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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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申砬)

서지사항
항목명신립(申砬)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46년(명종 1)∼1592년(선조 25) = 57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 · 북병사(北兵使)이고, 증직(贈職)영의정(領議政) 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이다. 자는 입지(立之)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 신화국(申華國)이고, 어머니 윤씨(尹氏)는 첨정(僉正) 윤회정(尹懷貞)의 딸이다. 오랑캐 추장(酋長) 니탕개(尼湯介)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서 왜군과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싸우다가 순절(殉節)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 즉위) 식년(式年) 무과(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방목』] 무과에 급제한 다음에 선전관(宣傳官)이 되어서 비변사(備邊司)의 낭관(郎官)을 겸임하였다.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都事), 경력(經歷)을 역임(歷任)하고 외직(外職)으로 진주 판관(晉州判官)으로 나갔다. 이때 진주목사(晉州牧使) 양응정(梁應鼎)이 그에게 충고하기를, “그대는 큰 그릇인데, 학문(學問)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양응정이 드디어 책을 들고 나와서 ‘사제(師弟)의 예(禮)’를 행하고 글을 가르쳤는데, 그때부터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문무(文武)를 겸전한 양장(良將)이 되었다. 송천(松川) 양응정은 선조 때 8대 문장가 중 하나이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都巡邊使贈領議政平陽府院君申公砬墓碣銘)」]

당시에는 남쪽의 왜구(倭寇)보다 북쪽의 오랑캐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것이 국방에서 현안이었다. 세종 때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획정(劃定)되 이후에도 두만강 유역에 여진족의 침입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경도(咸鏡道)를 남북으로 나누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는 경성(鏡城)에 북병영(北兵營)을 두고, 6진(六鎭)의 병마사(兵馬使)를 통솔하였는데, 이를 북병사(北兵使)라고 하였고, 남병사(南兵使)는 함흥(咸興)에 남병영(南兵營)을 두고 군사 물자와 병력을 보충하였다. 특히 두만강 가에 있는 5진(五鎭)의 방어가 가장 중요하였는데, 신립은 5진 중 경원 부사(慶源府使)와 경흥 부사(慶興府使)를 연이어 역임하였다. 또 1583년(선조 16) 온성 부사(穩城府使)가 되었을 적에 본부(本府)에 예속(隸屬)되었던 번호(藩胡) 곧 토착 여진들이 모두 그의 위엄(威嚴)과 신망(信望)에 복종하여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였다. 이때 오랑캐 추장 니탕개(尼湯介)가 율보리(栗甫里) 등과 함께 수만 명의 오랑캐들을 이끌고 반란(叛亂)을 일으켜서 두만강변의 5진의 성보(城堡)를 침입하였다. 북변(北邊)이 소란해지자 조정에서 여러 장수들을 보냈으나, 차례로 패전(敗戰)하였다. 이에 신립이 병사(兵士)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이를 구원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오랑캐들이 형세를 관망하다가 도망쳐 버렸다. 이때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이 함경도 절도사(咸鏡道節度使)로 있으면서 온성 부사 신립의 용감한 지략(智略)을 보고 감탄하다가 신립의 승전(勝戰)한 소식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선조가 신립의 공로(功勞)를 포상(褒賞)하여, 1584년(선조 17) 3월에 그를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승진시켰다. 신립은 오래지 않아 니탕개를 체포하여 목 베어 북변의 소란을 진압하였다.[『송자대전』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

온성 부사 신립이 북변을 침입한 니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하자, 선조는 신립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임명하였다. 또 평안도 병마사(平安道兵馬使)로 이배(移拜)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그가 조정으로 돌아오는 날 그를 보려고 도성(都城)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그의 당당한 위용을 보고 모두 압도당하여 부복(俯伏)하고,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고 한다.[『송자대전』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 신립은 곧 한성부 판윤으로 일반 행정을 맡아보면서 여러 부서(部署)의 일을 겸임하였는데, 병조 판서의 물망(物望)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송자대전』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은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에 임명되어 적은 병력을 이끌고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의 대군과 대결했다가 참패를 당하였다. 4월 28일 부하 장수 김여물(金汝物)과 함께 탄금대의 달천(達川)에서 투신하여 자결하니[『다산시문집』 권4], 그 때 신립의 나이 57세였다.

