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68년(선조 1)∼1637년(인조 15) = 70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돈녕부(敦寧府)도정(都正) 등을 지냈다. 자는 사화(士和)이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지낸 심우정(沈友正)이고, 어머니 광릉 안씨(廣陵安氏)는 목사(牧使) 안여경(安汝敬)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선공감(繕工監)첨정(僉正)을 지낸 심자(沈鎡)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심달원(沈達源)이다.
[관직 생활과 충절]
심현(沈誢)은 후릉참봉(厚陵參奉)으로 처음 출사하였고, 그 뒤 흡곡현령(翕谷縣令)이 되었다.[『낙전당집(樂全堂集)』 권12 「돈녕도정심공기숙부인송씨합장묘갈명병서(敦寧都正沈公曁淑夫人宋氏合葬墓碣銘幷序」 이하 「심현묘갈명」으로 약칭] 이어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역임하였는데, 도랑을 파서 물을 대어 약 130만평의 논을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가자되었다.[『응천일록(凝川日錄)』] 이후 철원부사(鐵原府使)와 회양부사(淮陽府使) 등을 지냈으며, 1635년(인조 13) 돈녕부 도정이 되어 사형수들의 심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13년 11월 21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년 8월 23일, 인조 8년 4월 24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심현은 숙채(宿瘵 : 오래된 폐 질환)가 있었음에도 강화도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로 맹세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2일, 「심현묘갈명」] 그는 청군(淸軍)이 강화도를 침공하는 날 먼저 가묘(家廟)의 신주(神主)를 외진 곳에 묻어 두고, 손수 국난의 비운을 통탄하는 유소(遺疎)를 작성하여 외손자 박장원(朴長遠)에게 맡겼다. 그리고 의관을 정돈하고 북쪽을 향해 4번 절한 다음 목을 매어 자결(自決)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2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6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이때 심현의 부인도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2일] 인조는 심현의 충절과 그의 부인 여산 송씨(驪山宋氏)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그들을 정문(旌門)하고, 그 자손을 기용해서 충렬을 표시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2일, 인조 15년 8월 27일]
이후 강화도의 사민들은 병자호란에 순절한 심현을 비롯하여 김상용(金尙容)과 이상길(李尙吉), 이시직(李時稷), 송시영(宋時榮), 구원일(具元一) 및 남양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 등을 배향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인조실록』 인조 18년 8월 13일] 1649년(효종 즉위년) 병자호란 당시 사절(死節)한 이들에 대하여 정려만 하고 증직만 한 것이 애석하다는 송준길(宋浚吉)의 의견에 따라 심현은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 효종 즉위년 11월 6일, 효종 즉위년 11월 8일] 그리고 1657년(효종 8)에는 강화도에 세웠던 사당에 ‘충렬(忠烈)’이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이어 강화유수(江華留守) 이선(李選)의 요청에 따라 1683년(숙종 9)에는 심현에게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효종실록』 효종 8년 11월 28일, 효종 9년 6월 24일, 『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7년 5월 21일, 숙종 9년 6월 24일]
[성품과 일화]
심현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 그 도리를 다 했고 동기간에는 그 정을 다 했으며, 벼슬에 있을 때는 그 힘을 다 했고 난을 당해서는 그 절개를 다 했다.[「심현묘갈명」]
한편 부인 여산 송씨는 영의정 송질(宋軼)의 손녀이자, 목사 송녕(宋寧)의 딸이다. 여산 송씨는 순수한 덕과 착한 용의로 시부모를 잘 모셨고, 『여계(女誡)』를 통달해 이로운 것과 의리를 분별하였다. 이에 시아버지는 “반드시 절부가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목욕재계를 한 후 남편 심현을 따라 자결하던 모습이 극락을 가는 것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청군이 물러간 뒤 1637년(인조 15) 3월 10일에 장사를 지냈다.[「심현묘갈명」]
[후손 및 묘소]
심현의 묘소는 경기도 시흥에 있는데, 부인 여산 송씨의 묘와 함께 있다.
그는 여산 송씨와의 사이에 2녀를 두었다. 장녀는 승지(承旨)홍헌(洪憲)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직장(直長)박훤(朴烜)에게 출가하였다. 박훤의 아들인 박장원(朴長源)은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지냈다.[「심현묘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