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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0년(인조 18)~1684년(숙종 10) = 45세]. 조선 중기 말부터 후기 초의 현종(顯宗)~숙종(肅宗) 때의 문신. 자는 성윤(聖潤)이고,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심약한(沈若漢)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를 지낸 심억(沈檍)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를 지낸 심광세(沈光世)이다.
[현종 시대 활동]
1662년(현종 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669년(현종 10) 정시(庭試)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가 사관(史官)으로 추천받았다.[『방목(榜目)』] 1671년(현종 12) 제주관(題主官)으로 있을 때, 여주에 가서 관리에게 형벌을 남용했다는 일로 탄핵을 받았다.[『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 12년 7월 26일] 이듬해인 1672년(현종 13)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와 사서(司書)를 지낸 후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승급되었다.[『현종실록』 현종 13년 6월 24일, 현종 13년 9월 10일, 현종 13년 10월 26일] 그러다가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을 마친 다음에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명곡집(明谷集)』 권17 「홍문관응교증이조참판심공묘갈명(弘文館應敎贈吏曹參判沈公墓碣銘)」 이하 「심유묘갈명」]
[숙종 시대 활동]
1680년(숙종 6) 여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숙종이 남인(南人)을 물리치고 서인(西人)을 등용할 때 심유(沈濡)는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 이후 윤휴(尹鑴)와 민종도(閔宗道)는 귀양을 보내고 민암(閔黯)은 삭출(削黜)하고 이정(李楨 : 복창군(福昌君))과 이남(李柟 : 복선군(福善君)) 등에 대해서는 안치(安置)할 것을 주장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6년 4월 2일] 경신환국이 끝나고 보사공훈(保社功勳)을 결정할 때에 “보사(保社)한 여러 신하들이 비록 노고는 있으나 이는 신하된 직분일 뿐입니다. 공훈을 책록(策錄)하는 일은 중대하여 경솔히 시행해서는 안 되오니, 청컨대 공훈 책록을 중지하소서.”라고 하였다가 체직(遞職)되어 사대문(四大門) 안의 과시(課試)를 관장하게 되었다.[「심유묘갈명」] 이후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고, 다시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옮겼다가 사헌부 집의(執義)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숙종실록』 숙종 6년 6월 11일, 숙종 6년 7월 23일, 숙종 6년 윤8월 8일]
가을에 국옥(鞫獄)이 재차 있었는데, 김익훈(金益勳)과 신범화(申範華) 등 5인을 훈적(勳籍)에 추가하여 기록하라는 명이 있었다. 신범화는 처음에 역적의 집안과 서로 친밀하였으므로 재차 국옥에서 역적의 공초(供招)에 그의 이름이 나왔는데, 원훈(元勳)인 김석주(金錫胄)와 절친한 사이여서 ‘역적들의 정상을 형찰(詗察)해 훈신(勳臣)에게 보고한 것’으로 공적을 삼아 그의 죄를 덮어 주려 하였다. 이에 대해 심유는 “신범화가 비록 원훈에게 사사로이 고했다고는 말하지만 그의 이름이 급서(急書)에 있지 않았고, 또 일찍이 내가 문사랑(問事郞)이 되어 국옥에 참여하여 ‘신범화가 역적의 원로(元老)를 위해 고한 바에 끌어대었다.’는 말을 직접 들었으니 지금 훈적에 추가로 기록하는 일은 심히 마땅하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 죄를 바루어야 된다.”고 하면서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김석주가 변명하면서 “조정의 의논이 반역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 한다.”고 하며, “심군이 신범화와는 인척 간의 정의(情誼)가 있으면서도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배척하였다. 이에 심유는 “신범화와 신(臣)은 7촌의 친척이 되지만 법에 있어 서로 피할 수 없고 내 직분이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감히 사사로이 비호하여 논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상신(相臣) 이상진(李尙眞)이 감탄하여 칭찬하면서 “매우 대각(臺閣)의 체통을 얻었다.”고 말하며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에 임명하였다.[「심유묘갈명」]
