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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7년(세종 19)~1503년(연산군 9) = 67세]. 조선 전기 세조(世祖)~연산군(燕山君)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과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공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가헌(可獻)이고,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낸 안지귀(安知歸)이고, 어머니 상주 박씨(尙州朴氏)는 형조 판서(判書)를 지낸 박이창(朴以昌)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된 안구(安玖)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이다.
[세조~연산군 시대 활동]
1459년(세조 5) 23세로 식년시(式年試)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며, 아버지 안지귀가 세상을 떠나자, 세조는 그를 사재감(司宰監)참봉(參奉)으로 임명하였다.[『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권4 「고가선대부공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안공행상(故嘉善大夫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安公行狀)」 이하 「안호행장」으로 약칭] 1466년(세조 12)에 고성별시(高城別試)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이후 예문관(藝文館)봉교(奉敎)와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에 임명되었고, 예에 따라 장흥고(長興庫)주부(主簿)로 승진하였다.[「안호행장」] 그런 가운데 1467년(세조 13)에는 왕명을 받고 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북정론(北征錄)』의 내용을 보충하기도 하였다.[『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13년 10월 13일]
1470년(성종 1)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연경(燕京)에 성절사(聖節使)로 갔다가 돌아와서 사옹원(司饔院) 판관(判官)이 되었다.[「안호행장」] 1472년(성종 3) 조봉대부(朝奉大夫) 행 사헌부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가 호조 정랑(正郞)으로 되었으며, 이후 의정부 검상(檢詳), 의정부 사인(舍人), 지제교(知製敎), 사재감 부정(副正), 사간원 사간(司諫), 사도시(司䆃寺) 부정 등을 지냈다.[『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3년 12월 9일, 성종 10년 9월 18일, 성종 13년 6월 28일, 「안호행장」] 또한 1481년(성종 12)에는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전라도에 가서 경작(耕作)을 시찰하였고, 가을에는 충청도에 가서 재상(災傷)을 답험(踏驗)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2년 5월 17일, 「안호행장」] 그리고 군기시(軍器寺)정(正)과 장악원(掌樂院) 정, 군자감(軍資監) 정 등을 역임하는 동안 군적(軍籍)의 수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7년 1월 17일, 「안호행장」] 1487년(성종 18)에는 홍문관(弘文館)직제학(直提學)이 되었고 좀 뒤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니,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였다.[『성종실록』 성종 18년 10월 26일 성종 19년 윤1월 13일] 한편 이때 그가 홍문관에 들어간 것을 두고 실력이 없음에도 이미 홍문관에 들어간 동생 안침(安琛) 덕에 홍문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8년 10월 26일, 「안호행장」]
1488년(성종 19) 원각사(圓覺寺)가 불이 나는 바람에 중수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안호는 수차례 걸쳐 재목과 기와는 모두 백성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고, 게다가 조선은 불교를 숭상하지 않으므로, 중수를 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차자(箚子)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성종실록』 성종 19년 윤1월 13일, 성종 19년 윤1월 14일, 성종 19년 윤1월 15일] 그해 10월 안호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는데, 이무렵 조정은 임사홍(任士洪)과 임희재(任熙載)의 문제로 떠들썩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9년 10월 2일, 성종 19년 10월 25일]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가 충청향시(忠淸鄕試)에 합격한 것과 관련하여 문제가 제기되자, 임사홍이 그에 대한 무고를 주장하며 사헌부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국문하여 사실을 밝힐 것을 주장하였으나, 성종은 지나친 감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밝힌 것이므로 국문을 허락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성종실록』 성종 19년 10월 11일, 성종 19년 10월 14일, 성종 19년 10월 17일, 성종 19년 10월 19일] 이런 가운데 임사홍의 또 다른 아들로 현숙공주(賢肅公主)의 부마(駙馬)인 풍천위(豐川尉) 임광재(任光載)가 임사홍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조정에서는 임사홍 등을 국문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성종실록』 성종 19년 10월 19일, 성종 19년 10월 20일, 성종 19년 10월 21일, 성종 19년 10월 22일] 그러나 성종은 여전히 임사홍을 보호하며 국문을 허용하지 않았고, 이러한 때에 사간원 대사간이 된 안호가 다시 그에 대한 국문을 주장하였으나, 성종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성종실록』 성종 19년 11월 1일, 성종 19년 11월 2일, 성종 19년 11월 7일] 이뿐만 아니라 성종은 안호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임사홍을 절충장군(折衝將軍) 부호군(副護軍)에 제수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9년 11월 15일] 그러자 안호는 성종의 이러한 처사에 적극 반대하며 사간원 대사간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성종은 언로를 막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이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성종실록』 성종 19년 11월 17일, 성종 19년 11월 19일, 성종 19년 11월 26일, 성종 19년 12월 1일, 성종 19년 12월 3일, 성종 19년 12월 4일]