[여진의 정벌]
1583년(선조 16) 2월 호적(胡賊)이 다시 경원부를 포위하였다. 온성 부사 신립이 경병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구원하여 성에 들어가니, 호적이 세 겹으로 포위하였다. 신립의 군사가 결사적으로 싸웠는데, 보루로 오르는 적장을 신립이 한 개의 화살로 쏘아 죽이니, 호적이 마침내 물러갔다. 호적이 또 안원보(安原堡)에 침입하였는데, 병력이 매우 강성하여 지키는 장수들이 모두 끝까지 지킬 자신이 없었다. 신립이 바야흐로 아산(阿山)을 구원하러 가다가 안원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성을 넘어 도망하는 자를 발견하고 즉시 목을 베어 깃대에 매달아 군사의 마음을 진정시키니, 호적이 그 사실을 알고는 감히 침범하지 못한 채 물러갔다. 그러나 나중에 병사(兵使)가, 안원은 성이 작고 병력이 약하다고 하여 철수시켜 본부(本府)로 들어가게 하니, 호적이 마침내 안원보에 들어가서 곡식을 약탈해 갔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 2월 1일]

그 달에 북병사 이제신이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 배반한 오랑캐를 토벌했다. 온성 부사 신립, 부령 부사(富寧府使) 장의현(張義賢),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이 세 길로 나누어 강을 건너서 금득탄(金得灘) · 안두리(安豆里) · 자중도(者中島) · 마전오(麻田塢) · 상가암(尙加巖) 등지 여러 부족의 소굴을 습격하여 쌓아둔 식량과 무기를 불 지르고, 3백여 급을 벤 뒤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왔다. 첩보가 보고되자, 선조가 비변사(備邊司)에 하교하기를, “나는 본래 이제신이 이렇게 할 줄을 알았다. 그러나 모두들 그르다고 하므로, 나도 나의 소신을 지킬 수가 없었다. 지금 이미 공을 세웠으니, 잡아다 국문하는 것은 온당치가 않다.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그러나 호적에게 패한 책임을 북병사 이제신에게 묻고자 했던 비변사에서 회계하기를,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다만 잡아오라는 명이 이미 내려 도사(都事)가 벌써 떠났으니, 중도에서 그만두고 돌아오게 하는 것도 전도되는 일이니, 잡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의논하여 조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 2월 1일]

그 해 5월 호적의 대추(大酋)인 율보리와 니탕개가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길을 나눠 종성(鍾城)의 요새지에 들어왔다. 우후 장의현, 판관 원희(元喜), 군관 권덕례(權德禮) 등이 기병과 보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 여울을 지키며 한참동안 대항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인데다가 권덕례가 피살되자 나머지는 모두 도망해 돌아와 성으로 들어가니, 호적이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병사(兵使) 김우서(金禹瑞)가 군사를 거두어 성을 지켰는데, 해가 저물어 적이 물러가자, 부사(府使)유영립(柳永立)이 나가서 공격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유영립이 몰래 판관 원희에게 명령을 내려 기병장(騎兵將) 김사성(金嗣成)을 인솔하고 동문(東門)을 열고 나가게 하여, 적의 머리 5급을 베어 왔는데, 김우서는 오히려 명령을 어겼다고 하여 원희 등에게 장형(杖刑)을 가하였다. 이튿날 호적이 또 와서 포위하였는데 해가 질 무렵 온성 부사 신립이 날랜 기병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자, 적이 허둥지둥 도망갔는데, 강까지 추격하고 돌아왔다. 김우서가 사람을 시켜 성으로 맞아들여 서로 만나보자고 하였는데, 신립이 응하지 않고는 북치고 피리 불면서 성을 지나쳐 가버리니, 김우서가 크게 부끄럽게 여겼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 5월 1일]

