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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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申晸)

서지사항
항목명신정(申晸)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628년(인조 6)∼1687년(숙종 13) = 60세.] 조선 중기 현종~숙종 때의 문신. 예조 판서를 지냈는데, 증직(贈職)영의정(領議政)이다. 자는 인백(寅伯)이고, 호는 분애(汾厓)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參判)신익전(申翊全)이고, 어머니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조창원(趙昌遠)의 딸로 인조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언니이다.

[인조 · 효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 26) 나이 21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 · 진사과(進士科)에 모두 합격하였다.[『방목』] 진사과에서 1등 3위로 합격하여, 신정은 젊은 나이에 문명(文名)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이 왕실과 혼인하였다가, 효종이 즉위하면서 <김자점(金自點)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었는데, 아버지 신익전과 함께 겨우 화(禍)를 면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인조 말엽에 영의정 김자점이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後宮) 조귀인(趙貴人)과 결탁하여 정권을 잡았는데, 조귀인의 딸이 김자점의 손부(孫婦)가 되자 더욱 그 세도(勢道)를 떨쳤다. 신익전의 딸이 조귀인의 며느리 곧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의 처가 되었는데, 아버지 신익전은 아들 신정에게 경계하여 김자점과 조귀인을 멀리하고 조심하게 하였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김자점과 조귀인을 함께 역적(逆賊)으로 몰아서 죽였는데, 신정의 종형(從兄) 신면(申冕)은 김자점과 친밀하다고 하여 장살(杖殺)되었으나, 신정과 신익전 부자는 겨우 화를 면하고 칩거하였다.[『도곡집(陶谷集)』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禮曹判書汾厓申公神道碑銘)」]

[현종 시대 활동]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노론 송시열(宋時烈)에 의하여 신정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에 진출할 수 있었다. 1664년(현종 5) 나이 37세에 춘당대시(春塘臺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빙고(氷庫) 별검(別檢)으로 있을 때 문과에 뽑히자, 정승 정태화(鄭太和)가 훌륭한 인재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1667년(현종 8)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어,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設書)를 겸임하였다.[『현종개수실록』 현종 8년 4월 9일 · 4월 11일, 『현종실록』 현종 8년 5월 30일]

1668년(현종 9) 승문원(承文院) 주서(主書)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다.[『현종개수실록』 현종 9년 6월 21일 · 12월 16일, 『현종실록』 현종 9년 12월 16일] 1669년(현종 10) 5월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다가,[『현종개수실록』 현종 5년 5월 14일] 11월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피혐(避嫌)하여 파직되었는데, 관직을 가진 채 시골에 내려갔기 때문이다.[『현종실록』 현종 10년 11월 3일 · 11월 13일]

1670년(현종 11)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었는데,[『현종실록』 현종 11년 2월 5일] 3월 접위관(接慰官)으로 차출되어, 부산포(釜山浦)로 내려갔다. 그때 대마도 도주(對馬島島主) 타이라 요시자네[平義眞]가 차왜(差倭) 타이라 시게미[平成尙] 등을 보내어 3포(三浦) 왜관(倭館)의 이동을 요구하였다. 조정에서 왜관의 이동을 허락하지 않자, 왜의 사자 타이라 시게미가 홧김에 칼을 빼어 사람을 해쳤다. 이때 신정이 접빈사로 3포에 파견되어 그들을 굴복시켜서, 마침내 관사를 옮겨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1671년(현종 12) 홍문관에 들어가서 수찬 · 교리(校理)를 차례로 역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그때 흉년이 크게 들었는데, 신정이 홍문관에 있으면서 차자(箚子)를 올려서, 왕세자(王世子: 숙종)의 가례(嘉禮)에 사치한 비용(費用)을 많이 들이는 것은 재난(災難)을 당하여 절검(節儉)하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니, 현종이 가납(嘉納)하였다.[『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그해 9월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김만중(金萬重) 등과 함께 경기도와 3남(三南) 지방에서 기민(饑民)을 진휼하는 상황을 점검하였다.[『현종실록』 현종 12년 9월 14일] 그 뒤에 이조 좌랑(左郞)을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 · 사헌부 집의(執義)를 역임하면서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현종실록』 현종 12년 5월 13일 · 6월 21일 · 7월 29일] 그때 사헌부 헌납(獻納)윤경교(尹敬敎)가 상소하여 영상(領相) 허적(許積)을 배척하자, 현종이 진노하여 그 관직을 교체시켰는데, 사헌부 집의 신정이 힘써 윤경교를 구원하자, 현종이 더욱 노하여, 신정도 함께 체직시키고, 윤경교를 귀양 보냈다.[『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1672년(현종 13)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가, 전라도 관찰사로 발탁되었다.[『현종실록』 현종 13년 2월 18일 · 3월 7일] 그때 호남 지방에서 흉년이 들자, 현종이 그를 발탁하여 관찰사로 내보내어서 전라도 기민을 구제하게 하였다.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1673년(현종 14) 호조 참의가 되었고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며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예조 참의 · 이조 참의를 역임하였다.[『현종개수실록』 현종 13년 11월 20일, 현종 14년 4월 22일 · 6월 6일 · 7월 2일 · 7월 11일 · 12월 27일, 『현종실록』 현종 14년 6월 6일 · 7월 2일]