이후 안호는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 병조 참지(參知) 등을 역임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0년 5월 18일, 성종 21년 2월 5일, 「안호행장」] 1491년(성종 22)에는 정조사(正朝使) 이육(李陸)과 함께 관압사(管押使)로 연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2년 2월 2일, 성종 22년 3월 4일, 성종 22년 11월 5일] 이무렵 그는 대신(大臣) 이극증(李克增) 등과 더불어 『대전속록(大典續錄)』을 편찬하였으며, 이듬해인 1492년(성종 23)에는 중추부 첨지사가 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3년 6월 15일, 「안호행장」] 이어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는데, 그해 11월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인혜대비(仁惠大妃)가 성종에게 중이 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개정해 달라면서 불교 수호를 간청하자, 안호는 불교가 이단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이에 대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3년 6월 26일, 성종 23년 11월 21일, 성종 23년 11월 24일, 성종 23년 12월 1일, 성종 23년 12월 5일] 이듬해인 1493년(성종 24) 안호는 다시 중추부 첨지사가 되었으며, 이어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4년 윤5월 22일, 성종 25년 7월 2일]
연산군 대에 들어서면서 안호는 이조 참의 및 형조 참의, 황해도관찰사, 병조 참지, 사간원 대사간, 예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3년 8월 29일, 연산군 4년 3월 18일, 연산군 4년 10월 30일, 연산군 5년 11월 23일, 연산군 6년 4월 11일, 연산군 8년 11월 5일] 그러는 가운데 1500년(연산군 6) 연산군이 대간(臺諫)들이 논계를 한 것을 꼬투리 삼아 국문을 하자 사간원 대사간으로서 이에 대하여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6년 4월 12일, 연산군 6년 4월 17일] 그리고 1503년(연산군 9) 9월 공조 참판이 되었는데, 당시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였다. 이 해 12월 19일 병으로 사제(私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7세였다.[「안호행장」]
[성품과 일화]
안호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태어나서부터 기품과 도량이 특이하였으므로 그 아버지가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우리 집안 8세에 모두 과거(科擧)로 드러났고 청검(淸儉)을 전하였는데, 이 아이가 그 세업(世業)을 실추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안호행장」]
평소에 종일 단정히 앉았으나 옷이 구겨지지 않았고 사람과의 접촉에는 화기(和氣)가 감돌았다. 젊어서 벼슬길에 들어서 부지런히 봉공(奉公)하였고 비록 낮은 관직이라 하더라도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크고 작은 일을 가릴 것 없이 의(義)에 맞도록 힘썼고 남의 말을 듣고 가벼이 시비하지 않았다.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서는 각자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여 끝내 합의가 되지 않으면 원(院)을 나가 합문(閤門)에서까지 서로 공박하였으나, 그는 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불러 물어보라는 명이 있으면 비로소 사실대로 답변을 하였다. 또한 전주부윤이 되어서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취침하여 민사(民事)만을 생각하는 한편 봄가을로 직접 향사례(鄕射禮)를 행하여 예양(禮讓)을 가르쳤고 성(城) 안에 자그마한 학교를 만든 다음 사람을 가려 스승으로 삼아 미성년자로 하여금 모여 배우게 하였다. 아울러 관직에서 물러날 때 그 봇짐이 처음 갔을 때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 청렴에 감탄하였다.[「안호행장」]
술을 즐겨 친척들과 벗을 만날 때마다 담소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날이 어두워지는 것도 몰랐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좋아하는 일도 없고 성낼 일도 없으며, 남을 추켜올릴 생각도 없고 남을 헐뜯을 생각도 없으며 사람을 가르칠 생각도 없다.” 하였는데, 그러하였기 때문에 나이 거의 70세가 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고 모발이 옻칠을 한 것과 같았다. 죽음에 임해서는 관대(冠帶)를 갖추라 재촉하고는 술을 따를 것을 명한 후 가족들과 두루 마시게 하면서 길게 웃다가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말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안호행장」]
[묘소와 후손]
안호의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28번지에 있으며,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합장하였다. 박은(朴誾)이 지은 그의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
부인 안동 김씨는 전농(典農) 주부(主簿) 김철구(金哲鉤)의 딸이며, 아들이 없어 아우 안침(安琛)의 차남 안처선(安處善)을 후사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