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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5년(광해군 7)~1653년(효종 4) = 39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효종(孝宗) 때의 문신. 병조 좌랑(佐郞)과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기사관(記事官) 등을 지냈다. 자는 일소(逸少)이고, 호는 백천당(百千堂)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종친부(宗親府)전적(典籍)오사겸(吳士謙)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시중(李時中)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오정방(吳定邦)이다. 장유(張維)의 문인이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9세가 되던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고, 2년 뒤 한성시(漢城試)에 수석을 차지하였다. 1644년(인조 22)에 재랑(齋郞)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호곡집(壺谷集)』 권18 「사헌부지평오공묘갈명(司憲府持平吳公墓碣銘)」] 1646년(인조 24)에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예(例)에 따라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24년 10월 6일, 『방목(榜目)』] 1647년(인조 25)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이행원(李行源)이 암행어사로 나가는 과정에서 물의를 일으켰다고 탄핵한 것이 문제가 되어 체직되었다.[『인조실록』 인조 25년 11월 10일, 인조 25년 11월 24일, 인조 25년 11월 28일]
1649년(효종 즉위년) 오핵(吳翮)은 사간원 정언으로서 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인조 대에 권세를 누렸던 김자점(金自點)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이듬해인 1650년(효종 1)에는 사서(司書)로 기사관을 겸하면서 『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효종실록(孝宗實錄)』 효종 즉위년 6월 22일, 효종 즉위년 7월 2일, 효종 즉위년 8월 28일, 효종 즉위년 9월 13일] 1651년(효종 2)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남중회(南重晦)와 유거(柳椐), 조석윤(趙錫胤) 등의 처벌이 과하다고 지적하였다가 체직되었다.[『효종실록』 효종 2년 11월 7일] 이들은 효종(孝宗)의 행차 때 횃불을 떨어뜨려 위사(衛士)의 말이 교량에 빠지게 한 사건의 책임자인 유철(兪㯙)을 장 80대에만 처했다고 하여 ‘왕을 모욕하고 법을 조롱’한 죄목으로 하옥되거나 유배되었었다.[『효종실록』 효종 2년 10월 29일, 효종 2년 11월 7일]
이어 1652년(효종 3)에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무렵 한희유(韓希愈)라는 사람이 자신의 딸이 강제로 궁궐에 뽑혀 들어간 것에 문제를 제기하였다가 내수사(內需司)에 잡혀 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효종실록』 효종 3년 4월 6일, 효종 3년 5월 27일] 이때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 이태연(李泰淵)이 이에 대한 부당함을 주장하며,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가뭄이 들자 궁녀들을 내보냈던 고사를 들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효종실록』 효종 3년 5월 27일, 효종 3년 6월 2일] 결국 이태연은 남의 사주를 받고 임금을 농락하였다고 하여 파직 및 추고를 당하였으며, 이태연을 적극 옹호하던 오핵 역시 파직과 추고에 처해졌다.[『효종실록』 효종 3년 6월 3일, 효종 3년 6월 9일]
이듬해인 1653년(효종 4) 다시 지평이 된 오핵은 왕이 급히 해야 할 일이 8가지가 있다며 상소하였다.[『효종실록』 효종 4년 1월 3일, 효종 4년 2월 29일, 효종 4년 3월 4일] 그 내용은 임금의 헤아림을 넓혀 언로(言路)를 열 것, 예경(禮敬)을 다하여 신료(臣僚)를 대우할 것, 공도(公道)를 밝혀 인재(人才)를 수용할 것, 수령을 가려 뽑아 백성들을 사랑하고 보살필 것을 독려할 것, 내사(內司)를 혁파하여 유사(有司)에게 넘길 것. 입안(立案)을 파기하고 궁노(宮奴)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 폐단이 되는 것을 면제시켜 민정(民情)을 위로할 것, 군정(軍政)을 정비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줄 것이었고, 효종은 이 8가지 조목에 대해 비변사(備邊司)로 하여금 적극 실현하도록 하였다.[『효종실록』 효종 4년 3월 4일]
한편 그해 10월 21일 병으로 집에서 사망하니, 향년 39세의 젊은 나이였다.
[성품과 일화]
오핵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14세에 아버지를 여의자,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이름난 큰형 오숙(吳䎘)과 함께 여막(廬幕)에서 지내면서 매우 엄격하게 학문을 독려하였고, 그로 인하여 시문(詩文)을 짓는 능력이 날로 진보하였다. 그러다가 장유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장유로부터 크게 격려를 받았다.[『호곡집』 권18 「사헌부지평오공묘갈명」]
오핵은 자품(資稟)이 순수하고 단정하고 곧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경험을 바탕으로 심사(心思)를 여러 차례 사장(詞章)에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척화삼신전(斥和三臣傳)』을 짓기도 하였다. 또한 오숙과 형수를 부모 섬기듯 하였고, 두 형과 더불어 항상 한 방에 거처하면서 의식(衣食)을 함께 하였다. 성색(聲色)과 화리(貨利)에 대해서는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겼고, 집은 비록 쇠락했으나 편안해 하였다. 일찍이 작은 집을 지어 놓고 『중용(中庸)』의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기백기천(己百己千)’의 뜻을 따라 ‘백천(百千)’이라고 하였다.[『호곡집』 권18 「사헌부지평오공묘갈명」]
그는 벼슬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관직에 있는 8년 동안 향리에서 거처한 것이 반이었는데, 대신 책 보는 것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성리(性理)의 책에 잠심(潛心)하였으며, 특히 사학(史學)에 해박하여 4권 분량의 『만세감(萬世鑑)』을 지었다.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는 후한(後漢)의 반고(班固)와 전한(前漢)의 사마 천(司馬遷)을 본받았고, 부(賦)는 『문선(文選)』을 탐닉하였다. 시에 있어서도 내용과 형식이 조화로웠다. 만년(晩年)에는 두세 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풍악산(楓岳山)에서 시를 읊조리는 것을 즐겼다. 속마음이 맑고 깨끗했으므로, 사람들이 ‘자지(紫芝)의 미우(眉宇)’에 비견하였다고 한다.[『호곡집』 권18 「사헌부지평오공묘갈명」]
[묘소와 후손]
오핵의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천덕산(天德山) 선영(先塋)에 있다. 부인 원주 원씨(原州元氏)와 봉분은 같고 묘혈(墓穴)은 다르게 하였다. 남용익(南龍翼)이 쓴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원주 원씨는 원진해(元振海)의 딸이며,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오두광(吳斗光), 차남은 참봉(參奉)오두룡(吳斗龍), 삼남은 오두웅(吳斗雄)이다. 딸은 감역(監役) 신원만(愼元萬)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호곡집』 권18 「사헌부지평오공묘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