신정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 노론(老論) 송시열을 공격하기 위하여, 윤휴(尹鑴)의 소론 일파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인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과 더불어 공모하여, 그 종실(宗室) 사람 이익수(李翼秀)를 시켜서 무고하기를, “효종의 능침(陵寢)의 돌에 틈이 생겼다.” 하였다. 또 이들은 영남 사람 장응일(張應一)을 사주하여 소장(疏章)을 올려서 송시열을 탄핵하였는데, 대사간 신정이 그 음모를 반박하여, 장응일이 귀양갔다. 그러나 소론의 참소(讒訴)에 의하여 현종이 김만중과 이선(李選)과 이숙(李䎘)과 민정중(閔鼎重)을 연달아 폄출(貶黜)시키자, 대사간 신정이 또 강력하게 상소하여 이들을 구원하였다. 1674년(현종 15) 평안도 압록강 유역에 청(淸)나라 사람들과 분쟁이 많았으므로, 현종이 신정을 특별히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그 분쟁을 해결하게 하였다.[『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 1) 윤5월 대사헌(大司憲) 윤휴와 지평 유하익(柳夏益) 등이 말하기를, “평안도 감사 신정은 술로 인하여 오랫동안 직무(職務)를 폐지하였고, 심지어 주정으로 성이 나면 칼[劒]을 빼서 휘둘러 위의(威儀)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의 관직을 파면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숙종이 윤허하였다. 신정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술에 취하기만 하면 시사(時事)를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소론이 이를 듣고 탄핵한 것이다.[『숙종실록』 숙종 1년 윤5월 6일] 소론 일파가 정권을 전단(專斷)하였는데, 소론이 평소 그를 미워하다가, 가장 먼저 그를 탄핵하여 물러나게 했다. 그는 산관(散官)으로 물러나서 강호(江湖)에 은거(隱居)하였다. 얼마 뒤에 다시 조정으로 나와 공조 참판 · 호조 참판 · 병조 참판 ·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고,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 [『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1679년(숙종 5) 신정이 한성부 좌윤으로 있을 때 윤휴가 금송(禁松)을 벌채(伐採)하여 집을 지은 일의 진상을 폭로하였다가 도리어 소론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숙종실록』 숙종 5년 2월 16일 · 2월 18일] 그해 6월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서 남인(南人)들이 쫓겨나고,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승문원 제조(提調)를 겸하였다가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숙종실록』 숙종 6년 4월 17일]

1680년(숙종 6) 6월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윤8월에 돌아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그때 성변(星變)이 일어나자, ‘소미책(消弭策)’ 곧 재변을 없애는 방법을 자세히 상소하니 숙종이 매우 좋아하였다.[『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숙종실록』 숙종 6년 윤8월 20일 · 10월 3일 · 10월 9일] 그해 10월 내의원(內醫院) 분(分) 제조(提調)가 되어 경덕궁(慶德宮)을 숙직(宿直)하면서, 중궁 인경 왕비(仁敬王妃)의 병을 간호하였다. 인경 왕비가 승하하자, 빈전도감(殯殿都監) 제조(提調)에 임명되어 장례를 치렀다.[『숙종실록』 숙종 6년 10월 19일 · 10월 27일] 한성부 좌윤이 되어서 비변사(備邊司) 유사(有司)와 성균관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 중추부(中樞府) 동지사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의금부(義禁府) 동지사를 겸임하였으나, 병이라고 칭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가,[『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1681년(숙종 7)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숙종실록』 숙종 7년 4월 9일]