1584년(선조 17) 3월 온성 부사 신립이 변방의 일에 대해 보고하는 일과 또 모친에게 문안드릴 일로 서울에 왔는데, 선조가 인견(引見)하고 술을 내려주고, 금(錦) 2필과 단(緞) 2필을 하사하였다.[『선조실록』 선조 17년 3월 8일] 신립이 북방의 상황을 자세히 아뢰자 선조는 북병사 김우서를 파직하고, 신립으로 대신하도록 명하였다.[『계갑일록』] 이보다 앞서 1583년(선조 16) 7월에 선조가 전교하기를, “신립이 공로를 세운 이후 그에게 노모(老母)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매월 주육(酒肉)을 보내 주고는 있으나, 다만 나이 많은 사람이어서 뜻하지 않게 병을 얻을 염려도 있으니, 미리 그 자제(子弟)들에게 말하여 만약 병이 들면 그 즉시 승정원에 와 알리도록 하라. 내가 의원을 보내서 구제하도록 하겠다.”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16년 7월 18일] 1

오랫동안 북쪽에서 지냈으므로 체직(遞職)하고 돌아가 편모(偏母)를 뵙게 해 주기를 상소하였으나, 선조가 현직(現職)을 그대로 띤 채 귀녕(歸寧)하기를 특명(特命)하면서 직위(職位) 바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한편, 친히 교외(郊外)까지 나가서 그를 맞이하였다. 이때 선조가 그의 전포(戰袍)에 핏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더욱 극진히 위로하며 즉시 어의(御衣)를 벗어 그에게 입혀 주었다. 또 신립이 임지(任地)로 돌아갈 적에도 선조가 교외에 나가서 전송하고 은사(恩賜)를 더하였다.[『송자대전』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

[왜구의 방어]
1587년(선조 20) 2월 왜선(倭船)이 흥양(興陽)에 침구하였는데, 녹도 보장(鹿島堡將) 이대원(李大元)이 막아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이에 앞서 왜선 수 척이 녹도 근처에 침범하자 이대원이 미처 주장(主將)에게 보고하지도 않은 채 그들을 쳐서 수급을 벤 일이 있었는데, 수사(水使) 심암(沈巖)은 그가 자기의 공으로 삼은 것을 미워하였다. 얼마 안 되어 왜선이 손죽도(損竹島)를 침범하자, 심암이 이대원을 척후(斥候)로 삼았는데 뒤이어 응원하지 않았으므로 적군은 많고 아군(我軍)은 적어서 대적하지 못하고 패전하였다. 조정에서 패전한 까닭을 조사하고 수사 심암을 잡아다가 심문한 다음에 효수(梟首)하여 대중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좌방어사(左防禦使) 변협(邊恊), 우방어사(右防禦使) 신립을 보내어 밤을 새워 남쪽 지방으로 출정하게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가 도내의 군사를 다 출동시켜 바닷가에 주둔하였으나 왜선은 이미 돌아가 버렸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0년 2월 1일]

신립과 변협을 전라도의 좌ㆍ우 방어사로 삼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본도에 달려 내려가게 하고, 전라도 관찰사 홍여순(洪汝諄)은 나주(羅州)에서 각 읍에 명령을 전하여 군대를 동원해서 전지(戰地)에 가게 했으며, 남원(南源) 등지의 관군들은 순천(順天)에 나아가 진을 쳤고, 전주(全州) 등지의 관군들은 낙안(樂安)으로 나아가 진을 쳤으며, 우도(右道)의 각 읍의 군사는 모두 바다 연변으로 나아가 진을 쳤는데, 5~6일이 지나도 바다에서는 왜적이 왔다는 경보가 없어서 각 진(鎭)의 군사들을 해산시켰다.[『난중잡록』 권1] 신립은 서울로 돌아와서, 선조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그 해 12월 선조가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병조 판서 정언신(鄭彦信), 부제학 윤선각(尹先覺: 윤국형), 남병사 신입을 인견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0년 12월 9일] 1589년(선조 22) 8월 우의정 정언신, 동지(同知) 신립, 전라 병사(全羅兵使) 이일(李鎰)을 인견하여 변비(邊備)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2년 8월 16일]

