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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8년(태종 18)∼1493년(성종 24) = 76세]. 조선 전기 문종(文宗)~성종(成宗) 때의 문신. 좌의정(左議政)과 영의정(領議政) 등을 지냈다. 봉작은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이고, 시호는 공숙(恭肅)이며, 자는 청보(淸甫)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지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 심용(沈龍)이다.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世宗)의 정비(正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기도 하다.
[문종(文宗)~세조(世祖) 시대 활동]
1418년(세종 즉위년) 상왕(上王)이던 태종(太宗)이 외척 등을 견제하기 위하여 <강상인(姜尙仁)의 옥사(獄事)>를 일으켰는데, 이때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이 이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 즉위년 11월 23일, 세종 즉위년 12월 23일, 세종 즉위년 12월 25일] 그런 이유로 소헌왕후의 동생이던 심회(沈澮)는 세종 때에 등용되지 못하였으나, 문종 즉위 후 1451년(문종 1) 동생 심결(沈決)과 함께 돈녕부(敦寧府)주부(主簿)로 제수되었다가, 돈녕부 부지사(副知事)가 되었다.[『문종실록(文宗實錄)』 문종 1년 8월 6일, 『심회신도비명(沈澮神道碑銘)』] 이어 단종(端宗) 즉위 후에는 1454년(단종 2)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와 돈녕부 동지사(同知事)를 역임하였다.[『단종실록(端宗實錄)』 단종 2년 6월 27일, 단종 2년 8월 5일, 단종 3년 4월 4일]
그러다가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형 심준(沈濬) 및 동생 심결과 함께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1년 12월 27일] 이후 세조는 심회를 매우 융숭하게 대우하면서 항상 그를 숙부(叔父)라 부르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세조실록』 세조 3년 3월 28일] 세조 대에도 동녕부 동지사를 역임하던 심회는 1457년(세조 3)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공조 판서(判書)가 되었다.[『세조실록』 세조 1년 12월 27일, 세조 2년 3월 19일, 세조 3년 3월 28일, 세조 3년 7월 5일, 세조 3년 7월 21일] 이때 세조는 “내가 심회를 쓰는 것은 척속이기 때문이 아니다. 진실로 재간(才幹)이 없으면 결단코 일을 맡길 수가 없다. 그 인품이 정밀하고 밝은데 경들은 다만 그 일하는 것만을 볼 뿐이다.”라며 그에 대한 신임을 드러냈다.[『세조실록』 세조 3년 7월 22일]
이후 1458년(세조 4)부터는 중추원 부사(副使)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중추원 판사(判事), 전라도모민체찰사(全羅道募民體察使), 전라도도체찰사(全羅道都體察使), 중추원사, 중추원 영사(領事), 형조 판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세조실록』 세조 4년 5월 11일, 세조 4년 6월 28일, 세조 5년 6월 3일, 세조 5년 7월 3일, 세조 5년 7월 18일, 세조 5년 12월 24일, 세조 6년 1월 22일, 세조 6년 11월 12일, 세조 6년 윤11월 11일, 세조 7년 4월 15일, 세조 7년 10월 9일, 『역대요람(歷代要覽)』] 그리고 1466년(세조 12)에는 좌의정에 올라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의 직책을 겸임하였으며, 이듬해인 1467년(세조 13)에는 영의정과 세자 사부가 되었다.[『세조실록』 세조 12년 10월 19일, 세조 13년 5월 20일, 세조 13년 7월 3일] 한편 같은 해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평정한 후 심회는 그 전모를 적은 전문(箋文)을 작성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세조 13년 8월 19일]
[예종(睿宗)~성종(成宗) 시대 활동]
1468년(예종 즉위년)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남이(南怡)의 모반 사건>이 발생하였다.[『예종실록(睿宗實錄)』 예종 즉위년 10월 24일] 남이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 북벌의 공을 인정받아 1468년(세조 14) 병조 판서까지 오르면서 여러 사람들의 견제를 받았다.[『세조실록』 세조 14년 8월 23일] 그런데 예종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이가 숙직을 하다가 혜성을 보고,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이다.”라고 하였다며, 유자광(柳子光)이 남이가 역모를 계획한다고 무고(誣告)하였다.[『예종실록』 예종 즉위년 10월 24일] 결국 남이는 처형되었고, 이후 예종은 역모 사건을 해결한 공신들을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삼았다.[『예종실록』 예종 즉위년 10월 27일] 이때 심회는 수충보사정난익대이등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二等功臣)에 녹훈되는 동시에 청송군(靑松君)에 봉해졌다.[『예종실록』 예종 즉위년 10월 28일, 예종 즉위년 10월 30일, 예종 1년 5월 20일]
성종 즉위 후 1470년(성종 1) 심회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호전(戶典)」과 「공전(工典)」, 「이전(吏典)」을 교정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1년 2월 9일, 성종 1년 2월 11일] 이어 1471년(성종 2) 성종은 자신의 즉위 및 보좌에 공이 있는 공신들을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녹훈하였는데, 이때 심회는 순성명량경제좌리이등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二等功臣)이 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년 3월 27일] 그리고 1476년(성종 7)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의 봉작을 받았다.[『성종실록』 성종 7년 5월 27일] 이 해에 그는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어 주문사(奏聞使)로서 아들 심한(沈澣)과 함께 북경(北京)에 가서 성종의 계비(繼妃)이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인 윤기무(尹起畝)의 딸을 왕비로 삼는 것에 대한 고명과 칙서를 받아 돌아왔다.