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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8년(선조 31)∼1662년(현종 3) = 65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부사(府使)를 지냈고, 증직(贈職)은 도승지(都承旨)이다. 자는 효사(孝思)이고, 호는 은휴와(恩休窩)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대사성(大司成)신민일(申敏一)이고,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현감(縣監)성문준(成文濬)의 딸인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손녀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방목』] 1628년(인조 6) 강릉(江陵)의 집경전(集慶殿)에 불이 나자, 조정에서 파견한 김상헌(金尙憲)이 태조(太祖)의 초상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과거를 보였는데, 그때 신상이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참석하지 않는 지방 별시(別試)를 인정하지 않고, 나중에 임금이 친히 시험을 보이는 별시에서 갑과 장원을 병과로 붙이기로 하였으므로,[『승정원일기』 인조 6년 10월 27일] 1629년(인조 7) 별시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2세였다.[『방목』, 『응천일록』 권4]
1630년(인조 8) 4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는데, 관례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였고, 대교(待敎) ·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신상 묘지(申恦墓誌)」, 『승정원일기』 인조 8년 4월 2일] 1632년(인조 10) 사헌부 감찰(監察)로 전직되었다가, 다시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 1634년(인조 12) 4월 병조 좌랑(左郞)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관향사(管餉使)의 종사관(從事官)을 거쳐서, 공조 좌랑 · 예조 좌랑 · 병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그해 12월 황해도 관찰사의 종사관이 되고, 종4품하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승품되어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가 되었다.[「신상 묘지」, 『승정원일기』 인조 12년 4월 22일 · 12월 26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자(王子)와 비빈(妃嬪)들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였다. 그 때 신상은 종묘(宗廟)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는데, 강화도가 함락되자, 신주를 땅속에 파묻었다. 강화도가 함락된 다음에 김상용(金尙容)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자결하고, 부녀자들이 오랑캐 군사들에게 능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신상은 청(淸)나라와 화해를 반대하고 척화(斥和)를 주장하고, 주화파(主和派)를 공격하였다. 그해 9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신상은 화친(和親)을 주장한 권신(權臣) 최명길(崔鳴吉)을 엄정(嚴正)한 글로 탄핵하였다가 파직되었다. 그때 사간원에서는 후금(後金)에 대한 호칭 문제로 최명길의 관직을 삭탈하라고 아뢰었다. 뒤에 특명으로 개성부 교수(開城府敎授)가 되었다. 당시 대간에서 신상 · 홍처우(洪處宇) 등이 모두 척화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계속하여 외직으로 방출되었다.[『인조실록』 인조 14년 11월 13일]
그 뒤에 정권을 잡은 주화파가, 신상이 화친을 배척한 죄를 논하여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축출하였다. 신상은 원주(原州) 동쪽 봉천(鳳川)의 위에다 초가 두 칸을 지어놓고, 손수 편액(扁額)을 ‘휴와(休窩)’라고 써서 붙였다. 이때부터 인사들과 교유하는 것을 사절하고 산수(山水)의 사이를 소요하며 노년을 마치려고 계획하였다. 1638년(인조 16) 12월 대사령(大赦令)으로 석방되었다.[『인조실록』 인조 16년 12월 17일] 고산 찰방(高山察訪)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벼슬에 임명되면 서울에 들어가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해직되면 곧바로 향리 원주로 돌아오는 등 항상 이런 일을 되풀이 하였다.[「신상 묘지」] 1646년(인조 24) 6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인조실록』 인조 24년 6월 14일]
[효종~현종 시대 활동]
효종 시대 대간으로 있으면서 탐욕스러운 어떤 재상을 탄핵하니, 효종이 자신의 의견과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말의 진원지를 캐물었다. 신상은 동요하지 않고 인피(引避)하니, 효종이 그를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그때 탐욕스러운 재상과 가까운 사람이 인사 행정을 맡았기 때문에 그에게 굴욕을 준 것이었다. 효종이 두 사람을 모두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그 뜻이 두 사람을 조정(調停)하려는 데 있었으나, 곧바로 대각(臺閣)의 계사(啓事)로 인해 방면하였다. 그 뒤에 강원도 현산(峴山)의 수령관을 자청하여 나갔다가, 또한 몇 달 만에 파직당하여 돌아왔다.[「신상 묘지」]