이듬해인 1681년(숙종 7) 심유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와 응교(應敎), 그리고 수찬에 계속해서 제수되었는데, 관료들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민유중(閔維重)이 국구(國舅)의 신분으로 비국(備局)과 경연(經筵)의 직무를 그대로 맡는 것은 옳지 않다.”고 논하여 결국 민유중은 사임 및 체직되었다.[『숙종실록』 숙종 7년 1월 19일, 숙종 7년 1월 28일, 숙종 7년 3월 17일, 숙종 7년 8월 1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정종(定宗)의 시호도감(諡號都監) 및 선왕(先王)의 실록을 중수(重修)하는 도감(都監) 도청(都廳)으로 차출되었으며, 이어서 사헌부(司憲府) 집의와 사간원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숙종실록』 숙종 7년 11월 3일, 숙종 7년 11월 28일, 「심유묘갈명」]
그러던 가운데 1682년(숙종 9)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행위가 발생하여 심유 등이 파방(罷榜)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이를 거부하며 체직시켰다.[『숙종실록』 숙종 8년 11월 2일] 민정중(閔鼎重)과 이상진(李尙眞)이 함께 환수하여 줄 것을 청하자 이를 따랐는데, 결국 심유가 나오지 않았다.[「심유묘갈명」] 이후 계속 삼사(三司)에 의망(擬望)되었으나 관직에 제수되지 못하다가, 할아버지인 심억(沈檍)의 상을 다 마치지 못하고 1684년(숙종 10)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45세였다.[「심유묘갈명」] 사후 차남 심수현(沈壽賢)이 영의정에까지 제수되어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성품과 일화]
심유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면서도 마음속이 강하였고, 사람을 상대할 때 안팎이 한결같았다. 항상 옛사람의 풍절(風節)을 사모하여 선행을 즐기며 의기를 좋아하였으면서도 옛사람의 그것에 항상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고 친척들에게도 환심을 얻었으므로 형제와 자녀ㆍ조카들이 모두 그 집으로 모여들었으며, 이 중에서 그의 교육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많았다. 친구 사이에도 신의를 매우 소중히 여겨 평소에 사귄 여러 사람들 모두에게 종신(終身)토록 절친하게 지냈으며, 빈궁한 이에게는 더욱 정성을 기울였다.[「심유묘갈명」]
심유는 경사(經史)와 시율(詩律)에서 모두 뛰어났고 더욱이 사가(史家)의 이야기를 좋아하여 거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이것이 대개 그의 습성이었다. 그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크고 작은 것을 빠뜨리지 않았고 민간의 이야기와 소설까지도 널리 읽어 모두 꿰뚫었다. 이만겸(李萬謙)은 심유의 심우(心友)로, 항상 사학(史學)으로 서로 겨루면서 군을 추켜서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김만중(金萬重)은 심유와 더불어 사(史)를 논하고는 이르기를, “그와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어서 엄한 스승의 격려와 도움이 없었으나 스스로 분발하여 힘써 배워서 사업을 이룩해 현양(顯揚)하였으므로 모두들 그가 오래도록 중요한 임무를 이루어 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였다고 한다.[「심유묘갈명」]
[묘소와 후손]
심유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다.[「심유묘갈명」] 최석정(崔錫鼎)의 묘갈명이 남아 있다.
부인 배천 조씨(白川趙氏)는 대제학(大提學) 문효공(文孝公) 조석윤(趙錫胤)의 딸로 아름답고 유순하였으며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 그 뜻을 어김이 없었고 남편을 받드는 데 온화하면서 법도가 있었다.[「심유묘갈명」] 심유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심유와 배천 조씨는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심제현(沈齊賢)은 문장이 있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고, 차남 심수현은 담양부사(潭陽府事)를 비롯하여 간관(諫官)이나 시강(侍講), 그리고 영의정 등을 두루 지냈다. 삼남인 심경현(沈景賢)은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지냈다. 두 딸은 김상연(金象衍)과 이희춘(李喜春)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심공현(沈恭賢)이고 딸은 이산룡(李山龍)"
에게 시집갔다.[「심유묘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