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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9년(인조 17)∼1725년(영조 1) = 87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문신.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을 지냈는데, 증직(贈職)은 영의정(領議政)이다. 자(字)는 화중(華仲)이고, 호(號)는 한죽(寒竹)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신명규(申命圭)는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이고, 어머니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 남호학(南好學)의 딸이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신상(申恦)의 손자이고, 병마사(兵馬使)신유(申鍒)의 형이다.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숙종~영조 시대 활동]
1657년(효종 8) 나이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仕)로 합격하였다. 1673년(현종 13) 효종의 왕릉인 영릉(寧陵)을 여주(驪州)로 옮길 때, 아버지 신명규는 산릉도감(山陵都監) 낭청(郎廳)이 되었는데, 공사의 감독을 태만하게 했다고 하여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되었다. 그때 신임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5년 동안을 모시고 지내다가 돌아왔다. 1680년(숙종 6) 음직(蔭職)으로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도암집(陶菴集)』 권29 「좌참찬 한죽 신공임 신도비(左參贊寒竹申公銋神道碑)」] 그 후 그는 신문고(申聞鼓)를 두드려 아버지 신명규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신명규가 석방되자, 1683년(숙종 9)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1686년(숙종 12) 나이 48세에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를 보임되었다가,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을 거쳐, 호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688년(숙종 14) 아버지 신명규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694년(숙종 20) 병조 좌랑이 되었다가, 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서,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이때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3년 상기(喪期)를 마쳤다.
1696년(숙종 22) 8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는데, 우의정 서문중(徐文重) 등을 공격하다가, 제주도 정의 현감(旌義縣監)으로 좌천되었다. 얼마 후에 함경도 경성부(鏡城府) 판관(判官)으로 임명되었다. 1697년(숙종 23) 5월 숙종이 신임을 용서하여 경직(京職)에 임명하도록 명하였으므로,[『숙종실록』 숙종 23년 5월 13일] 1년 만에 다시 돌아와서 병조 좌랑이 되었다가 병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들어가서 문학(文學) ·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였다. 외방의 관직을 자원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나갔다가, 태안 군수(泰安郡守)가 되었고,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옮겼다.[『도암집』 권29 「좌참찬 한죽 신공임 신도비」]
1701년(숙종 27)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발탁(拔擢)되었다가, 황해도 관찰사로 전임되었다. 1703년(숙종 29)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가 되었고, 승정원 승지(承旨)를 거쳐서, 예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1704년(숙종 30)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1707년(숙종 33)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 숙종 27년 12월 19일, 29년 9월 4일 · 10월 10일 · 12월 15일, 숙종 30년 1월 10일, 숙종 33년 3월 14일] 1708년(숙종 34) 5월 승진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으나, 조정과 마찰을 빚어서 이듬해에 파직(罷職)되었다.[『숙종실록』 숙종 34년 5월 6일, 숙종 35년 6월 7일] 이후 공조 참판(參判)을 거쳐서, 1710년(숙종 36) 4월 도승지(都承旨)가 되었고, 7월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712년(숙종 38) 9월 이조 참판이 되었다.[『숙종실록』 숙종 36년 4월 16일 · 7월 6일, 숙종 38년 9월 23일] 1713년(숙종 39) 1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이듬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호조 참판으로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를 겸임하였다.[『숙종실록』 숙종 39년 1월 7일, 숙종 40년 7월 24일, 숙종 41년 7월 21일, 숙종 43년 2월 22일]
숙종이 노쇠해지자, 세자인 경종(景宗)에게 대리청정(代理廳政)을 맡기려고, 세자의 대리청정하는 근거를 『세종실록』에서 찾아보도록 하였다. 1717년(숙종 43) 7월 그가 춘추관 동지사로서 강화부(江華府)에 가서 실록(實錄) 가운데 세종의 세자 청정고사(聽政故事)에 대한 일을 조사하여 등서(謄書)해 가지고 돌아왔다.[『숙종실록』 숙종 43년 7월 24일, 『연려실기술』 권38] 1718년(숙종 44) 그의 나이 80세에 중추부 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18년(숙종 44) 우참찬(右參贊)과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숙종실록』 숙종 44년 3월 18일 · 7월 18일]
1721년(경종 1) 좌참찬이 되었다.[『경종실록』 경종 1년 10월 22일]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왕세제 영잉군의 대리청정을 지지하다가, 소론 김일경(金一鏡)의 <신임옥사(辛壬獄事)>에 걸려들어, 8개월 동안 감옥에서 심문을 받았다. 1722년(경종 2) 신임은 84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대정현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승정원일기』 경종 2년 4월 2일 · 4월 4일, 『경종수정실록』 경종 2년 4월 1일]