[『성종실록』 성종 7년 8월 4일, 성종 7년 8월 11일, 성종 7년 8월 22일, 성종 7년 12월 10일, 성종 8년 1월 24일, 성종 8년 2월 4일] 그러나 1477년(성종 8) 왕비 윤씨가 다른 후궁들에 대한 질투가 심하므로 폐비(廢妃)를 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이때 심회는 다른 날의 큰일을 생각하여 용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성종실록』 성종 8년 3월 29일, 성종 8년 3월 30일] 그렇지만 계속 이것이 문제가 되었고, 결국 그는 입장을 바꿔 왕비 윤씨를 별궁(別宮)에 폐처(廢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지만, 폐비시키고자 하는 성종의 의지를 꺾지는 못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0년 6월 2일] 한편 이무렵 심회는 온양군(溫陽郡)에 소속되어 있는 공노비가 아버지 심온이 데리고 있던 여자 노비가 도망가서 낳은 자손이므로 자신의 노비라며 노비 송사를 벌이고 있었다.[『성종실록』 성종 10년 3월 28일, 성종 10년 3월 30일] 이 과정에서 판결이 나지 않았음에도 심회는 그 노비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일을 시켰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추국 끝에 체직되었다.[『성종실록』 성종 10년 7월 2일, 성종 10년 7월 3일, 성종 10년 7월 7일, 성종 10년 7월 24일, 성종 10년 7월 26일, 성종 10년 7월 27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광보국숭록대부 청송부원군의 관작을 다시 제수받았다.[『성종실록』 성종 10년 8월 1일]
이후 영사로서 계속 조정 업무를 보다가, 1482년(성종 13)에는 경기진휼사(京畿賑恤使)의 업무를 보기도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0년 9월 5일, 성종 13년 2월 6일, 성종 13년 2월 8일, 성종 16년 4월 7일] 그런 가운데 1482년 8월에는 폐비윤씨의 사사(賜死)를 논의할 때 그 역시 참석하여 대의(大義)로써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3년 8월 16일] 한편 1486년(성종 17) 그는 이듬해에 70세가 되므로 나이가 많다며 사퇴하고자 하였으나 성종이 허락하지 않았다.[『성종실록』 성종 17년 12월 19일] 이후 군자조성도감(軍資造成都監) 도제조(都提調) 등을 역임하다가 1491년(성종 22)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성종실록』 성종 19년 5월 18일, 성종 22년 6월 1일, 성종 22년 10월 17일] 그리고 1493년(성종 24) 1월 12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6세였다.[『성종실록』 성종 24년 1월 12일] 이때 성종은 소선(素膳)을 들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전해진다.[『성종실록』 성종 24년 1월 13일]
한편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인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추숭을 내세워 폐비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이들을 처벌하는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다. 이때 연산군은 심회가 처음에는 폐비윤씨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후에 고집을 꺾어 동조했다는 죄를 들어 관작을 추탈(追奪)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10년 4월 18일, 연산군 10년 윤4월 21일, 연산군 10년 5월 1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6 「연산조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그러나 1506년(중종 1) 중종(中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심회는 그해 10월 신원(伸寃)되었다.[『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1년 10월 7일, 중종 1년 10월 8일]
[성품과 일화]
심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대범하고 중후하여, 비록 학술은 없어도 천성이 정직하였다. 그가 나라의 정사를 의논할 때에는 영합하거나 부회(傅會)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고 치밀하여 훈공(勳功)의 칭호를 보전할 수 있었으니, 외척의 현명함으로써 심회만한 자가 없었다.[『성종실록』 성종 24년 1월 12일] 또한 자기의 의지를 굽히고 학문에 뜻을 두며, 겸손하고 공순하여 법도에 맞았다.[『세조실록』 세조 3년 3월 28일] 이 외에도 자라면서 순순하게 예를 행하여 조금도 교만하거나 귀한 체하는 습관이 없고 오직 학문으로 일삼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심회신도비명』]
한편 1474년(성종 7) 양모(養母)인 족고모(族姑母)가 세상을 떠나자, ‘심회는 중신(重臣)으로서 바야흐로 국정 의론을 도모해야 하거늘 사은(私恩)을 가지고 중책을 벗을 수 없고 또 예에도 맞지 않습니다.’라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자 심회가 말하기를, ‘정이 있는 곳에는 예도 따르는 법이다. 내 어찌 길러 준 은혜를 잊고 사사롭게 그 몸이 편하기만을 계획하겠는가?’ 하면서, 상(喪)에 달려가서 최복(衰服)을 입고 3년상을 마치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공이 의리를 지킨다고 칭찬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심회신도비명』]
성품이 간엄(簡嚴)하여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일을 볼 때는 바른 도리를 지키고 아부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하지 못하였으며, 핵심적인 일에 힘쓰고 분경(紛更)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부지런히 공무에 최선을 다하여 나라 걱정을 집 걱정하듯 하였다. 평상시에는 비록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날에도 반드시 꿇어앉아 있었으며, 자질(子姪)에게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한 다음 맞이하였으니 청탁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심회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심회의 시호는 공숙으로, 공(恭)은 공경하고 순종하며 임금을 섬긴 것을 뜻하며, 숙(肅)은 강직한 덕을 지녀 능히 대성함의 뜻이다.[『성종실록』 성종 24년 1월 12일]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월룡면 영태리에 있다. 심회의 조카 노사신(盧思愼)의 부탁으로 어세겸(魚世謙)이 신도비명을 지었다.[『심회신도비명』]
부인 원주 김씨(原州金氏)는 김연지(金連枝)의 딸로, 슬하에 3남을 두었다. 1남 심인(沈潾)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의(參議)를 지냈고, 2남 심한은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청천군(靑川君)이며, 3남 심원(沈湲)은 봉렬대부(奉列大夫) 내자시(內資寺) 판관(判官)을 지냈다.[『성종실록』 성종 13년 4월 23일, 성종 24년 1월 12일, 『심회신도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