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46년(명종 1년)~1599년(선조 32년) = 54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원택(元擇)이다. 아버지는 선공감(繕工監)첨정(僉正) 심자(沈鎡)이고, 어머니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군수(郡守)구사겸(具思謙)의 딸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강화부사(江華府使)로 일하는 동안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하였다. 호성선무공신(扈聖宣武功臣)에 책봉되고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심우정(沈友正)은 1583년(선조 16) 37세라는 늦은 나이에 등과하여 형조 좌랑(佐郞),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과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전라도사(全羅都事), 해운판관(海運判官) 등을 차례대로 거쳤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21년 10월 29일, 『방목(榜目)』] 1589년(선조 22년)에 한성서윤(漢城庶尹)으로 있을 때 상관에게 거슬려서 선천군수(宣川郡守)로 좌천되었다가 병으로 사임하고 집에서 쉬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부름을 받고 함께 한강에서 왜적을 맞았으나 궤멸 당하였다.[『백사집(白沙集)』「심우정묘비명(沈友正墓碑銘)」] 이에 심우정은 김명원의 말을 잡고 “임금께서 서쪽으로 가셨으니 임진강을 지켜 그 뒤를 막자.”고 하였으나 임진강에서도 패하였다.[『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이후 이천(伊川)쪽에 있는 세자(世子 : 광해군(光海君))를 찾아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에 임명되었고 다시 강원도소모사(江原道召募使)에 임명되었으나, 이천에 머무르고 적극적으로 군사를 모집하지 않은데다가 임진강에서 패한 후 도피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 8월 9일, 선조 26년 1월 24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5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1593년(선조 26)에 서울을 회복한 후 진휼랑(賑恤郞)이 되어 백성을 돌보았으며, 군기시(軍器寺)정(正)을 거쳐 파주목사(坡州牧使)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지냈다.[『선조실록』 선조 26년 10월 24일, 『백사집』「심우정묘비명」] 1594년(선조 27)에 강화부사가 되어 전쟁으로 어지러워진 민심을 잘 다스려 강화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산성을 수축하는데 있어서도 원성을 사지 않았다.[『선조실록』 선조 29년 5월 7일, 선조 30년 6월 18일] 이 공을 인정받아 몇 차례 강화부사에 유임되었으며, 이후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에는 광주목사에 천거되어 남한산성 수축의 일을 맡았다.[『선조실록』 선조 29년 11월 6일, 선조 31년 4월 29일, 『백사집』「심우정묘비명」] 이어 1598년(선조 31) 영남에 있는 명(明)나라 군사에게 군량을 조달하는 동로조도사(東路調度使)를 역임하던 가운데 그는 병을 얻었으며,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54세였다.[『선조실록』 선조 31년 7월 15일, 『백사집』「심우정묘비명」]
[성품과 일화]
심우정은 효심이 깊고 욕심이 없었다. 어릴 적에 아버지가 병중이었을 때 늘 약을 달여 올리고 변을 맛보아 차도를 시험하였다. 아버지가 형들보다 기특하다고 하여 기름진 전답과 쓸만한 노비를 가려서 주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들에게 모두 돌려주고 간여하지 않았다. 또한 홀로 계신 어머니를 염려하여 아침저녁마다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사철에 덥고 추운 것을 알맞도록 하였으며 크고 작은 온갖 것들을 보살피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백사집』「심우정묘비명」]
어릴 적부터 허약하여 질병이 많았는데, 1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글을 읽는 바람에 늦은 나이에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다. 그런 심우정이 전란 중에 관직에 있으면서 많은 일을 처리하였으니, 마침내 당뇨병에 걸렸다. 어머니가 고생을 자초한다고 말하자 심우정이 대답하기를, “평생에 일을 당하여 일찍이 방과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위급한 시대를 당하여 감히 내 몸만 아껴서야 되겠습니까?”하고, 스스로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백사집』「심우정묘비명」]
자신의 병을 돌보지 않고 전란으로 어지러워진 민심을 다스리는데 온 힘을 다하였으니,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이런 소문이 나서 선조가 특별히 옷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백성들 중에 하늘에 대신 기도하는 자가 있었고, 병으로 사퇴하자 길을 막고 울며 만류하였으며 비석을 세워 덕행을 기록했다. 1598년(선조 31) 모친상을 당하자 광주(廣州)의 백성들이 함께 쌀을 내놓아 상사에 부조하였다. 어머니의 집상(執喪)으로 피로하여 병을 얻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 봄에 세상을 떠났는데, 강화도와 광주 백성들이 제사상을 차려놓고 모여서 곡읍(哭泣)했다 전해진다.[『백사집』「심우정묘비명」]
[묘소와 후손]
그는 사망한 해에 금천(衿川) 북면(北面)에 장사지냈고, 현재의 묘소는 인천광역시 서구 공촌동 산 8번지 선산에 있다. 이항복(李恒福)이 묘지명을 썼다.[『백사집』「심우정묘비명」]
부인 광주 안씨(廣州安氏)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을 낳았다. 맏아들이 심혜(沈譓), 둘째 아들이 심현(沈誢), 셋째 아들이 심집(沈諿)이다. 맏아들 심혜가 도사(都事) 한완(韓浣)의 딸과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고, 둘째 아들 심현은 음사(蔭仕)로 사옹원(司饔院)직장(直長)이 되었는데 목사(牧使) 송영(宋寧)의 딸과 결혼하여 역시 딸 둘을 두었다. 셋째 아들 심집은 예조 판서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청(淸)나라와의 휴전 교섭을 위하여 왕족인 능봉군(綾峰君)과 함께 각각 대신과 인조의 동생으로 위장하여 갔다. 그러나 탄로가 나는 바람에 문외송출(門外送出)되었다가 1638년(인조 16)에 사면되었으며, 이듬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14년 12월 15일, 인조 14년 12월 16일, 인조 16년 2월 10일, 인조 16년 12월 17일,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홍문관 직제학 홍종록(洪宗祿)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백사집』「심우정묘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