1682년(숙종 8)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제학(提學)을 거쳐, 공조 판서가 되었다.[『숙종실록』 숙종 8년 4월 19일 · 8월 16일 · 9월 17일] 1683년(숙종 9)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가 예조 판서가 되었고, 윤6월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여러 번 상소하여 힘써 사직(辭職)하기를 원하니 현종이 이에 체차(遞差)하도록 허락하였다.[『숙종실록』 숙종 9년 3월 28일 · 6월 5일 · 윤6월 28일 · 7월 17일] 그해 8월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고 1684년(숙종 10) 12월 의금부 판사(判事)에 임명되면서 예문관 제학이 되어서 문형(文衡)을 맡아보았다.[『숙종실록』 숙종 9년 8월 7일, 숙종 10년 12월 16일] 1686년(숙종 12) 3월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관직을 물러났다. 별시 (別試) 문과(文科)초시(初試) 시관(試官)으로 불렀으나 오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6월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되었다.[『숙종실록』 숙종 12년 3월 8일 · 4월 13일 · 6월 16일]

1687(숙종 13) 12월 22일 병으로 강화 유수 관사(官舍)에서 돌아가니, 향년(享年)이 60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숙종이 애도하여 2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숙종실록』 숙종 13년 12월 23일] 상여가 지나가는 고을마다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서민(民庶) 부녀자(婦女子)에 이르기까지 슬퍼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훌륭한 재상(宰相)이 세상을 떠났다.” 고 하였다. 신정은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나 관각(館閣)의 전액(篆額)이나, 나라의 금석문(金石文)을 쓴 것이 많다. 특히 시문(詩文)에도 뛰어나서 격조가 높다는 평을 받았는데, 그의 시문을 모은 것이 『분애집(汾厓集)』과 『분애유고(汾厓遺稿)』가 있다. 그 밖에 저서로는『임진록촬요(壬辰錄撮要)』 등이 있다.

[<경신대출척>과 신정]
1671년(현종 12) 신정이 사헌부 집의로 있을 때, 사헌부 헌납 윤경교가 상소하여 영의정 허적의 비리를 배척하다가, 현종이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다. 집의 신정이 힘써 윤경교를 구원하자, 현종이 더욱 노하여 신정도 아울러 파직하고, 윤경교를 귀양 보냈다. 그때 신정이 강력하게 반박하다가, 크게 현종의 뜻에 거슬리어 다시는 삼사(三司)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1659년 5월 효종이 돌아가자, 인조의 계비(繼妃)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의 복제를 둘러싸고 서인 송시열의 1년 기년설(朞年說)과 남인 허목(許穆)의 3년설이 대립하였다. 결국 이 논쟁에서 서인이 승리하면서 서인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때 영의정 허적은 남인이었으므로, 서인의 대간 신정과 윤경교가 서인 송시열을 위하여 남인 의 거두 영의정 허적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파직되거나 귀양을 갔다.[『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현종 시대에 요승(妖僧) 한 사람이 궁궐(宮闕)에 나타나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들이라고 자칭하였다. 인조 때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고, <강빈 옥사(姜嬪獄事)>가 일어나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는 죽이고, 그 어린 세 아들도 제주도에 귀양보냈다가 모두 죽였다. 그런데 이때 소현세자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중이 나타났으므로, 현종은 공경(公卿) 대신들을 모아서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정승 허적은 눈치를 살피면서 여러 대신들과 눈짓과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이때 신정이 곧바로 자리로 들어가 앉으면서 허적과 앉아 있는 남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어찌하여 한결같이 불법을 전하는 나한(羅漢)과 같은가?” 하고 곧 ‘준불의(雋不疑)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정색(正色)하고 요승을 공박하여 내치면서, 임금에게 올리는 주의(奏議)를 쓴 다음 붓을 던지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이리하여 그 요승은 쫓겨나고, 영의정 허적과 남인들은 이때부타 신정을 크게 미워하였다.[『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1674년(현종 15) 효종의 왕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돌아가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가 다시 대두되었는데, 남인의 1년 기년설이 서인의 9개월 대공설(大功說)에 승리하여, 남인들이 정권을 잡고 서인을 추방하였다. 숙종은 남인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하였는데, 1680년(숙종 6) 영의정 허적이 궁중에서 사용하는 천막인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사용하였다고 하여, 이른바 ‘유악(油幄) 사건’을 일으켰다. 숙종은 허적의 행위를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라고 분노하고, 영의정 허적과 남인들을 모두 체포하여 죽이거나 귀양보냈는데, 이것을 <경신대출척>이라고 한다.

