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610년(광해군 2)~1670년(현종 11) = 61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자는 두원(斗元)이며, 본관은 동복(同福)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오단(吳端)이고, 어머니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이조 판서(判書) 심액(沈詻)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오백령(吳百齡)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직장(直長)오세현(吳世賢)이다. 둘째 누이가 복천부부인(福川府夫人)으로,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처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7년(인조 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방목(榜目)』] 1635년(인조 13) 성혼(成渾)과 이이(李珥)를 국학(國學)에 종사(從祀)하자는 의논이 처음으로 제기되어서 관학(館學)의 모든 생도들로 하여금 상소를 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오정일(吳挺一)이 상사생(上舍生) 채진후(蔡振後) 등과 더불어 성혼과 이이를 종사할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21년 5월 5일, 『미수기언(眉叟記言)』 기언별집 권16 「오판서신도비명(吳判書神道碑銘)」 이하 「오판서신도비명」로 약칭] 이 일로 상소를 주모한 오정일 등은 성균관(成均館)에서 이름이 삭제되어 이후 다시는 성균관에 들어가지 못하였다.[「오판서신도비명」] 그런 가운데 그는 1639년(인조 17) 알성시(謁聖試)에서 병과(丙科) 제1인으로 발탁되어 승문원(承文院)에 뽑혔다.[『방목』] 1642년(인조 20) 김휘(金徽)가 그를 예문관(藝文館)에 천거하였으나, 그가 채진후의 상소에 관여되어 있다고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는 바람에 천거가 중지되었다.[『인조실록』 인조 21년 5월 5일, 「오판서신도비명」]
이후 1643년(인조 21)부터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과 사간원 헌납(獻納)을 교대로 역임하다가 이듬해인 1644년(인조 22) 6월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이어 10월에는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함경도로 파견되었다.[『인조실록』 인조 21년 6월 4일, 인조 22년 2월 29일, 인조 22년 4월 4일, 인조 22년 5월 18일, 인조 22년 6월 19일, 인조 22년 10월 5일] 이때 오정일은 불법과 폐퇴(廢墬), 적폐(積弊)를 조목별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함경도 관리들을 상벌하였다.[『인조실록』 인조 22년 11월 4일, 「오판서신도비명」] 1645년(인조 23)에는 이조 좌랑을 거쳐 사간원 헌납이 되었는데, 이형익(李馨益)이란 의원이 방술(方術)을 가지고 임금의 병환을 치료한 것에 대해 그 죄상을 논박하다가 인조의 심기를 거슬리는 바람에 무안현감(務安縣監)으로 나갔다.[『인조실록』 인조 23년 3월 26일, 인조 23년 윤6월 8일, 인조 23년 윤6월 12일, 「오판서신도비명」]
1646년(인조 24) 중시(重試) 제3인에 발탁되어 태복시(太僕寺) 정(正)에 배수(拜受)되었으며, 이후 이조 정랑(正郞)과 사간원 사간(司諫),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역임하였다.[『인조실록』 인조 24년 7월 20일, 인조 24년 12월 26일, 인조 25년 3월 18일, 인조 25년 6월 24일, 인조 26년 윤3월 2일, 『방목』] 이어 1648년(인조 26)에 다시 사간원 사간을 거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그해 12월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인조실록』 인조 26년 윤3월 11일, 인조 26년 윤3월 28일, 인조 26년 12월 6일] 이때 청(淸)나라 사신이 계속해서 각종 요구를 하자, 오정일은 청의 요구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동시에, 엄격히 예절을 지켰다. 그러자 청에서도 더 이상 조선을 만만하게 보지 않았으며, 이후 사자(使者)가 경내에 들어오면 반드시 오정일에 대해서 물었다고 전해진다.[「오판서신도비명」]
[효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년) 효종(孝宗) 즉위 후, 오정일은 승정원 승지(承旨)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 효종 즉위년 12월 10일] 이어 1651년(효종 2)에는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어 교서(敎書)를 받들고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옥책(玉冊)과 숙녕전(肅寧殿 : 인열왕후의 혼전(魂殿))에 올릴 신주를 썼으므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오판서신도비명」] 그리고 그해 10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652년(효종 3) 5월에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효종실록』 효종 2년 10월 4일, 효종 3년 5월 5일]