1725년(영조 1) 1월 영조가 <신임옥사> 때 귀양갔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하여 신임도 유배에서 석방되었다. 그해 2월 사면 교서(赦免敎書)를 받고 3월에 배에 올랐는데, 풍세(風勢)가 험악하여 겨우 5일 만에 육지(陸地)에 내릴 수 있었다. 그 사이에 혜민서(惠民署) 제조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판서를 거쳐,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도중에 병세가 위독해지고 기력이 다하여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1725년 3월 25일에 전라도 해남현(海南縣)의 여관[寓館]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87세였다. 그는 시(詩)를 잘 지었고, 글씨도 뛰어났는데, 유집(遺集) 몇 권이 전한다.[『도암집』 권29 「좌참찬 한죽 신공임 신도비」, 『영조실록』 영조 1년 4월 6일 「신임 졸기」]
[<신임옥사>와 신임]
1721년(경종 1)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숙종 시대 노론과 소론이 주자학(朱子學)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是非)가 벌어졌다. 노론의 송시열은 주자학에 비판적인 소론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하여 사문시비(斯文是非)가 일어났다. 경종 시대에 경종에게 후사(後嗣)가 없자 동생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를 책봉하는 것이 왕통에 적합한가에 대한 시비가 일어났다. 이 시비가 병약한 경종을 대신하여 연잉군이 대리청정하는 문제로 본격화되자, 기존의 사문시비는 왕통문제를 둘러싸고 왕세자 연잉군이 경종에 대한 불충이 아닌가하는 시비 곧 충역시비(忠逆是非)로 바뀌었다.
이보다 앞서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축출된 뒤, 정권을 잡은 서인의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張禧嬪)의 처벌문제를 놓고 서로 대립하였다. 노론측은 장희빈이 정비(正妃)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음해하였으므로 마땅히 사사(賜死)해야 한다는 주장하였고, 소론측은 왕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결국 숙종 말년에 노론과 소론이 왕통문제로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소론은 뒤에 경종으로 즉위하는 왕세자를 지지했으며, 노론은 뒤에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지지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4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다가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1720년 6월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노론측은 나이 30세가 넘은 경종이 자식이 없고 병약하기 때문에 후사를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하고, 경종이 즉위할 때부터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마침내 1721년 8월 노론의 주장대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 노론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고 하였다. 소론은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노론과 소론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소론의 유봉휘(柳鳳輝)는 사리에 합당하지 않다며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반대하였고,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도 그를 비호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노론은 한걸음 더 나아가 왕세제를 정한 지 두 달 만에 사헌부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세제청정(世弟聽政)을 요구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때 경종이 소론을 비호하자, 소론의 김일경(金一鏡)을 비롯한 소론 7인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을 행하고자 한 노론의 4대신을 ‘무군부도(無君不道)’의 역모자로 몰았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 관련된 노론의 인사를 모두 체포하여, 의금부에서 8개월간에 걸쳐 배후를 캐는 국문(鞠問)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노론의 4대신인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이건명(李健命)ㆍ조태채(趙泰采)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고, 노론의 대다수 인사들이 모두 화를 입었다. 이것을 <신임옥사> 또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기존에 구축된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은 84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왕세제인 연잉군을 보호해야 한다는 청원을 하다가, 마침내 유배되어 제주도의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해 5월에 바다를 건너게 되었는데, 폭풍이 크게 일어나서 성난 물결이 굽이쳤다. 배에 탔던 사람들이 배 멀미로 쓰러졌지만 신임만 홀로 신기(神氣)가 양양(揚揚)하여 멀리 하늘 끝에 실오라기처럼 아스라이 가로놓인 것을 가리키면서 “저것은 아무 섬이다.” 할 정도였다. 그는 제주도 대정현의 감산촌(柑山村)에 머무르게 되었다. 제주의 대정현은 젊은 시절 제주도로 유배된 아버지를따라 와서 5년 동안을 모시고 지냈던 곳이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제주도의 지리나 풍토를 잘 알았고, 유배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도 잘 알았기 때문에 80세가 넘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면서 걱정을 잊는 법을 편안하게 스스로 터득한다라는 뜻을 가진 ‘낙이망우 이연자득(樂而忘憂怡然自得)’ 여덟 글자를 손수 써서 자신을 갈고 닦았다.[『도암집』 권29 「좌참찬 한죽 신공임 신도비」]
[성품과 일화]
신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도암집』 권29 「좌참찬 한죽 신공임 신도비」] 그는 얼굴 모양이 크고 아름다웠으며, 어려서부터 대인(大人)다운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있었다. 평생 동안 재산을 마련하려 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물건들을 욕심을 내서 쌓아 두지 않았다. 벼슬한 지 40년이 되었으나, 집에서는 전곡(錢穀)을 꾸어다가 생활하였고, 질화로에 작은 소반만 있는 한 칸 방에서 단출하게 살았다. 또 10년 동안 이조(吏曹)에서 전형(銓衡)을 맡아보았으나, 문정(門庭)에는 청탁하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대문 앞은 물로 씻은 듯 깨끗하였고, 문을 닫고 누워 있으면 어떤 때에는 적막(寂寞)한 것 같았다.
