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51년(명종 6)~1602년(선조 2) = 52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와 호조 참의(參議),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자는 사진(士進)이고, 호는 만사(晩沙)이며,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에 봉해졌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심전(沈銓)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정산현감(定山縣監)을 지낸 이한(李翰)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좌랑(佐郞)을 지낸 심달원(沈達源)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지낸 심순문(沈順門)이다.
[선조 시대의 활동]
1573년(명종 6) 식년시(式年試)에 입격(入格)하였고, 7년 뒤인 1580년(선조 13) 별시(別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0세였다.[『방목(榜目』] 이후 성균관(成均館)에 배속되었다가, 1586년(선조 19) 감찰(監察)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호조 좌랑과 예조 좌랑, 경상도사(慶尙都事), 자문점마(咨文點馬), 호조 정랑(正郞)을 지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21년 7월 23일, 선조 21년 10월 21일, 『동주집(東州集)』 권7 「경기관찰사심공신도비명(京畿觀察使沈公神道碑銘)」 이하 「심우승신도비명」으로 약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후, 선조의 어가를 호종(扈從)하였고, 그해 6월 군량미를 담당하는 조도사(調度使)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호조 정랑(正郞)이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5일, 선조 25년 6월 29일, 『기재사초(寄齋史草)』 하 「임진일록(壬辰日錄)」2,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6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그리고 얼마 후 호종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봉렬(奉列)에 임명되었으며, 7월에는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이 되었고, 8월에는 명(明)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진주사(陳奏使) 서장관(書狀官)에 제수되어 사행(使行)을 다녀왔다.[『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9일, 선조 25년 7월 14일, 선조 25년 8월 12일, 선조 25년 8월 20일, 선조 25년 8월 24일, 선조 25년 12월 8일] 그 결과 명나라 조정에서는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구원하도록 하였다.[「심우승신도비명」] 조선에 돌아온 직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 심우승(沈友勝)은 1593년(선조 26) 1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자, 명나라로 구원병을 요청하러 갔던 공로를 인정받아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과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으며 아울러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 12월 20일, 선조 26년 1월 11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26년 1월 1일] 이어 호조 참의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및 승정원 우부승지를 역임하면서, 서울 수복책을 마련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6년 1월 26일, 선조 26년 1월 28일, 선조 26년 1월 30일, 선조 26년 2월 15일] 그러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므로, 그해 5월 춘천부사(春川府使)에 제수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6년 5월 4일, 「심우승신도비명」]
춘천부사로 재직하던 가운데 1594년(선조 28) 1월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지 못한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가, 그해 7월에는 적절하지 못한 인사라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승문원(承文院)의 부제조(副提調)에서도 체차되었으나, 10월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8년 1월 26일, 선조 28년 7월 20일, 선조 28년 10월 19일] 이후 심우승은 어전통사(御前通事)로서 선조와 명나라에서 파견한 도사(都司)의 접견 등에 참석하여 통역을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8일, 선조 30년 4월 9일, 선조 30년 5월 19일, 선조 30년 6월 1일, 선조 30년 6월 17일] 그런 가운데 1597년(선조 30) 전쟁 중에 공사(公私)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업무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호조 참판(參判)으로 특진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7월 29일, 「심우승신도비명」] 한편 당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군사들이 조선 백성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끼치고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명나라 군사들에게 어떠한 제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심우승이 경리(經理) 양호(楊鎬)에게 시정을 요구하였는데, 선조가 이것을 알고 그를 파직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0년 9월 29일, 선조 30년 10월 1일] 그러자 심우승을 좋게 여기던 양호가 그를 적극 변호하며 강력히 사면을 요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심우승은 사면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9월 30일, 선조 30년 10월 2일] 그리고 그해 12월 사행부사(使行副使)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 1월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2월 26일, 선조 31년 1월 27일]
한편 1600년(선조 33) 6월 다시 한성부우윤에 제수된 심우승은 비변사(備邊司) 당상(堂上)을 겸직하다가, 1601년(선조 34)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를 거쳐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4년 3월 13일, 선조 34년 7월 5일, 선조 34년 8월 20일, 선조 34년 10월 5일, 「심우승신도비명」] 1602년(선조 35) 모친상을 당해 집례(執禮)를 극진히 하던 중에 병이 나면서, 그 해 6월 향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심우승신도비명」]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인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이어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으로 추록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7년 6월 25일, 선조 37년 10월 29일, 『선조수정실록』 선조 37년 6월 25일, 「심우승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심우승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자질이 온화하고 활달하였으며, 강직하지만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고, 시비를 변별(辨別)하면서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청명(淸明)하고 고결하면서도 사물에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형제끼리는 우애가 있었으며, 친척 간에는 어질고 벗을 사귀는 데는 언제나 성심을 다하였다. 또 충성을 다해 공무를 수행하여 얽히고설킨 일들을 풀어 나가는데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특히 번잡한 일을 처리하는 것에 뛰어나 꼼꼼하게 살펴서 그 결단하는 것이 능수능란하였다.[「심우승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심우승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도수리에 있으며,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
심우승의 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현감(縣監)안용(安容)의 딸이다. 자녀가 없어서 둘째 형 심우준(沈友俊)의 아들인 심액(沈詻)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서자(庶子) 심보(沈譜)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심우승신도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