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40년(세종 22)~1498년(연산군 4) = 59세]. 조선 전기 세조(世祖)~연산군(燕山君) 때의 문신.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과 제용감(濟用監)부정(副正) 등을 지냈다. 자는 국진(國珍)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낸 안지귀(安知歸)이고, 어머니 상주 박씨(尙州朴氏)는 형조 판서(判書)를 지낸 박이창(朴以昌)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된 안구(安玖)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이다.
[세조~성종 시대 활동]
1462년(세조 8)에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여러 번 과거에 나아갔으나 뜻을 얻지 못하였다. 1465년(세조 11)에 음서(蔭敍)로 중부녹사(中部錄事)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479년(성종 10)까지 영릉참봉(英陵參奉)과 풍저창(豊儲倉) 부봉사(副奉事), 상서원(尙瑞院)직장(直長), 전생서(典牲署)봉사(奉事), 통례원(通禮院)인의(引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공조 좌랑(佐郞), 형조 좌랑, 사헌부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9년 5월 25일, 『허백정집(虛白亭集)』 권3 「제용감부정안공묘지(濟用監副正安公墓誌)」 이하 「안선묘지명」으로 약칭] 이런 가운데 1475년(성종 6)에는 선농제(先農祭) 때 작세관(爵洗官)을 맡았으며, 1478년(성종 4)에는 사헌부 지평으로서 관기 확립과 풍속 교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사사(寺祀)의 혁파를 강력히 주장하였다.[『성종실록』 성종 6년 1월 25일, 성종 9년 7월 23일, 성종 9년 7월 28일, 성종 9년 8월 25일]
이후 외직으로 나가 통천군수(通川郡守)가 되었고, 1484년(성종 15)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성종실록』 성종 15년 10월 26일, 「안선묘지명」] 그 뒤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에 임명되었으나, 1488년(성종 19)에 과거 어머니의 상(喪) 동안에 기녀를 간음한 죄로 추국당하던 김석(金磶)과 관련한 무고(誣告)를 하였다며 파직되었다.[『성종실록』 성종 9년 11월 3일, 성종 18년 11월 10일, 성종 18년 11월 18일, 성종 19년 1월 13일, 성종 19년 2월 20일] 이때 안선은 의금부(義禁府)에서 김석이 자신의 5촌인 안관후(安寬厚)의 노비를 죽인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무고하였다고 밝혔다.[『성종실록』 성종 19년 2월 13일] 이후 이창신(李昌臣), 권유(權瑠), 윤민(尹慜) 등이 안선이 계획적으로 행한 행동이 아니라거나 김석의 살인은 명백하다는 등으로 변호하였으나, 성종은 안선을 조정에 부르는 것을 반대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9년 2월 21일, 성종 22년 9월 26일]
그러다가 훗날 다시 서용(敍用)할 것을 허락하였으므로, 안선은 전옥서(典獄署)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가 곧 만경현령(萬頃縣令)이 되었다. 그리고 만경현령 당시의 치적을 인정받아 그는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한성부서윤을 거쳐 제용감 부정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윤11월에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9세였다.[「안선묘지명」]
[성품과 일화]
안선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화평하면서도 바르고, 어버이에게 효성을,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 사귀기를 좋아하였고 담론(談論)을 즐겨 한 때의 명사가 모두 그 벗이었다. 평생 산업(産業)에 마음을 두지 않아 집에 비록 식량이 자주 떨어졌으나 마음 쓰지 않았으니 군자라 하겠다.[「안선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