나우며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였다.”고 적었다.[『명종실록』 명종 15년 5월 21일] 또 1563년(명종 18) 그가 의정부 검상으로 임명되었을 때에는 “행동은 검속함이 없는 것 같았으나 마음가짐은 조금도 사곡(邪曲)함이 없었다.”고 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8년 7월 26일] 그러나 1594년(선조 27)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제수되었을 때 “때를 잘 만나 정승 자리를 차지하였으나 추솔하고 비루하여 조금도 볼 만한 것이 없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7년 11월 6일]
한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직후 왜적이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왔는데, 이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상주(尙州)에서 패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와 죽음을 면하였으며, 신립(申砬)은 충주(忠州)에서 패하여 전군이 몰살하였다. 선조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니, 이산해(李山海)가 제일 먼저 서쪽으로 피난할 계책을 건의하여 선조가 그대로 좇았다. 이때 유홍이 대궐에 나아가 사직을 지킬 것을 극력 간쟁하였으나, 선조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유홍도 먼저 자기 집 사람들은 피난 가도록 시켜놓고, 겉으로 이런 말을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간사함을 많이 미워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자해필담(紫海筆談)』]
[묘소와 후손]
유홍의 묘소는 하산곡동 선영 가장 윗자리에 조성되어 있다. 원래의 묘소는 임진왜란 중인 1595년(선조 28) 2월 고양에 임시로 조성하였으나 전쟁이 끝난 후 1612년(광해군 4) 12월 현재의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 261번지로 이장하였다. 두 명의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신도비는 이조 판서 장유(張維)가 짓고 자손인 유한지(兪漢芝)가 썼다.
첫째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교리 이준인(李遵仁)의 딸로 44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는데 뒤에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다. 이 사이에서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 유대술(兪大述)은 옥천군수(沃川郡守), 둘째 아들 유대건(兪大建)은 대사간(大司諫), 셋째 아들 유대진(兪大進)은 공조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딸은 현감 김탁(金琢)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부인 강릉 김씨(江陵金氏)는 서령(署令) 김광열(金光烈)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다. 1남 유대일(兪大逸)은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역임하였고, 1녀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 출가하였다. 또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 유대조(兪大造)는 전생서(典牲署)주부(主簿)를 역임하였고, 딸은 첨정(僉正) 유봉서(劉鳳瑞)의 첩이 되었다.[「유홍신도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