[<임진왜란> 때 탄금대의 순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1592년(선조 25) 2월 대장 신립과 이일을 파견하여 각 도의 성보(城堡)와 병기(兵器) 시설을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으로 가고,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 지방으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다.[『국조보감』 권 31] 당시 두 사람을 북방의 여진족을 막는데 큰 무공(武功)을 세워서 모두 명장(名將)이라고 일컬었다. 이때 왜군이 침입한다는 소문이 많았기 때문에 선조가 두 사람을 보내어 각도의 해변가의 군사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부산포(釜山浦)를 공격하고 동래(東萊)를 함락시킨 뒤 북쪽으로 쳐들어오자, 여러 성진(城鎭)들이 소문만 듣고도 저절로 무너져 버리는 상황에서 이일과 신립의 군사마저 잇따라 패몰(敗沒)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조가 계책을 결단하여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으므로, 왜적이 마침내 서울을 함락시켰다.[『계곡집』 권13] 그 해 4월 신입을 삼도 순변사에 제수하였다. 선조가 친림하여 전송하면서 보검(寶劍)한 자루를 하사하고 이르기를, “이일 이하 그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경이 모두 처단하라. 중외(中外)의 정병을 모두 동원하고 자문감(紫門監)의 군기(軍器)를 있는 대로 사용하라.” 하였다. 그가 출병하자 도성 사람들이 모두 저자를 파하고 나와서 구경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4월 17일]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는 이 때의 상황에 관해 “선조가 한성부 판윤 신립을 도순변사로 하고, 전 목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서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신립이 출동할 때에 군사의 위용이 매우 엄숙하여 사람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해 4월 25일 충주 달천(達川)에서 적과 맞닥뜨렸으나, 대응 조치가 적절하지 않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익사(溺死)했다. 정병(精兵) 5백여 명도 모두 물에 빠져 숨졌다.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에서 전사하였는데, 29일 패전한 사실이 선조에게 보고되었다. 신립의 패전한 장계(狀啓)가 궁궐에 도착하자, 선조와 대신들은 물론 궁 밖의 백성들까지 모두 어찌할 줄을 몰라서 당황하였다. 겁에 질린 선조는 측근과 비빈(妃嬪)만을 데리고, 30일 한밤중에 서울을 빠져나가 서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상촌집』 권56] 이때 임금이나 백성 할 것 없이 상하 모두가 그를 간성(干城)처럼 믿고 있었는데, 그가 패배한 소식이 알려지자, 선조는 겁을 먹고 곧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송자대전』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

신립과 이일은 일찍이 북쪽 오랑캐 니탕개를 쳐서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였으므로 그 용명(勇名)이 천하(天下)에 떨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왜적이 온 나라를 들어 침구(侵寇)해 와서 장차 중국(中國)과 충돌(衝突)하려고 하니, 그 병력(兵力)은 대략 30만이나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태평(太平)을 누린 지가 오래 되어 크고 작은 벼슬아치들이 안일(安逸)과 희락(嬉樂)만을 일삼았는데, 조헌(趙憲)이 왜적이 반드시 침입할 것을 알고 그들을 방어(防禦)할 계책을 선조에게 올렸지만, 모두들 미친 짓이라고 비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형세(形勢)가 급박해지자 당시의 정승들이 신립을 파견하기를 청하니, 선조가 난색을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나의 손톱과 어금니 같은 사람인데, 이러한 때에 어찌 보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굳이 청하기를 마지않으므로, 신립을 불러서 물으니, 그는 출전(出戰)하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이때 제도(諸道)에서 징발(徵發)한 군사(軍士)가 모두 아직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도하(都下)의 무사(武士)와 일없이 노는 사람들을 모아 군병(軍兵)으로 삼았는데, 3의사(三醫司)의 관원까지도 여기에 들었고 무고(武庫)에서 병기(兵器)를 꺼내고 또 조신(朝臣)들은 각각 전마(戰馬)를 내도록 명했었다. 김여물은 마침 어떠한 일로 옥(獄)에 갇혀 있었는데, 신립이 자신의 종사관으로 삼아 함께 떠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신립이 출발하려고 할 때 선조가 인견하고 친히 상방 보검(尙方寶劍)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순변사 이일 이하 모든 장병(將兵)들을 이 칼로써 지휘(指揮)하여 임무를 다하라.” 하고, 또 중로(中路)에서 병졸을 모으게 했는데, 충주에 이르니 군중(群衆)은 수천 명에 불과하고 이일이 상주(尙州)에서 패주(敗走)하여 충주로 왔다.

