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346년(충목왕 2)∼1411년(태종 11) = 66세]. 고려 공민왕(恭愍王)~조선 태종(太宗) 때의 문신. 고려 때 공조 전서(典書) 등을 지냈고, 조선에 와서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했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아버지는 고려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안원숭(安元崇)이고, 어머니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중찬(中贊) 원선지(元善之)의 딸이다.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5대손이다.
[고려 시대 활동]
1374년(공민왕 23) 29세 때 고려 식년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1390년(공양왕 2) 공양왕(恭讓王)이 한양으로 천도하려고 하자, 당시 형조 판서(判書)를 역임하던 안원(安瑗)이 술사(術士)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였다. 공양왕이 그 말을 받아들여 천도를 중지하였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공양왕 2년 12월]
한편 1392년(공양왕 4) 6월 조준(趙浚) 등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고려의 구신(舊臣)들을 매우 껄끄럽게 여겼다.[『동사강목(東史綱目)』] 이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는 밀직사(密直司) 지신사(知申事)인 안원과 전 삼사(三司)판사(判事)우현보(禹玄寶) 등을 먼 곳으로 유배 보내고,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을 소환하였다.[『고려사절요』 공양왕 4년 6월] 고려가 망하자 안원은 서원(瑞原)의 별장에서 은거하였다.[『기년편고(紀年便攷)』5권]
[조선 시대 활동]
1392년(태조 1) 태조는 즉위와 함께 즉위 교서를 내리며 안원을 비롯하여 성석린(成石璘)과 이윤굉(李允紘) 등을 각기 본향(本鄕)에 안치(安置)시켰다.[『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 1년 7월 28일] 이후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성은 반드시 고려의 옛 신하로서 덕망이 있는 자로 진무케 하고자 하였다. 이에 안원을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 유후(留後)로 삼았는데, 그가 힘써 그 직책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기년편고』5권]
1401년(태종 1) 문하부(門下府) 판사 조준과 함께 안원이 우군(右軍) 동지총제(同知摠制)로서 명(明)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다.[『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1년 6월 19일] 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 『대학연의(大學衍義)』와 『통감집람(通鑑集覽)』, 『사림광기(事林廣記)』 등을 구해서 태종에게 바치고, 황제가 장차 연왕(燕王)을 치려 한다는 것을 보고하였다.[『태종실록』 태종 1년 12월 9일] 1404년(태종 4) 경상도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가 되었다.[『태종실록』 태종 4년 3월 10일] 이후 1407년(태종 7)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10월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 강회중(姜淮仲) 등과 태종에게 민무구(閔無咎)ㆍ민무질(閔無疾)ㆍ신극례(辛克禮) 등을 불충죄로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태종실록』 태종 7년 10월 3일, 태종 7년 10월 29일] 이어 그해 11월 대간(臺諫)에서 연복사(演福寺)에 모여 민무구ㆍ민무질ㆍ신극례 세 사람의 죄를 다시 청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에 안원이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당하였다.[『태종실록』 태종 7년 11월 4일] 이어 그는 다음 달인 12월에 노병을 들어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이 만류하고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에 임명하였다.[『태종실록』 태종 7년 12월 8일] 그리고 1408년(태종 8) 5월 태종은 안원을 동서강등처병마도절제사(東西江等處兵馬都節制使)로 삼아, 왜적을 막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태종 8년 5월 17일]
그러던 가운데 1411년(태종 11) 11월 안원이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나니, 태종이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사제(賜祭)하였다. 부의로 종이 1백 50권, 촉(燭) 10정(丁)을 내려 주었다.[『태종실록』 태종 11년 11월 13일]
[성품과 일화]
안원의 성품에 대해서는 “호상(豪爽)하고 얽매임이 없었다.”는 평가가 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 「태조조(太祖朝) 고사본말(故事本末)」] 또한 너그럽고 느릿느릿하여 평생에 빨리 말하지 않고 바쁜 기색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왜구가 승천부(昇天府)를 함락하였는데도 그는 오히려 집에서 책만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종이 “왜구가 닥쳐왔습니다.” 하고 알렸으나, “아직은 활 쏘는 것을 익히고 황급하게 굴지 말라.”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왜구가 물러갔다고 한다.[『용재총화(慵齋叢話)』 권3] 이러한 성품에 대해서는 태종도 잘 알고 있어서 1407년(태종 7) 사간원이 민무구 등의 죄를 청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은 대사헌 안원을 탄핵하자 태종은 “내가 일찍이 안원과 더불어 같이 대언(代言)이 되었었는데, 성품이 본래 굼뜨기는 하나, 마음이 속되지는 않다. 또 안원의 말이 간절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만 내가 사은(私恩)에 끌려서 재단(裁斷)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루 동안 참여하지 못한 것은 특히 나이 늙어서 그런 것이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전자에 대간에서 한두 사람이 이 일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지만, 안원은 이런 자와 비교되지 않는다.” 라며 안원을 두둔하였다.[『태종실록』 태종 7년 11월 4일]
안원은 어려서부터 매와 개를 좋아하였다. 처가에 있을 때에는 왼팔에 매를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으니, 장인이, “책을 읽으려면 매를 그만두든지 매를 좋아하려면 책을 그만둘 것이지, 어찌 번거롭게 두 가지 일을 다 행하느냐.” 하자, 안원이 “글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직업이니 폐할 수 없고, 성질이 매와 개를 좋아하니, 또한 폐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를 행하더라도 어긋나지 않으면 어찌 이치에 해가 된다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한결같았다. 그리하여 하루는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이 임진강을 건너 한양으로 향하다가 길 옆 산골짜기에서 책 읽는 소리를 듣고, 그 종에게, “이는 반드시 안옹(安翁)일 것이다.” 하였는데, 가서 보니 안원이 왼쪽 팔에 매를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책장을 넘기며 나무에 의지하여 책을 읽고 있었으므로 서로 보고 크게 웃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용재총화』 권3]
첫째 부인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남휘주(南輝珠)의 딸로 1남을 두었는데, 내자시(內資寺) 판사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이다. 둘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윤척(尹陟)의 딸로 5남 5녀를 낳았다.[『태종실록』 태종 11년 11월 13일] 1남은 안종례(安從禮)이고, 2남 안종의(安從義)는 보령현감(保寧縣監)을 지냈으며, 3남은 돈녕부(敦寧府)첨지사(僉知事)를 역임한 안종렴(安從廉)이다. 4남은 전라도경력(全羅道經歷) 안종신(安從信)이고, 5남은 위위시(衛尉寺) 판사를 지내고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에 봉해진 안종검(安從儉)이다. 또한 1녀는 김효공(金孝恭)에게, 2녀는 최굉(崔宏)에게, 3녀는 이행(李行)에게, 4녀는 김문(金汶)에게 5녀는 김환(金懽)에게 각각 시집갔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