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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7년(연산군 3)~1574년(선조 7) = 78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자(字)는 희용(希容)이고, 호는 스스로 효창노인(曉窓老人)이라 하였는데, 태화산(太華山) 기슭에 집을 짓고 당호를 우송당(友松堂)이라 하였으므로 우송(友松)이라고도 한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직제학(直提學)과 승지(承旨), 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아버지 심순문(沈順門)은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으로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신영석(申永錫)의 딸이다. 할아버지 심원(沈援)은 내자시(內資寺) 판관(判官)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할아버지 심회(沈澮)는 좌의정으로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책훈되었다. 고조할아버지 심온(沈溫)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소헌왕후(昭憲王后)를 낳았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1516년(중종 11) 식년시(式年試) 때 생원시 3등에 급제한 심봉원(沈逢源)은 서른 살이 되던 1526년(중종 21) 병이 들어 10년 가까이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요양을 하였다.[『율곡전서(栗谷全書)』 권18 「동지돈녕부사심공묘지명(同知敦寧府事沈公墓誌銘)」] 그러다가 1534년(중종 29)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는데, 이듬해인 1535년(중종 30) 동서 이임(李任)의 종을 빼앗은 일로 물러났다.[『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30년 12월 12일] 이어 1537년(중종 32)에 별시(別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학유(學諭)가 되어 의정부 사록을 겸하였다.[『중종실록』 중종 32년 12월 22일, 『방목(榜目)』] 이어 1538년(중종 33)에는 탁영시(擢英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오위(五衛)의 사과(司果)에 제수되었으나, 이미 실직(實職)을 여러 차례 거쳤으므로 유학에 정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사헌부(司憲府)의 건의에 따라 분관(分館 :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承文院)과 성균관(成均館), 교서관(校書館)에 배속시켜, 실무를 익히게 하는 일)하도록 하였다. 이후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지내고,[『중종실록』 중종 38년 8월 10일] 그 뒤부터 상례(常例)에 따라 성균관 학록(學錄)과 학정(學正), 박사(博士), 전적(典籍) 등을 두루 지냈다.
심봉원은 1545년(인종 1) 인종(仁宗) 즉위 이후 사헌부 헌납(獻納)이 되었다.[『인종실록』 인종 1년 1월 11일] 그리고 그해 4월 조광조(趙光祖)는 바른 학자라고 하면서 “아들이 능히 아버지의 허물을 덮으면 옛사람도 효도라 하였는데, 더욱이 조광조가 죄받은 것은 본디 선왕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라며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사(賜死) 당한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진언하였다.[『인종실록』 인종 1년 4월 8일]
같은 해 인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명종이 즉위하자 심봉원은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8월 24일] 이무렵 윤원형(尹元衡) 일파인 소윤(小尹)이 인종 대에 득세하였던 윤임(尹任) 일파인 대윤(大尹)을 숙청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다. 이때 심봉원은 소윤과 뜻을 같이 하였고,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록(功臣錄)에 올랐다. 그러나 곧 심봉원은 대윤의 우두머리인 유관(柳灌)과 유인숙(柳仁淑)을 유배시키지 말 것과 자신을 공신록에서 빼 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는데,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다.[『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8월 26일, 명종 즉위년 8월 28일, 명종 즉위년 8월 29일]
1547년(명종 2) 심봉원은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가 되었고, 이어서 사헌부 장령(掌令)과 사간원 사간(司諫), 성균관 사예(司藝) 및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1553년(명종 8)에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2년 5월 19일, 명종 2년 10월 12일, 명종 3년 1월 29일, 명종 5년 4월 29일, 명종 8년 5월 16일] 이어 홍문관 직제학이 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진급하였다.[『명종실록』 명종 8년 6월 3일, 명종 8년 7월 21일] 그런 가운데 중종이 왕이 되기 전에 결혼하였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과정에서 역적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라고 하여 폐출되었던 신씨(愼氏)가 1557년(명종 12) 12월에 죽었는데, 이때 심봉원이 상장(喪葬)의 일을 소홀히 하였다고 하여 치죄(治罪)를 당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2년 12월 13일] 그러나 이듬해인 1558년(명종 13)에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3년 6월 8일] 그리고 1563년(명종 18) 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심봉원에게 명종이 특지를 내려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돈녕부 동지사에 제수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8년 1월 20일] 이후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가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호조 참의(參議)와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574년(선조7) 10월 21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율곡전서』 권18 「동지돈녕부사심공묘지명」]
[성품과 일화]
심봉원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온유하면서도 충직하고 훌륭하였으며, 청렴하면서도 간결하고 중후하였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한결 같았으며, 밖으로는 꾸밈이 없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유학뿐만 아니라 음률(音律)과 의술, 그리고 서법(書法)에도 밝았다. 늘 병을 앓았으면서도 의식(衣食)을 스스로 마련하고 앉고 눕는 수를 제한하였다.[『율곡전서』 권18 「동지돈녕부사심공묘지명」]
한편 어렸을 때, 문중에 돈 많은 노파가 있었는데 후사가 없었다. 노파가 그를 데려다가 길러 의탁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피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그 결과 대종가(大宗家)가 가업을 잃어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되자, 심봉원은 이를 비통하게 여겨 방법을 세우고 대비를 하였음에도 늘 부족하게 여겼다. 또 그는 스스로 기운을 후히 받지 못하였다 하여 욕심을 줄이고 심기를 안정시켜 진원을 기르는 데 힘써 옷은 반드시 무게를 달고 밥은 반드시 숟갈을 세어서 동작과 휴식을 조절하여 일정한 규칙에 맞게 하였다. 그리하여 약을 쓰지 않고도 병이 나았으며, 만년에는 정신과 기운이 중년보다도 나아서 젊어서 읽었던 글을 기억하여 한 자도 어긋남이 없었다.[『율곡전서』 권18 「동지돈녕부사심공묘지명」] 태화산 기슭에 집을 짓고 꽃과 나무에 취미를 붙였다. 당호를 우송이라 하고, 효창노인이라 스스로 호를 지었으며, 지팡이를 짚고 이끼가 낀 섬돌과 대숲에 뚫린 길에 노닐었는데 흰 수염이 날리는 풍채는 완연히 신선 같았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1]
한편 아들 심건(沈鍵)이 먼저 죽으니 슬픔이 대단하여 집 대문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심건의 일에 대해 말하지 마시라.’고 써 붙였다고 한다.[『청음집(淸陰集)』 권40]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구석말에 있으며, 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의 묘소와 함께 쌍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있으며, 망주석과 문인석도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심봉원은 부인 경주 김씨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심건은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이다. 맏딸은 출가 전에 죽었고, 둘째 딸은 함흥판관(咸興判官) 윤경복(尹慶福)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금천현감(衿川縣監) 조윤신(曺胤申)에게 시집갔다. 아들 심건은 홍문관 교리 이탄수(李灘叟)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 심희수(沈喜壽)는 승문원 정자로 은진현감(恩津縣監) 노극신(盧克愼)의 딸과 혼인하였다. 심건이 일찍 죽었으므로, 손자 심희수가 할아버지인 심봉원을 봉양하였는데, 이후 심희수는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대에 좌의정과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37년 12월 1일, 선조 39년 7월 1일,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즉위년 3월 6일] 한편 심봉원의 큰형 심연원(沈連源)은 인순왕후(仁順王后 : 명종의 정비(正妃))의 친할아버지이다.[『율곡전서』 권18 「동지돈녕부사심공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