그보다 앞서 순변사 이일은 군관 60여 명과 군졸 4,000여 명을 이끌고 남하하여, 경상도 상주에서 ‘제승 방략(制勝方略)’ 전술로 싸우려고 하였으나, 왜군이 먼저 상주에 들어와서 점령하였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사가 흩어졌으므로, 이일은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와서 신립의 군사와 합류하였다. 이일이 신립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여줄 것을 간청하였다. 처음에 신립은 군법에 의하여 이일을 목베어 조리돌리려 하다가, 이일의 재주를 아껴 용서하였다. 원래 두 사람은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신립이 왜적을 막아낼 계책을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병력(兵力)의 차이가 너무도 크므로 여기서 대적(對敵)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후퇴해서 서울을 지키는 것이 가장 옳겠다.” 하였다. 이에 신립이 그를 꾸짖기를, “그대가 감히 다시 아군을 교란시키려고 하는가. 다만 앞으로나마 공(功)을 세워 충성을 맹세하라.” 하고 드디어 이일을 선봉(先鋒)으로 삼았다.

이때 김여물이 먼저 조령(鳥嶺)에 의거하여 싸우기를 청하니, 그는 왜적들이 이미 조령 밑에까지 육박해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그가 말하기를, “지금 떠났다가 조령까지 당도하지 못하고 서로 부딪치게 되면 사태는 위급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군은 모두 훈련되지 못한 병정(兵丁)인데다 또한 평소에 어루만져 친근히 따르던 병사들이 아니기 때문에, 사지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그들의 도움을 바랄 수가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충주에서 서북쪽 4㎞ 지점에 있는 탄금대(彈琴臺)에 나아가 달천을 배후(背後)에 두고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대개 그는 평지(平地)에서 기병을 급히 몰아서 그들을 짓밟음으로써 소수의 병력으로써 많은 적군을 쳐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두로 한 왜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오자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왜적들은 벌써 조령을 넘어와서 산과 들에 가득 차니, 검광(劍光)은 햇빛을 가리고 포격(砲擊)은 땅을 뒤흔들었다. 신립이 제군(諸軍)을 지휘하여 진격하면서 두 번이나 친히 적진을 뚫으려고 했으나 견고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적들은 먼저 이미 아군의 우측을 포위하고 동쪽 서쪽에서 협공하니, 그 형세는 마치 태산이 내리누르는 듯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탄금대로 되돌아와서 김여물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남아답게 죽을 뿐이고. 대의(大義)에 있어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 하자, 김여물은 말하기를, “나도 또한 공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김여물에게 장계(狀啓)를 초하여 휘하 사람을 시켜 이를 서둘러 선조에게 올리게 한 다음, 함께 적진에 육박하여, 왜적 십 수 명을 쳐서 죽이고 끝내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빠져 죽었다.[『송자대전』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 그러나 이일은 도망쳐서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선조를 알현하자, 선조는 그를 몹시 냉대하였고, 측근에게 그 초라한 행색을 흉보기까지 하였다. 한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임진왜란 때 삼도 도순변사 신립이 문경 새재를 지키지 않고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결했다가 참패하였다.”고 하였다.[『다산시문집』 권1]

[신립과 이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
조선 시대 만주 지역에 건주(建州) 여진과 해서(海西) 여진, 그리고 야인(野人) 여진이 있었는데, 건주 여진은 명(明)나라의 요동(遼東) 지방과 조선의 압록강과 두만강에 접한 남만주(南滿洲)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다른 여진보다 앞서 중국과 조선의 문물을 받아들여 상당히 발달된 농경사회를 이루었다. 건주 여진은 올랑캐[兀良哈]족의 건주본위(建州本衛)와 오도리[斡朶里]족의 건주좌위(建州左衛) · 건주우위(建州右衛)의 3위(三衛)로 나누어졌다. 한편 두만강 유역에는 건주 여진에 합류하지 않았던 와르카[瓦爾喀]족이 살고 있었는데, 와르카족은 두만강 유역에 살면서 조선에 복속하여 토착화 과정에 있었던 호적(胡賊)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성저(城底) 여진’이라고 불렀다. 1583년(선조 16)에 회령(會寧)의 와르카족 추장 니탕개(尼蕩介)가 반란을 일으켜 경원(慶源)을 약탈하자, 신립이 기병 5백 명을 동원하여 그 본거지를 소탕하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니탕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온성 부사 신립과 회령 부사 이일이 손을 잡고 ‘제승방략’의 작전법에 의하여 오랑캐를 정벌하였다.