1655년(효종 6)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에 제수되어 유정량(柳廷亮), 강호(姜鎬)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와서는 청나라가 조선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같은 해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효종실록』 효종 6년 1월 15일, 효종 6년 4월 12일, 효종 6년 8월 9일, 효종 6년 9월 25일, 효종 6년 12월 7일, 효종 6년 12월 17일] 그런데 이듬해인 1656년(효종 7) 천안군수(天安郡守) 서변(徐忭)이 오정일이 허적(許積)과 이완(李浣), 원두표(元斗杓) 등과 함께 역적 모의를 하였다고 무고(誣告)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일은 오정일의 집에서 그의 둘째 누이의 남편인 인평대군과 허적 등이 모여 술을 마시던 중에 승정원 승지 유도삼(柳道三)이 술에 취해 인평대군에게 ‘소인(小人)’이라 하지 않고 ‘소신(小臣)’이라 칭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효종실록』 효종 7년 5월 12일] 조사 끝에 이 사건은 누군가가 몰래 서변에게 사주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효종은 이 일의 발단을 다른 당파와의 싸움으로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서변을 비롯하여 모의를 아는 자 모두를 처벌하는 것으로 이를 해결하였다.[『효종실록』 효종 7년 5월 14일, 「오판서신도비명」] 이에 오정일은 “소신의 이름이 적(賊)의 공초에 나왔으니, 만약 해와 달처럼 밝은 성상이 위에 계시지 않았다면 어찌 감히 다시 천안(天顔)을 우러러보기를 기대하였겠습니까. 또 신이 근시(近侍)로 재직 중이니 형세상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삭탈관직 시켜 여생을 보존하게 하소서.”라고 하며 관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으나, 효종이 허락하지 않았다.[『효종실록』 효종 7년 5월 13일]
그리고 그해 오정일은 다시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인 1657년(효종 8)에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 효종 7년 윤5월 30일, 효종 8년 3월 29일] 그런데 이때 사간원 사간 김징(金澄) 등이 사헌부 지평 정창도(丁昌燾)가 가볍고 천박하여 대간(臺諫)에 적합하지 않은데, 인재가 없어서 등용되었다며 체차할 것을 주장하였다.[『효종실록』 효종 8년 4월 19일] 그러자 오정일이 정창도를 발탁하는데 참여한 관계자로서 이 탄핵에 반대하다가 체직되었다.[『효종실록』 효종 8년 4월 20일] 그 후 오정일은 이조 참판과 경연청(經筵廳)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사헌부 대사헌, 춘추관(春秋館)동지사(同知事), 사간원 대사간, 공조 참의(參議) 등을 역임하였다.[『효종실록』 효종 8년 6월 16일, 효종 8년 10월 7일, 효종 9년 2월 24일, 효종 9년 4월 10일, 효종 9년 4월 11일, 효종 9년 6월 16일, 효종 10년 1월 16일]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이 시기는 효종이 아직 빈소에 있고 인산(因山 : 국장(國葬))의 이작(移作)에 재력이 바닥이 나서 백성들의 사역이 급하던 때였다.[『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 즉위년 7월 4일, 「오판서신도비명」] 오정일은 계획을 잘 세워 주도면밀하게 일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을 관리하니, 법을 범하거나 기한을 어기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며, 매질을 하지 않았더니 백성들이 덕스럽게 여겼으므로, 경기도에 그 혜택비(惠澤碑)를 세웠다.[「오판서신도비명」]