1652(효종 3) 12월 대간 신상이 석유황(石硫黃)을 방납(防納)하는 이응시(李應蓍)를 탄핵하였는데, 그 관련 서찰을 직접 보았다고 하였다가 거짓말이 탄로가 나서 파직되었다. 사헌부에서, 이응시가 붉은 말총갓을 요구하고 석유황을 방납하려고 한 일에 대하여 추고하는 일로 서면을 보내 물으니, 이응시가 함사(緘辭)로 답하기를, “지난달 29일에 경상도 병마사 원숙(元肅)의 영문(營門) 사람이 와서 서찰을 전하였는데, 뜯어 본 자취가 뚜렷이 있으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 영문 사람이 ‘26일에 참판 이시매의 집에 전하고 29일에 가서 답서를 요구하였더니, 그 서찰을 도로 주었다.’ 하였습니다. 신상이 이시매를 찾아간 것이 나흘 뒤라면 그 서찰을 얻어 보았다고 한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였다.[『효종실록』 효종 3년 12월 1일 · 12월 16일] 1657년(효종 8) 7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이 되었다.[『효종실록』 효종 8년 7월 26일]
1661년(현종 2) 1월 품계가 승품되어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다.[『현종개수실록』 현종 2년 1월 25일] 1662년(현종 3) 봄에 함경도 관찰사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오다가, 11월 20일 명천역(明川驛) 관사에 도착하여 아무런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5세였다.[「신상 묘지」]
그가 저술한 『부음록(缶音錄)』 세 권과 『휘언(彙言)』 두 편이 집에 간직되어 있고 정서(正書) · 행서(行書) · 초서(草書)의 필첩인『진행초첩(眞行草帖)』이 세상에 전한다.[「신상 묘지」] 또 그의 사후에 문집으로 『은휴와집(恩休窩集)』이 간행되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의 함락과 신상]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자와 비빈들이 먼저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였을 때 신상은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청나라 태종(太宗) 홍타지와 제 9왕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이 10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열흘 만에 도성(都城)을 침공하여, 서울의 종묘와 사직을 지키지 못할 만큼 위급하게 되자, 인조는 먼저 비빈과 왕자들을 강화도로 피난보내기로 하였다. 이에 궁중의 사람들과 사대부의 노약자들이 강화도로 들어갔다.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서울의 대소 서민들이 모두 강화도로 몰려들어 나루터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길이 막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서 45일 동안 청나라 군사와 싸웠다.
그때 청나라 태종 홍타지는 먼저 강화도를 함락하여 남한산성을 항복시키려고, 그 동생 도르곤에게 팔기병(八旗兵) 3만 명을 거느리고 작은 거류배를 만들어서 강화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예친왕 도르곤은 기병 3만 명을 80척의 삼판선(三板船)에 태우고 갑곶진(甲串津)에 주둔하면서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우리의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청나라 군사들은 이 틈을 타서 급히 강을 건넜는데, 강화 유수 장신(張紳) · 강진흔(姜晋昕) · 김경징(金慶徵) · 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다가 도망쳤다. 1637년(인조 15) 1월 22일 예친왕 도르곤의 팔기병들이 조각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강화성의 남문(南門)으로 들이닥치니, 중관(中官) 김인(金仁)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元孫)을 업고 작은 배를 얻어 타고 주문도(注文島)로 도망갔다. 대신 김상용은 적병이 사방으로 포위하자, 화약을 폭발시켜 불길에 뛰어들어 죽었으며, 공조 판서 이상길(李尙吉)은 성 밖에 있다가 강화부로 달려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2일]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에 들어왔을 때 신상은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의 명령에 따라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땅에 묻었다.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이 용사를 모집하여 출격(出擊)하였으나 대적하지 못한 채 더러는 죽기도 하고 더러는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얼마 뒤에 청나라의 대병(大兵)이 성을 포위하고 예친왕 도르곤이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권유하였다. 봉림대군이 한흥일(韓興一)에게 화친에 응하는 척하면서 청나라 진중(陣中)에서 가서 살피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은 대신(大臣)이 와야만 한다고 하여 봉림대군이 해창군 윤방에게 가도록 하였다. 윤방이 다녀와서 예친왕 도르곤이 조정에서 화친을 이룬 일을 말하고 봉림대군과 서로 만나 보기를 원한다고 하자 봉림대군이 이르기를, “저들이 호의를 갖고 나를 유도하는 것인지는 실지로 헤아릴 수 없으나, 일찍이 들으니, 동궁(東宮: 소현세자)도 가기를 원했다고 하니, 진실로 위급함을 풀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청나라 군의 진영 문 앞으로 갔다. 그러자 예친왕 도르곤이 역자(譯者)로 하여금 인도해 들이게 하고 경례(敬禮)를 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2일]