16세기 말에에 오도리족의 누르하치가 조부(祖父)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1583년(선조 16)에 남겨진 13벌의 갑옷[鎧]만을 가지고 기병(起兵)하여 원수 니칸외란[尼堪外蘭] 곧 명나라에 복속한 여진족을 공격하였다. 이때부터 누르하치는 전쟁과 회유를 통하여 압록강 유역과 백두산 일대에 살던 건주위(建州衛)의 여러 부족(部族)을 통합하여 나갔다. 세종이 김종서(金宗瑞)와 이징옥(李澄玉)을 보내어 두만강 유역에 6진(六鎭)을 개척하고, ‘제승방략(制勝方略)’의 작전 지침서를 완성하여 여진족의 침략을 막았다. 이 작전 지침서는 6진(鎭)의 방어사(防禦使)와 함경도 병마사에게 전수되어 여진족을 막았다. ‘제승방략’의 작전 내용은 공격보다 방어를 위주로 하는데, 현지의 지형(地形)을 최대한 이용하여 적을 막는 방법이다.

선조 때 ‘제승방략’의 지침서를 활용하여 호적을 막는 데 가장 성공한 사람은 신립과 이일 두 사람이었다. 선조는 신립에게 니탕개를 공격하게 하였고, 또 이일에게 누르하치의 본거지를 치게 하였으나, 신립은 공격하여 성공하였으나, 이일은 차일피일 미루고 공격하지 않았다. 이일이 누르하치 본거지를 공격하여, <성화(成化) 3년의 전역(戰役)>처럼 누르하치 오랑캐의 본거지를 소탕하였더라면, 동양의 역사는 분명히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1592년(선조 20)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르하치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남만주의 건주) 여진을 모두 통일하였다. 특히 왜란이 끝나던 해인 1598년(선조 26)에 누르하치는 장자(長子) 저영(褚英)을 보내어 두만강 유역의 와르카부를 정복하여, 건주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는 사업을 완전히 끝마쳤던 것이다. 이때에 와르카족은 1만여 명이 누르하치의 군대에 투항하였으나, 그 일부가 조선과 해서(海西) 여진의 우라[烏喇]부로 귀부(歸附)하였다. 조선에 투항한 와르카족의 귀속(歸屬) 문제로 말미암아 누르하치는 해서 여진을 공격하였고, 또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도 청(淸)나라 아민(阿敏)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의 하나로 이 문제를 거론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누르하치가 의주(義州)로 피난하여 온 선조에게 사신을 보내어 원병(援兵)을 보내겠다고 자청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것을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왜란 중에 1595년(선조 28)에 조선 조정에서는 비밀히 신충일(申忠一)을 누르하치의 본거지 흥경노성(興京老城)에 보내어 누루하치의 형세를 정탐(偵探)하게 하였는데, 이때 보고한 글이 바로 『건주기정(建州起程) 도기(圖記)』이다. 신충일의 『건주기정 도기』를 보면, 1595년(선조 28)에 누루하치의 거성(居城)은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거주하는 사람도 불과 4~ 5백 명에 불과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일과 신립이 흥경의 누르하치성을 정벌하였더라면, 충분히 이길 승산이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건주 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의 세력은 크게 강성해져서, 명나라와 조선에서 그를 통제할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 해서 여진의 우디캐[兀狄哈]족은 항상 건주 여진을 제압할 만큼 그 세력이 강력하였는데, 누르하치는 1599년(선조 32년)에 하다[哈達]부를 공격하고, 1607년(선조 40)에 우라[烏喇]부를 공격하여, 오랫동안 혈전(血戰)을 벌인 끝에, 1612년(광해군 4)에 해서 여진의 홀라온(忽刺溫) 우디캐족을 완전히 복속시켰다. 누루하치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명나라에서는 그에게 용호 장군(龍虎將軍)이라는 관직을 주어 회유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조공하기를 거절하고, 1618년(광해군 10) 4월에 점령군을 일으켜 요동의 무순(撫順) · 청하(淸河) 등지를 차례로 함락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왜란 때에 제3차 동정군(東征軍)을 이끌었던 양호(楊鎬)를 요동 경략(遼東經略)으로 삼고, 명군(明軍) 10여 만 명을 동원하여, 후금(後金)의 누루하치를 토벌하게 하였다. 조선에서도 명나라의 요청으로 말미암아 출병(出兵)하였는데, 광해군 때 강홍립(姜弘立)이 1만 3천명의 조선군을 거느리고 참전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3월에 명군은 4로(四路)로 나누어 누루하치를 공격하였으나, 작전에 차질이 생겨서 무순 동쪽 사르후[薩爾許]에서 누루하치의 군대에게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사르후 싸움이 사실상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전투였다. 강홍립은 살아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여버렸다.