이듬해인 1660년(현종 1년)에는 춘추관 동지사와 승정원 도승지, 개경유수(開京留守)를 역임하였다.[『현종실록』 현종 1년 5월 21일, 현종 1년 8월 1일, 현종 1년 11월 22일] 개경은 풍속이 이(利)를 좇고 포악하여 백성들끼리 서로 송사하는 일이 많았는데, 오정일은 항상 법대로 다스리며 사회를 안정시켰다. 한편 청나라 사신들은 개성을 대도(大都)라 칭하며 화물(貨物)이 풍부할 것으로 여기고 갑절의 진상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정일은 이를 들어주지 않고 언제나 서로(西路)의 사례(事例)대로 하여 영식(令式)으로 삼았으므로, 개경이 편안해졌다. 그리하여 오정일이 떠나자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그를 기념하였다.[「오판서신도비명」] 이후 오정일은 1662년(현종 3)부터 형조 참판과 병조 참판, 도승지, 호조 참판, 경기도관찰사, 형조 판서, 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 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현종실록』 현종 3년 11월 11일, 현종 3년 12월 20일, 현종 4년 3월 26일, 현종 4년 4월 22일, 현종 4년 5월 19일, 현종 4년 12월 17일, 현종 5년 11월 3일, 현종 5년 11월 13일]
그러다가 1665년(현종 6)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는데, 사헌부 장령(掌令) 김익렴(金益廉)이 오정일이 옥송(獄訟)을 결단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며 탄핵하였다.[『현종실록』 현종 6년 10월 20일] 이에 대해 대사헌 정지화(鄭知和)가 김익렴의 탄핵안을 매우 상세하게 반박하였고, 결국 현종은 김익렴의 소위(所爲)가 바르지 않다 하여 체직을 명하였다.[『현종실록』 현종 6년 10월 21일] 이어 현종은 오정일을 한성부판윤에 임명하였으나, 오정일은 면직을 청하였고 현종은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현종실록』 현종 6년 11월 21일] 1668년(현종 9)부터는 의금부 지사와 형조 판서, 한성부판윤, 공조 판서, 관상감(觀象監)제조(提調) 등을 역임하였다.[『현종실록』 현종 9년 9월 25일, 현종 9년 10월 4일, 현종 9년 10월 25일, 현종 10년 2월 13일, 현종 10년 5월 1일]
그런 가운데 1670년(현종 11) 오정일은 다시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현종실록』 현종 11년 1월 15일] 그러자 사간원 정언(正言)홍억(洪億)이 형조 판서에 재임할 때도 말이 많았다며 그를 탄핵하고자 하였는데, 또 다른 사간원 정언인 강백년(姜栢年) 등이 이를 반대하면서 도리어 홍억이 체직되었다.[『현종실록』 현종 11년 1월 21일, 현종 11년 1월 22일] 이때 오정일은 자신의 모든 직임을 사직하였다.[『현종실록』 현종 11년 3월 5일] 그리고 그해 2월 신덕왕후(神德王后)를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할 때에 제주(題主)함으로써 그는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현종실록』 현종 11년 윤2월 17일] 같은 해 8월 27일에 사망하였으니, 향년 61세였다.[『현종실록』 현종 11년 8월 27일]
[성품과 일화]
오정일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7세에 운(韻)을 받아 시부(詩賦)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돈후(敦厚)하고 자혜로웠으며, 어버이를 섬기고 형제와 화목하게 지냈다. 그는 남들로 하여금 친할 수 있게 하되 버릇없이 다가붙을 수 없게 하였고, 입으로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으며 한 가지 착한 일을 들으면 매우 기뻐하였다.[「오판서신도비명」] 또한 용의가 아름답고 담소를 잘하였으며 온화할 뿐만 아니라 재능과 국량도 있었다.[『현종실록』 현종 11년 8월 27일] 초서와 예서를 잘하였으나 남에게 자랑하지도 않았다.[「오판서신도비명」]
이렇듯 성품이 평온하고 조용함을 좋아하였으며, 관위(官位)가 이미 성(盛)하였으되 담박(澹泊)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세도(世道)가 날로 어지러워짐을 보고 어찌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떠나지 않고 이르기를, “내가 세록지신(世祿之臣 : 대대로 나라에서 녹봉을 받는 신하)으로서 의리상 떠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일이 없으면 친애하는 몇 사람과 더불어 집 뒤의 산석(山石)이 아름다운 곳에 올라 한가하게 소산(蕭散)하면서 즐거워하였다.[「오판서신도비명」] 다만 만년에 투기하는 첩을 두었는데, 말썽을 많이 초래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샀다.[『현종실록』 현종 11년 8월 27일]
이러한 평가와 달리 주색을 좋아하고 행실이 좋지 않아서 세상 사람들이 천하게 여겼으며,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였고, 누이의 남편인 인평대군을 믿고 사류(士類)를 모함하였다는 평가도 있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현종 11년 8월 27일, 『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6년 7월 3일]
[묘소와 후손]
오정일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의 선영(先塋)에 있으며, 허목(許穆)이 쓴 비명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