1680년(숙종 6)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경신대출척 이후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한 입장을 취한 송시열 · 김익훈(金益勳) 같은 노장층과 온건한 입장을 취한 윤증(尹拯) · 한태동(韓泰東) 같은 소장층이 서로 대립하였다. 전자를 노론이라고 하고, 후자를 소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그보다 앞서 송시열의 수제자였던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비문을 부탁하였다가, 송시열이 윤선거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가 함락될 때 가족들과 함께 죽지 않고 혼자 살아남은 것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고 하여 서로 원수가 되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성품과 일화]
신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도곡집』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 그는 사람됨이 남다르게 뜻이 크고 기개(氣槪)가 있었다. 나이가 겨우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일찍이 끼니를 놓치게 되었을 적에 울면서 자신을 팔아서 어머니를 공양(供養)하기를 자청한 일이 있었다. 술을 즐겨 마시어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담론(談論)할 때에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기탄함이 없었다. 사악한 무리들이 때를 틈타고 날뛰는 것을 보면 면전에서 질책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때로는 조롱하고 업신여기기까지 하였다.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 힘껏 풍헌의 체통을 견지하여 길거리에서 횡행(橫行)하는 부랑자들을 잡아다가 처단하니, 도성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여러 부마(駙馬)의 저택이 법도를 넘어 크게 지었으므로, 송시열이 이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이 조정을 떠난 이튿날 임금이 부마들에게 명하여 그대로 그 집에서 살게 하였으므로, 신정이 다시 이를 쟁론(爭論)하였다. 문장(文章)은 아름답고 글씨는 매우 서법(書法)에 밝았다. 시(詩)는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의 감탄하였을 정도이다. 신주(神主)를 모시는 애책문(哀冊文)을 주로 맡아서 썼는데, 비문(碑文)과 책문(冊文)을 많이 쓰서 거듭 내구마(內廐馬))를 하사받았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利川) 수정리(水井里)에 있고,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도곡집(陶谷集)』 권9 「예조판서 분애 신공 신도비명(禮曹判書汾厓申公神道碑銘)」] 둘째 아들 신서화(申瑞華)가 훈신(勳臣)이 되어서 영의정에 추증(追增)되었다.

첫째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교리 심희세(沈熙世)의 딸인데, 자녀는 3남 1녀를 낳았고, 둘째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판관(判官)허섬(許暹)의 딸인데, 자녀는 5남 3녀를 낳았다. 자녀가 모두 8남 4녀인데, 사람들이 다복하다고 하였다. 장남은 신징화(申徵華)이고, 차남은 신서화(申瑞華)인데 부사를 지냈다. 3남은 신개화(申啓華)인데 승지를 지냈고, 4남은 신진화(申鎭華)이다. 5남은 신상화(申尙華)인데 별제(別提)를 지냈고, 6남은 신석화(申錫華)인데 군수(郡守)를 지냈다. 7남은 신택화(申宅華)이고, 8남은 신종화(申從華)이다. 장녀는 이석형(李碩亨)의 처이고, 차녀는 이익하(李翊夏)의 처이며 3녀는 홍중익(洪重益)의 처이고, 4녀는 이세규(李世規)의 처이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농암집(農巖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성호사설(星湖僿說)』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학봉전집(鶴峯全集)』
■ 『남파집(南坡集)』
■ 『외재집(畏齋集)』
■ 『분애유고(汾厓遺稿)』
■ 『호곡집(壺谷集)』
■ 『남계집(南溪集)』
■ 『수촌집(水村集)』
■ 『서하집(西河集)』
■ 『식암유고(息庵遺稿)』
■ 『수곡집(睡谷集)』
■ 『명곡집(明谷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춘소자집(春沼子集)』
■ 『송파집(松坡集)』

■ [집필자] 이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