[성품과 일화]
신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모습은 단정하고 엄숙하며, 얼굴빛에 자기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평소에 마음가짐이 차분하고 정돈되어 마치 경서(經書)를 익히는 서생(書生)이나 학문하는 사람과 같았다. 그러나 군진(軍陣)에 임하여 적(敵)을 대적할 적에는 비록 좌우(左右)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라도 또한 두려워서 떨지 않을 수 없었고, 감히 엿볼 수조차 없었다. 부하를 통솔하는데, 은의(恩義)를 중히 여겨서,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적은 것이라도 부하들과 나누어 먹고, 병든 사람이 있으면 몸소 친히 위문하고 약을 발라주니, 병사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고 기꺼이 복종하였다.[『송자대전』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 그는 옛날 명장(名將)의 풍모를 가지고 있어서 평소 위엄이 있고 용맹스러웠다.[『상촌집』 부록 권1]

신립의 중형(仲兄) 신급(申礏)이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으로 있으면서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위하여 소장(疏章)을 올려서 도리(道理)를 밝히고 이어서 동인(東人)들의 공격을 물리쳤을 적에 선조가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곧도다. 그대의 아우 신립이 진충보국(盡忠報國)하여 힘껏 변방의 성보(城堡)를 지키고 있음으로써 오랑캐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데, 그대가 또 항소(抗疏)하여 간사한 무리들을 물리치는구나. 어쩌면 이렇게도 한 집안에서 충의지사(忠義之士)가 함께 나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왜란이 일어나자 신립의 아우 신할(申硈)은 병사(兵使)로서 임진(臨津)에서 왜적들과 싸우다가 또한 순절(殉節)했다. 신급은 음직(蔭職)을 지내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던 중에 급작스레 왜적을 만났는데, 어머니가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지자 신급도 뒤따라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송자대전』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

신립이 니탕개를 정벌할 때 두만강을 건너가서 곧장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자, 여진족 한 노파(老婆)가 그의 딸을 데리고 와서 살려 주기를 빌었는데, 그 딸의 용색(容色)이 아주 빼어났다. 신립은 이들 모녀를 베어버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이러한 우물(尤物)을 남겨 두면 반드시 사람에게 해독(害毒)을 끼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청강 이제신이 함경도 절도사로 있으면서 언제나 신립의 용감한 지략(智略)을 보고 탄복하였는데,[『송자대전』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 두 모녀를 살려주었을 때 여러 가지 추문(醜聞)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립은 신의와 절개를 굳게 간직했었는데, 청강 이제신이 니탕개가 경원부를 침입한 패전의 책임을 물어서 의주로 귀양 가서 그곳에서 죽으니, 신립은 언제나 분개하고 그 억울한 정상을 드러내었으므로,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은 그 심정을 시가(詩歌)로 지어서 읊기까지 하였다. 또 신립이 일찍이 정승 정언신의 관하(管下)가 된 적이 있었는데, 정언신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좌(連坐)하여 곤장을 맞고 유배되자, 남들은 감히 그 집에 찾아가지 못했으나, 그는 홀로 자주 드나들면서 정언신의 부인(夫人)에게 문안을 드렸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장차 신성군(信城君)이후(李珝)와 김인빈(金仁嬪) 모자(母子)를 죽이려 한다는 간신들의 비난을 받았을 적에 선조가 크게 의혹하고 노여워하여, 어느 날 이 사실을 그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신은 청컨대, 백구(百口)로써 그를 보장하겠습니다. 이것은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참소해서 죽이려고 한 것에 불과합니다. 정철이 비록 도량은 편협하더라도 신이 가만히 그의 심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훌륭한 군자(君子)입니다.” 하였다. 그러므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언제나 신립을 칭찬하면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를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송자대전』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경기도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에 배향(配享)되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73 「도순변사 증 영의정 평양부원군 신공립 묘갈명(都巡邊使贈領議政平陽府院君申公砬墓碣銘)」] 신립의 아들 신경진(申景禛)이 뒤에 김여물의 아들 김류(金瑬)와 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모의하여 인조를 옹립하고, 마침내 영의정(領議政)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죽은 아버지 신립에게 영의정(領議政) 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을 추증하였다.