저물녘에 봉림대군이 예친왕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왔는데, 군사들은 성 밖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은 동서(東西)로 길을 나누어 피차간에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군병을 단속하여 살육을 못하게 하였으며, 청나라 군의 여러 진영으로 하여금 사로잡은 사족(士族)의 부녀자들을 되돌려 보내도록 허락하였다. 청나라에서 조정의 인사들로 하여금 모두 예친왕 도르곤에게 절을 하도록 협박하면서 칼을 가지고 독촉하였고, 또 세자빈(世子嬪)에게도 독촉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미천한 사람의 옷차림으로 변장하고 도피하였으나, 그는 혼자 굳게 앉아서 꼼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화구(火具)를 어느 외척에게 주어 세자빈에게 건네주도록 하고, 세자빈을 수행한 무리들로 하여금 자결(自決)하도록 아뢰게 하고, 그도 잇달아 따라서 죽으려고 하였다. 예친왕 도르곤이 이를 보고 감탄하고 저지하였으므로, 세자빈도 또한 오랑캐에게 절을 하는 모욕을 모면할 수 있었다.[「신상 묘지」] 예친왕 도르곤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팔기병의 약탈을 금지하였다. 또 조선 조정의 주화파 최명길 등의 가족을 찾아서 철저히 보호하여 주었는데, 이 일로 주화파는 비난을 받았다.
예친왕 도르곤이 도로 강을 건너가자, 팔기병 중에서 몽고병[蒙兵]들이 난리를 일으켜서 거의 남김없이 집에 불 지르고 창고를 파헤치며 남자를 살해하고 부녀자를 약탈하였다. 이때 사대부의 부녀자들이 상당히 많이 욕을 보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화도의 소나무마다 목울 매어 죽은 부녀자의 소복(素服)이 목화꽃처럼 강화산을 뒤덮었다고 한다. 도제조(都提調) 윤방과 제조(提調) 신상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성중(城中)에 뒤떨어져 머물면서 묘(廟) 아래 묻었는데, 이때에 몽고병들이 파헤쳐서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신주를 잃어버렸다.[「신상 묘지」, 『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자, 남한산성에서 싸우던 인조도 주화파 최명길의 주장에 따라 청나라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성품과 일화]
신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신상 묘지」] 그는 모습이 준수하고 눈썹과 수염이 성긴데다가 의관(衣冠)이 검소하여 그 기상(氣象)이 산야(山野)의 사람과 같았다. 집에서 생활할 때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하루종일 꿇어앉아 책글 읽었는데, 책상 위에 책들이 정돈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를 갈 무렵에 정직하고 곧은 지조가 이미 그가 지은 시어(詩語) 속에서 드러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또 이어서 계모 윤 부인(尹夫人)의 상(喪)을 당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었을 때 광해군이 윤리를 벗어난 일을 하자,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원주(原州)에서 살았다. 계모 윤 부인을 섬길 적에 지극하게 공경하고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아우 7명이 모두 윤 부인의 소생이었으나, 우애가 깊었고,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도 법도가 있었으며, 노복에 이르기까지 법도가 시행되어 집안이 숙연(肅然)하였다.
시문(詩文)이 고결하고 필체가 청수하였다.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가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신상의 조행과 문필이 남들보다 뛰어났으나, 스스로 자신을 감추었기 때문에 세상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였다. 말이 어눌하고 의논이 강직하여, 남의 과실을 포용하지 못한 바람에 여러 차례 위험한 덫을 건드려 조정에서 배척을 당하였다. 신상도 스스로 시대를 이탈하여 일생 동안 불우하게 보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소는 강원도 원주(原州) 팔공산(八公山)에 있고, 손자 신임(申銋)이 지은 묘지(墓誌)가 남아 있다.[「신상 묘지(申恦墓誌)」] 손자 신유(申鍒)가 출세하여, 신상이 도승지로 추증(追贈)되었다.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사헌부 감찰 이흥인(李興仁)의 딸인데, 자녀는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신명규(申命圭)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차남 신명기(申命基)는 독실한 행실이 있었다. 장녀는 현령(縣令)정엄(鄭淹)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부사(府使)강석창(姜碩昌)에게 시집갔고, 3녀는 서문현(徐文顯)에게 시집갔고, 4녀는 오도익(吳道翊)에게 시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