1697년(숙종 23) 신임이 연안 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연안부(延安府)에는 남쪽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에는 연꽃[芙蓉]이 무성하였고, 그 수리(水利)의 혜택를 입는 민전(民田)이 1천 경(頃)이나 되었다. 그런데 후궁(後宮) 가운데 한 사람이 이 땅을 별사전(別賜田)으로 떼어서 받고자 하여, 내수사(內需司)의 관리를 보내서 임금의 뜻이라고 하며 그를 협박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가한 일이라고 버티며 여러 차례에 걸쳐 숙종에게 장첩(狀牒)을 올리니, 숙종도 억지로 연못을 주도록 하지 못했다. 연안에서 돌아와서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임명되었다.
1696년(숙종 22) 8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을 때 우의정 서문중 등을 공격하다가, 제주도 정의 현감으로 좌천되었는데, 숙종이 화가 풀리지 않아서, 신임에 대한 죄과를 들추어내면서, 그를 다시 제주도보다 더욱 험악한 함경도 경성부 판관으로 바꾸어 좌천시켰다. 사헌부 지평 신임이 상소하기를, “유상운(柳尙運)이 새로 정승이 되었는데, 당초 중궁(坤宮: 인현왕후)이 복위(復位)할 때에 도리에 어그러지는 말을 앞장서서 하였으니, 관직을 빨리 개정하소서.” 하였다. 숙종이 전교하기를, “이처럼 경박하고, 자기 당(黨)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는 자는 내가 차마 바로 볼 수 없다.” 하고, 이어서 우선 신임의 관직을 파직하라고 명하고, 정의 현감으로 좌천시켰다. 그때 부교리(副校理) 김시걸(金時傑) · 조태채가 반복하여 신임을 내쳐서 외직(外職)에 보임한 것이 지나치다고 말하고, 또 말하기를, “신임은 늙어서 죽어가는 사람인데 멀리 섬으로 보냈다가, 성상이 대간(臺諫)의 간하는 신하를 죽였다는 이름을 들을까봐 두렵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반드시 바다 건너 제주도로 좌천시킬 것이 아니라, 함경도 경성 판관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숙종실록』 숙종 22년 8월 19일 ·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22년 8월 10일]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은 『농암집』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적기를, “유학 이현명(李顯命)과 지평 신임이 상소하여 우의정 서문중 등 대신들이 시비는 가리지 않고 자기네 당파만을 비호하려고 죄인을 감싸준다고 비난하였다. 그 결과 이현명은 엄하게 형신(刑訊)을 받았고, 신임은 경성 판관으로 좌천되었다.”라고 하고 “숙종의 그와 같은 조처가 너무 심하였다.”고 하였다.[『농암집』 권13 「서」]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양주(楊洲) 주곡(注谷)에 있는데,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었다.[『도암집(陶菴集)』 권29 「좌참찬 한죽 신공임 신도비(左參贊寒竹申公銋神道碑)」]
부인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유정(兪楨)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신사원(申思遠)은 한성부 판관을 지냈는데, 아버지 신임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슬퍼하였으므로, 그 효성(孝誠)으로써 정려(旌閭)되었고,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장녀는 군수 이수현(李秀賢)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사인(士人) 이화신(李華臣)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