첫째 부인 이씨(李氏)는 이우명(李㬂命)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둘째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무인(武人) 최필신(崔弼臣)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신경진은 영의정을 지냈고, 평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차남 신경유(申景祀谷)은 동평군(東平君)이고, 3남 신경인(申景禋)은 동성군(東城君)이다. 장녀는 선조의 서출 제 4왕자 신성군(信城君)이후(李珝)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이대엽(李大燁)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징비록(懲毖錄)』
■ 『간이집(簡易集)』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곡집(谿谷集)』
■ 『계미기사(癸未記事)』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재사초(寄齋史草)』
■ 『난중잡록(亂中雜錄)』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계집(桐溪集)』
■ 『만기요람(萬機要覽)』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문소만록(聞韶漫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부상록(扶桑錄)』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서계집(西溪集)』
■ 『서애집(西厓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와잡설(松窩雜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 『우계집(牛溪集)』
■ 『우복집(愚伏集)』
■ 『운암잡록(雲巖雜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자해필담(紫海筆談)』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청성잡기(靑" 城雜記)』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한강집(寒岡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해사일기(海槎日記)』
■ 『혼정편록(混定編錄)』
■ 『가오고략(嘉梧藁略)』
■ 『가휴집(可畦集)』
■ 『간옹집(艮翁集)』
■ 『간이집(簡易集)』
■ 『간재집(艮齋集)』
■ 『강좌집(江左集)』
■ 『건재집(健齋集)』
■ 『검간집(黔澗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기언(記言)』
■ 『낙재집(樂齋集)』
■ 『낙전당집(樂全堂集)』
■ 『남계집(南溪集)』
■ 『노봉집(老峯集)』
■ 『농포집(農圃集)』
■ 『도곡집(陶谷集)』
■ 『도암집(陶菴集)』
■ 『동주집(東州集)』
■ 『매산집(梅山集)』
■ 『면우집(俛宇集)』
■ 『몽오집(夢梧集)』
■ 『몽와집(夢窩集)』
■ 『묵암집(默庵集)』
■ 『문월당집(問月堂集)』
■ 『백강집(白江集)』
■ 『백사집(白沙集)』
■ 『백헌집(白軒集)』
■ 『백호집(白湖集)』
■ 『번암집(樊巖集)』
■ 『부사집(浮査集)』
■ 『분애유고(汾厓遺稿)』
■ 『사류재집(四留齋集)』
■ 『서하집(西河集)』
■ 『선양정집(善養亭集)』
■ 『성재집(性齋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소호당집(韶濩堂集)』
■ 『손와유고(損窩遺稿)』
■ 『송강집(松江集)』
■ 『송사집(松 "沙集)』
■ 『송천유집(松川遺集)』
■ 『식암집(息庵集)』
■ 『심암유고(心庵遺稿)』
■ 『악록집(岳麓集)』
■ 『약포유고(藥圃遺稿)』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여호집(黎湖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외재집(畏齋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월사집(月沙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인재집(訒齋集)』
■ 『중봉집(重峰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태천집(苔泉集)』
■ 『포저집(浦渚集)』

■ [집필자] 이현숙